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89)

무서운 이야기

김한나에게 있어 오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날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이라고

말해야겠지. 안전벨트 대신 팔 다리에 수갑을 찬 상태로 목에 밧줄을 걸고 거꾸로 매달려서 타는 롤러코

스터. 안전하게 내릴지, 떨어져서 죽을지, 아니면 엄한데 박아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

“그래서, 상황 설명부터 좀 해줄래?”

오도독 소리와 함께 날카롭던 눈매가 내려간다. 완성되는 것은 곱상하고도 어여쁜 얼굴. 핏기가 부족해

건강미는 좀 없어 보이지만 병약 미소년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먹힐 것 같이 보호본능을 일깨우는 그

런 얼굴.

“왜 서있어. 앉아.”

하지만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며, 바닥을 어지럽힌 음식물을 손짓으로 지우고, 얼음 칼날과

빨간 액체 칼날을 만들고, 텔레파시로 자기 부하를 부르며, 자신의 B급 초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박살내

는 모습을 보면 그 것이 마치 맹수의 부드러운 털가죽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호랑이 가죽이 아무리 아름답고 탐난다 해서 살아 있는 호랑이를 만지작거릴 놈은 없다.

“앉으라고 하지 않냐!”

크게 소리치니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던 부하 둘이 같이 바닥에 자세를 잡는다. 소파에 편히 앉은 남자 고

등학생. 그 뒤에 서있는 여자 고등학생 둘.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은 세 명의 조폭 성인 여성. 누가 보면

드라마라도 찍는 줄 알겠지. 하지만 여기는 힘의 논리가 전부인 지하 도시.

“예, 편히 앉았습니다!”

자신의 밑에서 눈치만 키운 녀석들이 곱게 바닥에 정좌한다. 음식이 사라지고 상처가 사라지는 모습을

같이 봤는데 감히 저항할 리 있나? 대체 무슨 능력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모른다는 것은 공포를 뜻

하고 쫄리면 무릎을 꿇는 게 이 조직의 슬로건. 전투력이 아닌 머릿수와 자금력으로 세력을 키운 조직이

니까.

‘씨발, 요즘 너무 놀아서 그런지 감이 떨어졌네.’

꼴랑 셋이 대놓고 밀고 들어온 것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앳된 외모? 고작 세 명? 한 명은 어린 남자? 그딴

게 뭐가 중요한가. 10살 어린아이도 초능력만 각성하면 시민 수 천명을 죽일 수 있는데. 스스로의 나태함

을 탓하며 다시 눈 앞의 남성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설명 드리면 될까요?”

“음… 구라 치다 걸리면 사지 중 하나를 뽑아버린다고 협박하려 했는데, 안 해도 되겠네.”

“어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일단 제 소개부터 드리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사지를 뽑는다는 말에서 진심이 담긴 게 느껴진다. 협박이 아니라 정말로 뽑아버리려 하고, 심지어 그걸

원하는 게 느껴진다. 사람 사지를 뽑고 싶어 한다니, 어디의 사이코패스인가? 하지만 고개를 까닥이는 그

앳된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높으신 분의 품격이 보인다고 생각을 한다면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뻔한 것

에 대한 핑계일까? 어쩌면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예, 저희 조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키운 조직입니다. 힘으로 이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라 제 초능력

과 장사 실력으로 얻은 자리죠.”

머리, 정확히 말하자면 잔머리로 차지한 자리였다. 지하 도시는 애초에 법을 지키기는 싫은데 빌런이 되

어서 히어로와 싸울 용기는 없는 병신 머저리 같은 반쪼가리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다. 시체를 훔

쳐 정육점에서 팔고 능력 없는 고아들을 인신매매 하는 주제에 히어로랑 목숨 걸고 싸우는 건 못하는, 약

자에게만 강한 병신들의 도시.

공간 이동이나 투명화 등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밀수를 하니 총기부터 마약까지 없는 게 없는 도시는 이제

거대한 시장이 되었고, 그 시장에서 장사 수완이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나였다.

B급 초능력자, 독심술의 아종인 능력. 마음을 읽긴 읽는데 상대가 지금 원하는 것만 읽을 수 있는 애매한

능력. 정규 검사 없이 B급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A급 초능력자가 귀찮은 일 때려 치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신 방벽을 뚫고 읽었기 때문이다.

