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89)

자그마한 세상

히어로와 빌런, 천사와 악마, 합체 로봇과 거대 괴수, 용사와 마왕, 정파와 마교.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 결국 정의와 악의 싸움이라 볼 수 있다. 이 것은 고대의 사람들이 이

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잡힌 틀. 수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으며 그에 질린 사람들은 사실 선이 악이었다, 악

이 선이었다, 둘 다 악이다, 둘 다 선이다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바리에

이션 또한 하나의 틀이 되었고.

‘벌써부터 각이 나오네?’

뭐, 이야기는 거창하지만 결론은 딱 하나다. 가상 현실 게임을 그렇게 했더니 스토리가 술술 써지는거지.

정의로워야 할 윗사람이 사실 흑막이었다! 같은 건 너무 흔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니까. 아마 히어로 협

회의 높으신 분들이 관리하는 도시 아닐까?

왜 고전 영화를 보면 기업의 CEO가 조직폭력단을 몰래 소유하고 있다든가 하는 느와르물이 인기라고 했

었는데. 게임 안에서도 황제가 암살 조직이나 뒷세계에 몰래 손을 뻗는 건 흔하고. 정파의 장로가 사실 마

교도라던가.

지도에서 우리 구역 아지트를 눌러보니 2인조 루키의 아지트라 소개가 되어 있어 헛웃음이 나온다. 이 와

중에 랭킹도 매기는 거야? 상세 정보를 누르니 대략적인 정보가 보인다. 최근 등장한 2인조 여성이 이끄

는 조직. 육체 강화와 매혹 관련 능력으로 보인다. 특히 남성에게 효과적이다.

초능력이 파악되었고, 남창들을 건드린 것 또한 들켰다. 더 이상의 정보를 원한다면 유료 과금 페이지로

넘어간다는 말에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돈을 쓰면 이하린에게 미한하기 때문이 아니다. 결제를 누르자

뜨는 홍채 인식기.

그냥 본인 인증을 못해… 빌어먹을 최첨단 기기.

뒤로 가기를 누르고 GPS기능이 아닌 게시판으로 간다. B급 초능력자일땐 들어가지도 못하던 A급 게시

판. 뭔가 있을까 싶어 게시글을 쭉 돌아본다. 정보 게시판, 은 내가 받은 임무가 아니면 공개되질 않네. 이

하린이 하던 업무는 대부분 영웅 협회 홍보. 과거 내역을 검색해 봐도 일반 연예인과의 합동 공연 말고 볼

게 없었다.

자유 게시판을 들어가 목록을 쭉 본다. 협회를 욕하는 글, 협회를 욕하는 글, 섹스하고 싶다는 음담패설,

협회를 욕하는 글… 뭐야 씨발. 이게 A급 히어로의 게시글이라고? 학생용 예비 히어로 게시판이랑 다른

점은 욕하는 이유가 구체적인 것 말고 없는데.

빌런과의 전투로 부상을 입었는데 의료 캡슐이 늦게 도착했다. 빌런 정보를 구매했는데 뒤늦게 업데이트

되어서 낭패를 봤다. 화염계 빌런이라더니 육체 강화 능력자가 도구를 사용 중이었다 등등.

“하늘아, 뭐 봐?”

“이거, 오늘 방송 촬영 대가로 받은 A급 히어로 게시판.”

열중해서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다가오는 인기척. 조희정이 간만에 반장 다운 역할을 하고 있는지 양 어

깨에 서류 뭉치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내 눈에는 연약해 보이지만, 일단 그녀는 B급에 가까운 모범생. 이

학교에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학생은 나랑 강정태, 김민혁 이 셋 밖에 없었다.

뭐 이 세상 여자에겐 자기보다 강한 3인이 다 남자라는 게 자존심 상할지도 모르지만,

“아! 부럽다! 우리는 예비 히어로 게시판 밖에 못 가는데!”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 들러붙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당초 강정태와 대련을 할 때마다 바닥을 뒹굴면서도 그닥 분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현실 순응이 빠

른 건지 경쟁심이 적은 건지.

“그래서, 뭐 재밌는 거 없어?”

까불거리면서도 이런 곳에서는 선을 잘 지키는지 직접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맞은 편 책상에 앉는 조희

정. 하체 위주로 강화되는 능력자라 팔이 아픈지 팔을 축 늘어트리고 책상에 엎드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팔뚝이 바르르 진동하는 게 보인다.

“별 거 없어. 특히 자유 게시판은 90%가 협회 욕인데.”

“그래? A급 히어로도 별 건 없나… 아, 정태가 점심 같이 먹자는데 점심 약속 있어?”

“고등학생이 무슨 점심 약속이 있겠어.”

“아니… 그 행정실에 오신 분.”

“괜찮아, 오늘은 행정실 직원들이랑 먹는다고 아침에 말했어.”

“아침? 어… 동거까지 하는 거야?”

화들짝 놀라 이 쪽을 바라보는 그녀. 쾌활하고 천진난만한 축에 속해 음담패설에 면역이 없는지, 동갑내

기 남고생이 성인 여성과 동거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런 반응 때문

에 남녀 역전이 재미 있다고 하는 건가.

