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89)

접대

접대는 나에게만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푹 퍼진 모습. 나름 얼굴을 굳힌다고 굳히는 중이

지만 귀여운 이미지의 남성이 팔짱을 끼고 달라붙자 헤벌쭉 입꼬리가 올라간다. 김세민이 저런 이미지였

나 싶었지만 굴라가 되며 인격이 조금 섞였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아 누나… 다음에 또 오는 거 맞죠?”

“그래, 뭐 보스께서 그렇다고 하시니까.”

반 년이라는 시간은 19살 모태솔로 고삐리가 지하 도시에 완벽히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연스

럽게 허리를 휘감고 허벅지를 매만지는 손. 슬쩍 이 쪽 눈치를 보길래 괜찮다고 텔레파시를 보내니 거침

이 없었다.

“아하하,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

“아 진짜… 딱 봐도 어수룩해 보이는데.”

이소정은 날카로운 눈매에 다크서클이 있는 미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 올리는 중. 권속이 된 굴라들

에게 성욕과 소유욕이 그닥 들지 않아서 그런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저렇게 헤벌쭉하게 늘어지는

걸 보니 진작 좀 놀게 놔둘 걸 그랬나?

내 여자라는 감각은 그닥 없었다. 애초에 뱀파이어와 굴라는 혈족의 관계. 혈족이란 단어는 피를 나눈 가

족이란 뜻이고 가족끼리 그런 짓 하는 거 아니라는 수 많은 유부남들의 가르침이 있었지. 반쯤 농담이지

만 반은 진담이었다. 굴라는 흡혈귀에게 있어 유용한 아이템이라는 취급이니까. 다른 남자랑 못 놀게 할

거면 굴라가 아니라 흡혈귀로 만들었지.

“그래서, 하고 싶은 부탁이 뭔데?”

“아, 정말 별 거 아닙니다. 이 자료를 봐 주시겠습니까?”

손에 쥐어진 태블릿과 거기에 띄워진 PPT. 지하 도시에 와서, 마약과 불법 총기 거래, 인신매매와 성매매

를 알선하는 범죄 조직의 보스가 PPT를 이용해서 발표를 하려 한다는 것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지만,

그 모습을 본 그녀는 그저 ‘이게 제일 편하더군요’ 라는 단어로 슬쩍 넘어갔다.

꽤나 좋은 카메라로 촬영했는지 선명한 사진에는 두 명의 남녀가 서류 가방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기 좋게

찍혀 있었다. 여자의 뒤통수가 보이는 사진, 남자의 뒤통수가 보이는 사진. 위에서 찍었는지 정수리가 보

이는 사진 등 다양한 각도.

“이 곳은 지하 도시, 어지간한 물건은 사고 팔아도 상관이 없죠. 딱 한 종류만 빼고.”

“뭔 데?”

시체를 훔쳐가 인육까지 파는 미친 새끼들이 판매를 금지한 물건이라, 순간적으로 다른 모드의 다양한

물건들이 떠올랐다. 사람 가죽으로 만들고 갓난아이의 피로 쓴 흑마법서, 성교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소

년 소녀 100명씩을 죽여 만든 혈옥 같은 물건.

“히어로의 물품이죠.”

“…아, 진짜 별거 아니네.”

하지만 뒤따른 설명은 흥미를 확 식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대단한 물건이 아니라 귀찮은 물건. 지하 도시

위의 공장에서 빼돌린 물건이라면 몰라도, 히어로 협회의 물건은 당연히 추적당한다. 빌런이 되어 히어

로와 싸우는 게 무서워서 지하로 숨은 겁쟁이들의 도시니까.

“네, 지하 도시는 말 그대로 겁쟁이들의 도시. 히어로와 정면 대결을 하고 싶지 않은 범죄자들이 모여 사

는 곳입니다. 그 때문에 이 도시의 지휘부들은 히어로에게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자주 던져주죠. 주로 물

건을 구매하려고 도시에 방문한 빌런의 정보 같은 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히어로랑은 싸우기 싫다… 이건가.”

“…도련님은 A급 히어로가 빌런과 싸우는 걸 목격하신 적 있습니까?”

갑작스레 진지해지는 그 말투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준 A급 전소희가 하급 구울들을 박살내는

건 봤지. 그녀의 할머니인 전희민이 공간을 조작하는 걸 겪어봤고, 이하린의 폭풍과 대련을 해 봤었다.

“대련까진 해 봤지만 빌런이랑 싸우는 건 못 봤어.”

“아마…. 어쩌면 그 장면을 보면, 저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저희는 히어로가 싫습니

다. 무서우니까요. 만나기도 싫고, 관계되기도 싫습니다. 그냥 이 아래에서 마약이나 빨고 술을 마시며 안

락하고 퇴폐적으로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런데?”

“사진 속 여성은 3개월 전 지하 도시에 기어들어온 녀석들입니다. 수완이 좋은 모양인지 과격파들을 끌

어 모아 히어로를 사냥할 준비를 하더군요. 녀석들이 히어로를 건드리면, 히어로 협회는 지하 도시를 방

관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제 영업에 큰 손해가 생기겠죠.”

