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89)

자그마한 세상

끈적하게 괴롭히니, 아니 괴롭힘 당한 건가? 섹스의 주체가 누가 되었던 소희랑 찐하게 엉겨 붙어서 하루

를 보내니 남 몰래 쌓였던 스트레스가 상당히 사라진 게 느껴진다. 주로 지금 저 귀찮은 년이 말하는 걸 무

시할 수 있을 정도로.

“손대중하지 마! 전력으로 덤벼!”

“학생한테 너무 과한 걸 바라시네.”

대련실 전체를 휘감던 폭풍은 이제 그녀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돌풍의 칼날이 되었다. 난반사되어 잔해를

불규칙하게 던지던 바람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장벽이 되었고. A급 히어로지만 동급의 근접 격투가 조차

감히 덤벼들 수 없는 강력한 능력.

물론 파훼 할 방법은 많았다. 피안개를 뿌리던가, 그림자에 파고들던가, 최면을 걸어도 좋고 혼란 마법을

걸어도 좋았다. 바람이 막지 못할 정도로 강한 물리력으로 철근을 던져 점으로 돌파할 수 있지.

“네! 역시 후학 양성을 위해 은퇴한 A급 히어로 다운 맹렬한 공격! 그걸 받아 치고 흘려내는 학생 답지 않

은 노련한 몸놀림!”

저 카메라만 없었더라면.

날아오는 잔해를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탁탁, 권투의 복싱 스텝을 따라하듯 발목의 힘만 사용해 이리

저리 움직인다. 머리 위부터 무릎 옆까지 다양한 궤도로 날아가는 콘크리트의 잔해. 이 새끼, 쇼맨십이 상

당하네.

“바람 칼날은 보이질 않으니까 사용하지도 않는 주제에, 뭘 전력으로 오라는! 거야!”

피할 수 없는 궤적의 잔해를 손날로 내리 찍어 잘라버린다. 떨어져 내리는 잔해를 발로 차 날려보지만 회

오리에 갈려 가루가 될 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그 잿빛 먼지 바람 너머에서 그녀가 크게 외친다.

“이런 견제는 의미가 없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

오늘 아침에, 이대로 학교 빼먹고 침대에서 뒹굴까? 라는 충동을 이겨내지 말았어야 했어. 무단 결근과

결석 하루씩 땡긴다고 인생에 큰 결점이 생기는 건 아닐 텐데. 그래도 얘 때문에 소희를 키울 수 있겠지.

예비 히어로인 학생들을 공격하면 시민과 히어로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햇병아리 학생들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게 같이 있지 않은가. 월드 스타 급 인기를 가진 상태로 갑자기 은퇴를 한 A급 히어로. 그

러니까 이딴 방송 허락을 한 거지. 지금 당장 쳐들어오면 좋겠는데.

결국 방송은 바닥을 부숴 잔해를 흩뿌려 교란한 뒤 파고들려던 내가 바람에 붙잡혀 허공에 매달리는 상태

로 끝을 맞이했다. 촬영팀은 간만에 인기 스타 이하린의 전투 영상을 찍었으니 기분이 좋고, 교사진은 우

리 학교 학생이 이렇게 뛰어나다고 자랑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고. 나는 고작 20분 대련하고 오전 수업을

전부 빼먹어서 만족스럽고.

“…야, 너 왜 그렇게 대충 싸워.”

“…카메라 앞에서 밑천 다 까라고?”

불만족스러운 것은 오직 이하린 하나였다. 평소에는 아득 바득 파고들어서 근접 박투까지 가는 내가 대

충 싸워서 기분이 나빠 보인다. 하지만 어쩌랴, 교장부터 교사까지 일 없는 사람은 이걸 구경 중인데. 전

력으로 싸웠다가 몸이 달아오르면 해결할 방법도 없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도 참 대단하네! 아주 장래가 유망해.”

살이 통통하게 올라 웃는 상이 뚜렷한 아줌마는 호쾌하게 웃으며 이것 저것 지시를 내린다. 하긴 다양한

루머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이하린의 첫 방송 출연인데 꽤나 좋은 영상을 건졌다고 생각하겠지. 칠

판 앞에서 강의를 하는 모습보단, B급 능력자랑 치고 박는 모습이 더 인기가 있을 테니까.

-방과 후에 전력으로?

-데이트하러 가야해, 꺼져.

그녀는 바람을 통해 내게 메시지를 전하고 나는 마법을 통해 텔레파시를 전한다. 이 빌어먹을 전투광은

하루라도 쉬는 날이 없어. 주말에 만나자는 문자가 와서 임자 있으니 꺼지라고 답장한 뒤 폰을 껐더니 월

요일에 교문에서 기다리는 미친년.

-왜 그러냐 진짜… 우리 둘 다 도움이 된다니까? 내일은 어때

더욱 대단한 것은 이하린에게서 성욕과 같은 부정적인 음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첫 만남이 그

따구였고, 집착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더니 정말 순수하게 싸움을 원한다. 남녀 역전 세계에 물들었는지

약간이나마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도 든다.

‘아니 시벌… 얘는 낯짝이 두꺼운 게 아니라 뇌를 비웠네?

