소설리스트

61화 (61/189)

축제

지하 도시에 꽁꽁 숨은 그 조직을 끄집어 내려면 뭐가 필요할까. 뭐 이럴 때는 언제나 먹음직스러운 미끼

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맛조개에게 소금을 뿌리듯, 쥐덫에 치즈를 올리듯. 아, 쥐는 치즈를 별로 안 좋아

하던가. 아마 만화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긴 걸로 아는데.

무섭구나, 문화의 힘.

“저기, 여긴 왜… 우리 책 사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씨, 이게 풀리네?”

세상 물정 모르는 김민혁을 꼬시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았다. 어렵지 않았다, 라고 표현해도 될 지 고민할

수준. 그냥 문자로 새로 생긴 서점에 선배가 찾던 책이 있는 것 같아요~ 라고 보내면 끝.

원래대로면 김민혁은 저주와 매혹 등 디버프 효과를 잡아먹고 역으로 성장해야 할 그림자 술사지만, 지

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 그림자를 내가 반쯤 먹었으니까. 세균이 침입하면 백혈구가 먹어버리지만,

백혈구가 존나게 늘어나면 뒤지는 것과 같은 이치.

“자, 선배, 여기는 새로운 서점으로 가는 길이야.”

따악- 손가락을 튕긴다. 그래도 메인 히로인 수준으로 생각한 초능력자라 그런지, 상급 흡혈귀의 최면을

버티는 모습. 어쩔 수 없이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길거리 한 복판에서 촛불을 키고 동전

을 흔들 순 없지.

따악“선배는 지금 혼자 서점으로 향하고 있어요. 이 길이 맞나 혼잣말을 중얼거렸죠.”

따악 소리와 함께 기억을 덧씌운다.

“후배가 봤다는 서점이 이 쪽이 맞을까? 지도를 찾아볼 걸 그랬어. 급하게 나오느라 단말기도 두고 현금

만 챙겼네. 아니야, 혼자 가도 상관없지. 책만 사고 얼른 돌아가야겠다. 빨리 가고 싶은데 지름길을 찾아

볼까?”

“…지름길.”

딱 소리와 함께 김민혁이 몸을 돌린다. 상점이 즐비한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한 번 꺾을 때 마다 좁고 어

두워지는 골목길. 범죄 감시와 빌런의 출현을 감지하기 위한 카메라가 점차 줄어들다 완전히 사라질쯤

갑작스레 멈춰서는 김민혁.

아마 그의 눈에는 지금 이 곳이 훌륭한 서점으로 보이겠지. 환상 속에서 열심히 책을 고르고 있을까, 아니

면 내게 문자를 보내고 있을까. 그건 알 바 아니지. 골목 저 편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

린다.

“그래서, 그게 오늘 거래 품목인가?”

“이야, 벌써부터 마중을 나왔나요?”

이제는 익숙해진 양아치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대충 입은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덕지덕지

뚫은 피어싱과 팔뚝의 문신. 겉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C급 언저리도 되지 못하는 심부름 꾼이

다.

“참… 이런 걸 보면 너랑 나랑 궁합이 참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생각 없어?”

그런 연약한 인물이 왜 빌런이 되고 싶은 테러리스트 조직의 말단으로 있을 수 있나 싶었지. 그녀의 능력

은 최면. 물론 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능력이다. 최면 보다는 암시에 가깝다.

“뭐, 대금을 50% 추가해 주면 생각해 보죠.”

“이야, 비싼 몸이네. 여기에 50%를 추가라… 한 10년만 기다려 줄래?”

고개를 젓더니 김민혁의 앞으로 다가가 등 뒤에서 껴안는 그녀.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다른 손은 가슴

위에 올린 다음 귓가에 속삭인다. 능력이 낮다 보니 반복해서 속삭여야 하는 것이다. 능력이 조금 더 높아

지면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대화로 암시를 걸 수 있겠지만 가망은 없어 보인다.

“대놓고 주물럭거리네, 손에 힘 안 빼면 상품 상하는 거 아닌가? 서점에 혼자 가다 납치 당한걸로 해 놨으

니까 제대로 받아가요. 그리고 걔가 마지막 상품이고, B급이라 더 이상은 무리니까.”

김민혁의 귓가에 속삭이느라 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양아치는 가슴을 주물럭 거리던 손을 들어 내게 중지

만을 펴 보여준다. 처음 남학생들을 팔아 넘길 때 찝적거리던 팔을 꺾어버렸는데 참 심지도 굳다.

쓰레기통 옆에 세워진 검은 서류 가방을 챙겨서 나는 내가 들어왔던 골목의 반대편으로 나갔다. 아직 해

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래서, 뭘 원하신다구요…?”

“CCTV의 조작, 거짓 정보 판매, 범죄 경력 없는 감시 인원의 파견. 쉽지 않아?”

김한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하루였다. 새로 들어온 쌔끈한 남자 아이에게 봉사를 받고, 주변 조직과 만

족스러운 협상을 하고, 오늘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영업을 하던 와중 들이 닥친 그 작고 예쁜 괴물.