“그래서, 부숴 달라?”

“네… 녀석들은 이제 와서 빌런이 되고 싶어하고, 그 무대로 지하 도시를 선택했습니다. 중앙의 관리자가

나서면 인명 피해가 너무 커져서 말이죠. 가스는 피아 구분이 안 되니까.”

톡 톡 톡. 테이블을 괜사리 두드린다. 욕망을 읽는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진 속 여성과

눈을 마주쳐 보았다. 육체 변화 능력인지 이빨이 뾰족뾰족. 육식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 같은데.

“…야, 읽었냐?”

“예, 읽었습니다.”

다시 옆 테이블로 고개를 돌린다. 술에 취한 척 남성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녀석들로부터 다시 텔레파

시가 전해져 온다. 접대 중인 남자들은 나름 조직의 이사와 같은 위치의 높으신 분들. 전달 사항에는 거짓

이 없음.

“그래, 좋네… 진짜 좋은 접대야.”

사진 속 여인은 유명한 빌런이 되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중2병이 도져 악당 놀이에 취한 게 아니었다. 가

족을 구하지 못한 히어로를 원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흔하다 못해 식상할 정도니까. 그래서 지하 도

시로 무대를 잡아 히어로 협회의 보급품을 대놓고 탈취했다. 지하 도시의 존재를 공개해 그들의 무능을

까발리기 위해.

김한나는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깔아 뭉개고, 나보다 잘난 사람의 발 밑을 기

며.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거대 조직의 보스들이 인정한 거래처. 딱 그 정도면

되었다. 히어로를 무찔러 무능함을 만 천하에 드러낸다, 같은 거대한 야망 따윈 없이.

지하 도시의 관리자는 아마… 도시를 유지하고 싶었을 거다. 어쩌면 독가스라는 능력 때문에 배척 받아

숨어 사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는 게 없어 추측밖에 못하지만, 제 손으로 전부 쓸어버리는 게 아닌, 피해

가 적도록 똑똑한 사람을 골라 일을 맡기는 상식은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늘아,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이하린 때문은 아니고… 그, 지하 도시 때문이야? 괜찮아, 그거 다 헛소문이라니까? 확실한 정보면 실명

을 드러내고 협회의 보호를 받았겠지. 더군다나 거기는 제보 게시판이 아니라 익명의 토론장이었어. 흔

한 음모론이야.”

커다란 가슴이 나를 껴안는다. 귀만 살짝 가리고 말던 그 금발 태닝녀의 가슴과 비교도 되지 않을 포근함.

가슴골에 얼굴을 들이대니 어리광이라 생각하는지 꼬옥 껴안아오는 그녀. 아마 얼굴을 박는 게 아니라

기대는 식이면 귀를 지나 뺨까지 오지 않을까.

“어휴… 정말 어떨 때는 의젓하더니, 이럴 때는 어리광만 부리고.”

가슴에 얼굴을 부비니 한숨을 푹 쉬는 그녀. 여성의 가슴에 성적인 의미가 그닥 없는 이 정조 역전 세계에

서는 가슴을 조물딱거려도 섹스 어필의 의미가 잘 담기질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큰 가슴은

좋은 것이었다.

“정말 루머일까요?”

“그럼. 나도 나름 B급 히어로에, 네가 봤던 그 노친네도 협회의 높으신 분이란 말이야. 나도 잘 모르는 귀

중한 정보를, 누가 익명 게시판에 예비 히어로도 볼 수 있는 보안 등급으로 유출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

리야.”

말캉한 거유는 최고의 보물이었다. 각선미나 피부, 골반을 보는 녀석도 많았지만 나는 그냥 거유가 좋았

다. 껴안으면 가슴에 문대지고, 어리광 부릴 때면 얼굴을 감싸오고. 일단 가슴이 크면 밤의 즐거움이 늘어

나니까.

“그래도… 너무 무서워요.”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를 너무 굴렸더니 반동으로 조금 멍청하게 변한 기분이 들었다. 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가상 현실 게임을 할 때 왠지 잘 맞는 NPC들을 만나면 몇 번이고 겪는 일이니까. NPC에 홀

려서 게임 플레이를 조진 플레이어가 나 하나뿐이겠는가?

“괜찮아, 너는 내가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탁이는 그 손길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안심시키려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진다. 강

해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나 같은 괴물을 품에 안고 지켜준다고 호언장담하는 그

연약하고 멍청한 모습에 가슴이 따듯하게 달아오른다. 그래도 어디 가서 맞고 살지 않으려면 A는 되야겠

지.

“침대에서도 지켜준다는 건 아니죠?”

“뭐, 뭐?”

슬쩍 포옹에서 벗어나고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춘다. 근접 전투를 생각한다면 신장을 한 180cm까지 늘리

는게 편하긴 한데, 남녀 역전 세계라 그런지 키가 크다는 모델 남자들도 대부분 170cm 언저리. 마법 쪽

에 집중을 하는게 낫겠지.

침대에 슬쩍 들어가 겉옷을 벗고 있으니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그녀가 따라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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