“난 집이 없으니까?”

“아… 어, 그게.”

새빨간 얼굴이 다양한 표정으로 변하는 건 보는 맛이 있었다. 학교에서 떠들 때는 늘 초능력과 대련에 관

련된 이야기만 했으니까. 내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들어본 적 없겠지. 아마 머릿속에서는 온갖 스토리

가 진행되고 있지 않을까?

플레이어 중에서 어지간히 특별한 취향이 아니고서야, 가상 현실 속에 들어와 인생을 살 때 새로운 부모

가 쑥쑥 생기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SF함장 부모 하나, 정파 무림 세가 부모 하나, 현대물 부모 하

나… 그런 식으로 부모를 양산해 봐야 스토리 진행만 귀찮아지고 얻는 거라곤 부모 없냐는 말에 너무 많

다고 대답할 수 있다는 점?

내 입장에서는 부모가 없는 게임 플레이가 100년을 넘어 아무렇지도 않게 고아라고 말한 건데, 이 순진

한 NPC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 같았다.

“괜찮아, 영 신경 쓰이면 점심에 매점에서 음료수나 하나 사와.”

“그래, 그러지 뭐.”

하지만 어두워진 낯빛은 밝아질 기색이 없었다. 쾌활함 하나 장점인 녀석인데 고작 이 정도에 풀이 죽다

니. 그 모습에 아까 이하린이 단말기를 주고 튀어서 치지 못한 장난이 생각났다.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는

조희정의 앞에서 다시 체육복 지퍼를 내린다.

“어… 자, 잠깐만?!”

슬금 슬금 내려가는 지퍼, 벌려지는 체육복 앞섬. 목에 딱 달라붙는 체육복이 벌어져 쇄골이 살짝 보일 때

가 되어서야 로딩이 끝난 고물 컴퓨터처럼 팔짝 뛰어오른다. 역시 각력 강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

나는 모습이 거의 서전트 점프와도 같았다.

“아니, 저기요? 뭘 하시는 겁니까?”

“왜? 보기 흉해?”

“아니, 흉하지는 않고 되게 예쁜 피부긴 한데…”

차마 뚫어져라 바라볼 순 없는지 고개를 돌리길래 한 걸음 거리만 남겨두고 달라붙는다. 원래는 이하린

에게 해보려는 장난이었지만, 이 쪽 반응이 더 커다랗고 보기 좋네.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피부는 멀찍이

서도 열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왜, 보고 싶으면 보면 되는데.”

“아니, 야, 씨! 왜 갑자기 그러는데!”

얼굴이 붉다 못해 검게 변한 조희정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생각보다 귀여운데 조금 건드려 볼까? 능력치

도 나쁜 편은 아니고, 강정태랑도 엮여 있으니 쓸만할 것 같은데. 툭 건드려보는 장난질이 슬슬 진지하게

변할 것 같았다.

지퍼를 끝까지 내린다. 몸에 꽤 달라붙는 재질이라 가슴팍이 드러나진 않지만 작게 열려 옅은 복근과 가

슴골 정도는 보이는 상황. 남자가 되어서 가슴골을 가지고 여자를 유혹하는 게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생

각이 들긴 하지만 뭐 어때.

“어 그… 왜 다가오는 건데?”

말없이 한 걸음 다가가자 뒤로 물러서는 조희정. 물러난 만큼 따라가며 주변에 집중한다. 슬슬 나타날 것

같은데.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대답이 없자 결국 그녀의 자그마한 입이 꾹 다물어진다. 걸음을 옮길 때 마

다 흔들리는 옷자락에 그녀의 눈동자도 같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울린다. 이제 보일 듯 말 듯 체육복에 가

려진 내 가슴에 그녀의 신경이 오롯이 쏠린 것을 느끼고 손을 뻗는다. 손 끝에 잡히는 감촉과 동시에 내가

원하던 소리가 들려온다.

“희정아…”

“어, 옜?”

“뭔가 잊은 거 없냐?”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에 서류 뭉치를 안겨주고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러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서류를 껴안은 그녀.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황을 파악하려는 그 때, 쾅 소리가 나도록 교실 앞 문이 열

린다.

“야, 조희정.”

“으, 우왁! 정태야!?”

딱딱하게 굳다 못해 마주한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표정이 차가워진 강정태가 앞문을 열고 교실

안을 바라본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서류를 챙기는 조희정. 지퍼가 열린 체육복을 손으로 여미며 가슴을

가리고 있는 나.

“하늘아,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잘 가르쳤어야 했어.”

“뭐, 뭘 가르쳐?”

“설마 서류를 옮겨주다 말고 옷 갈아 입는 걸 훔쳐볼 줄이야.”

“아냐! 훔쳐본 게 아닌데!”

“닥치고 따라와.”

그 바른 생활 사나이의 입에서 닥치란 말이 나오자 장난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는지 조희정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목덜미를 잡힌 채 끌려갔다. 내가 왜 이랬는지, 강정태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학원물에서 사랑하는 소녀의 질투보다 무서운 게 있을까?

[작품후기]

아마하라 센세... 남녀 역전 만화가 여자주인공 전연령판으로 튀어나오며 19금 떡인지는 멈춘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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