내가 뭐 이쪽 남성도, 제비도 아니고 자의식 과잉도 아니지만 이건 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때 오르가즘을 느끼는 걸 보면 고자… 그러니까 석녀는 아니던데 왜 저럴까? 좋게 말하자면 올곧게 정

진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표현하면 애새끼 같다고 해야 할까. 연예인 겸 히어로가 미성년자에게 성적으

로 손을 댄 상태.

그런데 지 초능력 발전한다고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애써 외면하는 게 아니다. 정말 잊어버린 상황. 그녀

에게서 끝없이 넘쳐 흐르는 욕망은 능력의 완벽한 제어로 인한 히어로 등급 상승뿐. 그 올곧은 욕망에 짜

증이 조금 난다.

“아… 더워.”

툭, 툭툭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체육복 지퍼를 풀어 헤친다. 덥다는 혼잣말 때문에 시선이 모여드는 게

느껴진다. 카메라 앞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것 같아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려 두길

잘했네.

‘야, 저기 저거…’

‘어… 카메라 끕니까?’

‘뭘 꺼, 이 병신아?! 저런 걸 찍어야 시청률이 오르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 귀에 들렸다면 이하린의 귀에도 들린다. 그녀의 시선도 내 가슴과 쇄골

로 향한다. 이상한데서 성실한 그녀의 성격 대로라면 와서 주의를 주겠지. 별 거 아닌 심술이었다.

‘뭐… 살짝만 골릴까. 소희 또 삐질라.’

임자 없는 몸이었다면 이 기세로 꼬셔 다시 한 번 자빠트렸겠지만 학교엔 소희가 있다. 더군다나 외모는

매우 마음에 들지만 성격이 이상해서 내 쪽이 거부하고 싶은 상황. 솔직히 B급 격투가와 A급 속성 능력자

중 누굴 키우라 하면 100중 99는 A급을 고르겠지만 지금은 환승하기 귀찮다.

“하늘아, 카메라 아직 돌아간다. 단정하게 있어야지.”

젖지 않은 깨끗한 운동복이 어깨 위에 걸쳐진다. 그 상냥한 모습에 철수하려던 카메라들이 대놓고 이 쪽

을 촬영한다. 빠돌이들을 공략하는 장면을 뽑아가는 건가. 카메라가 보기엔 다정한 여교사가 단정치 못

한 남학생을 챙겨주는 모습이겠지.

-아 그러지 말고, 진심으로 대련 한 번 할 때마다 100만원 어때?

-무슨 원조 교제 거냐? 이 상황에 돈까지 받으면 진짜 오해받아 병신아. 그리고 A급이 S급에 가는 걸 도와

준 대가로 회당 100만원은… 양심을 어따 팔아 처먹으셨어요, 히어로 양?

텔레파시로 인해 머리 속에 다이렉트로 욕이 박혔음에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 밖으로는 나를

챙겨주는 걸 봐선 정말 연예계 생활 오래 한 것 같기는 했다. 그렇게 촬영이 대충 마무리되어 체육관 밖으

로 향하려는 찰나.

-그러지 말고 조건 좀 제시해 봐. 애인 있는데 연예인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화낼거잖아.

-그러면 A급 단말기 좀 쓰게 해 주던가.

-그래? 그거 진작 말하지. 좋아.

“…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내게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어 준다.

“아, 아까 풀어 둔 단말기 여기 있어. 비싼 건데 잘 챙겨 다녀야지.”

손 안에 쥐어진 손목 시계형 디스플레이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껀 소희가 사온 하늘색에 커플 무늬. 하

지만 손에 쥐어진 것은 알아보기 힘든 녹색 문양이 음각된 기계.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 내일 아침에 대련할 때 돌려줘! 협찬 받은 예비 기기니까!

누가 내일 아침에 대련을 해 준다고 했지?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휴대폰과 연동시킨다. 히어로 사이

트 등급에 늘 보던 B 대신 금색으로 빛나는 A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B급 이하에겐 정보 통제를 하는 세상

인데 단말기를 그대로 양보한다고?

스팸 메시지가 가득한 메일함, 읽지 않은 쪽지가 잔뜩 있는 쪽지함. 순간 호기심이 솟아올랐지만 무시하

고 정보 검색 기능을 활성화한다. GPS기반으로 인근에 있는 빌런과 히어로의 목록이 쭈르륵 떠오른다.

‘…이 새끼들, 역시 지하 도시를 알고 있네.’

화면을 이리 저리 움직여 지도를 돌려본다. 우리 학교에 있는 초능력자의 머릿수가 대강 표시되다가, 옆

의 여고를 지나 여고 기숙사를 너머 구역 경계선에 도착하니 빨간 화살표가 떠오른다. 그대로 화면을 내

려 지도 아래로 파고드니 나오는 지하 도시의 단면도.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닌데?'

클럽, 총포상, 인육을 팔지 않는 식당과 안전한 모텔. 정체를 숨기는 법과 하지 말아야 할 언행, 히어로임

이 들켰을 때의 대치법. 전투를 금지한다는 규칙과 히어로임을 드러내지 말고, 사건이 터져도 절대 연관

되지 말라는 공지 사항까지.

'무슨 맛집 추천까지 되어 있냐.'

아무리 타락한 히어로가 정석 중의 정석이라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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