그래, 괴물. 눈 앞에 있는 이건 괴물이었다.

“CCTV조작은 이해합니다. 감시 인원의 파견… 네, 학교 쪽에도 연줄이 있으니까 저희 애들 중 밖에서 돌

아다니는 애들을 고용시키는 건 일도 아니죠.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다시 설명을 좀…”

“니가 소탕해 달라던 조직한테 우리 학교 남학생을 열 몇 명 정도 인신매매해서 넘겼다니까?”

“아니, 그걸, 왜…?”

이 작고 예쁜 괴물은 정말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압도적인 폭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수단들. 대처할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 지하 도시에서 제일 두려운 상대였으니까.

“왜, 라니 무슨 뜻이야?”

일단 첫 등장, 몇몇 조직을 두 여자가 쓸어버렸다. 예상 등급은 육체 강화로 C급 정도. 그러더니 최면으로

수십의 사람을 홀려 제 부하로 써먹었다. 수십을 수족으로 부리려면 이건 약 B급 이상. 그 다음은 금은보

화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지. 최면과 조금 다른 쪽이지만 이 쪽도 B급 이상.

그리고 나서?

얼음 송곳을 만들고, 혈액의 검을 만들고, 육체는 강화되어 있으며, 기계 없이 세 사람이 의사소통을 하는

걸 봐선 텔레파시도 있다. 거기에 괴물 병사를 만들었다는 걸 봐선 고작 세 사람이 유전자 조작과 관련된

기술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이게 고작 3명, 그 것도 고등학생 3인방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인가?

‘대체 정체가 뭐야?’

신분증으로는 분명 고등학교 1학년. 하지만 이건 B급의 히어로 전소희가 만들어 온 서류. 그 전의 기록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수백 수

천 단위로 죽인 기억도 있다.

“그… 그 조직을 무너트리는데 어째서 그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아, 나도 같이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울 마누라 A급 올려 줘야지.”

‘마누라? 동거 중인 여자가 전소희… B급 육체 강화 능력자였지. A급으로 올린다고?’

오싹, 팔에 소름이 돋는다. 숨기려 들지도 않는지 느껴지는 강렬한 욕망. 끔찍하게 느껴질 수준의 소유욕

과 성욕. 저걸 사랑이라 부른다면 히틀러도 유대인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머릿속에서 절대 건

드리면 안될 인물 목록에 김소희(B급 히어로 / 남편이 무서움)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그… 학교로 유인하시는 겁니까?”

“피해가 크면 좋을까, 적으면 좋을까? 피해가 너무 크면 소희 이름값이 올라도 지키지 못했다는 꼬리표

가 붙을 것 같고… 너무 피해가 적으면 별 것 없는 새끼들이라고 우리 소희 공적치가 너무 낮아질 것 같은

데.”

고등학교 1학년짜리 예쁘장한 소년이, 자기 학교 학생들을 몇 명이나 죽여야 자기 애인에게 좋을지 고민

하는 모습은 지하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날 무릎 꿇었던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는 게 뼈

저리게 느껴지는 상황.

“이 근방 CCTV는 저희 애들이 관리하니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보낼 애들은 어떻게 고를까요?”

“떡대 좋은 애들로 교문 정비 세워서 그쪽 조직 애들 들어오면 나한테 무전만 치게 해요. 일 터지면 전부

철수시키고. 괜히 끼어들어서 방해하면 걔들도 같이 묶어서 죽일 거야. 사실 내부 정보를 팔아 넘긴 건 이

가드들이라고.”

빌런이 학교를 점령했는데 가드가 도망을 치면 이 일로 먹고 살지는 못하겠지만 뭔 상관이냐? 우리 조직

애들인데 살리고 봐야지. 이익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다간 등 뒤에서 100% 찔리

는게 우리 조직이다.

복잡한 나의 심정 따위는 상관 없이 맛있다는 듯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오물거리는 그 귀여운 얼굴. 그 자

그마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나이 서른 먹은 조폭 두목의 가슴을 떨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그래서, 몇 명 정도 죽는 게 좋을까?”

“그걸 정하실 수 있습니까?”

“방치해두다 어느 정도 선에 나서서 구하면 되는 거니까? 음, 요리사 실력이 정말 좋네요. 우리 학교로 와

서 급식 만들어 주면 좋겠다. 지하 도시에 식재료를 파는 곳이 따로 있나?”

"하하... 저희 쪽에서도 꽤 대우해주는 인재라서요. 원래 높으신 분 대접할 때 맛있는 요리와 술, 남자가

빠질 순 없지 않겠습니까."

빌런을 꿈꾸는 조직을 무찔러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더니, 그래! 걔들이 우리 학교에 와서 내 친구들을 죽

이고 강간하면 그 때 무찌르기 위해 인신매매를 조금 해야겠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과연 이 작은 괴물

말고 있을까?

[작품후기]

이야기의 도약이 너무 심해 중간 한 편을 끼워 넣었습니다.

새로운 내용이 62편으로 추가되고, 기존의 62편이 63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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