겁쟁이 양아치들이 모인 조직에 호신용 총기를 팔고, 가오가 몸을 지배하는 깡패 조직에게 마약을 팔고.

소속되지 않고 거리를 떠도는 남창들을 꼬셔 조직에 몸 담게 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한 발 빼려는 겁쟁이

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머릿수를 채웠다.

주변 조직으로선 침략하지 않는 거대한 백화점과 같은 우리 조직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되려 우리 조

직을 습격하려는 것은 편의 시설을 망가트리는 분탕 종자 취급을 하며 공공의 적이 되었지. 내가 원하는

것은 돈과 안전이지, 이 도시의 한 구역을 지배한다는 욕망 따위는 없으니까.

빌런의 자질을 가진 녀석들이라면 나를 죽이고 빼앗으려 들겠지만, 그런 호전적인 녀석들은 이 지하로

내려오지 않는다. 지금 눈 앞의 남학생을 제외하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 그럼… 내가 지금 원하는 게 뭘까?”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자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치는 모습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두근거릴 뻔했다.

파괴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활짝 미소 지으며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다가오는데 어떤 여자가 두근

거리지 않을까?

“…하, 학살? 1대 다수의 전쟁을 원하시는 군요.”

하지만 그 두근거리는 뜨거운 가슴은 드라이아이스라도 부어버린 것처럼 차게 식는다. 눈 앞의 자그마한

소년은 이미 사람을 죽인 경험이 수두룩하다. 심장 깊은 곳에서 나의 초능력이 속삭인다. 저 것의 본성은

괴물이라고. 아니, 괴물 따위랑 비교해선 안될 무언가라고.

“부, 불리한 상황에 홀로 고립되어… 상대방이 행하는 모든 전술과 전략을 깨부수고 적을 몰락시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적 앞에서 그가 이뤄낸 모든 걸 약탈…”

거기까지 말하자 현기증이 몰려온다. 어,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 지금 여기서 내 목을 비틀어버리고 조

직을 차지하면… 그 이후의 후폭풍 따위는 상관하지도 않겠지. 클럽이 무너지고 내 부하들이 상황 파악

도 못하고 죽어가는 걸 기쁘게 바라볼테니까.

“쫄지마, 너는 너무 약해서 죽일 마음도 안 들어.”

톡톡,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그 부드러운 손길이 마치 목 위에서 움직이는 단두대의 칼날 같아서 움직

일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인 점은 눈 앞의 무서운 소년의 욕망이 내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 내게 원하는 것

은 전투가 아닌 정보.

안전이 보장되고, 눈 앞의 괴물이 원하는 상품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

오던 속삭임이 바뀐다. 눈 앞의 괴물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면서, 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들. 내

초능력이 내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 그러면… 제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바닥에 머리를 박고 주절주절 설명을 한다. 꼬고 있던 다리가 풀리고, 턱을 괸 손이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

기 시작한다. 내려다보던 시선에 흥미가 차오른 것을 보고 나는 성공을 직감했다. 괴물이라도 결국 아름

다운 남자니까.

“올라와서 앉아.”

소파에 마주 앉자 그 멋진 소년의 외모가 눈에 확 들어온다. 하지만 바닥에 앉아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

는 부하처럼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눈 앞의 괴물이 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독심술은 생각을 읽는 것.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해도 지금 당장 원하는 것만 알 수 있는 이유가 그 것이

다. 기억이 아닌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읽으니까.

‘미친 괴물 새끼…’

눈 앞의 소년은 내가 조직원들을 이끌고 덤벼드는 것을 바라고 있다. 숨겨진 한 수로 자신을 죽이려 들기

를 원하고 있다. 마셨던 와인에 독이 들어 있기를, 지금 강화 유리로 가려진 방 밖에 병력이 모이고 있기

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죽이려 들기를.

그래서, 자신을 해치려 하는 모든 인원을 죽여버리는 것을.

눈 앞의 앳된 외모에 홀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정보량이 쏟아져 들어온다. 덤벼들어라, 죽이고 싶다.

단순한 살의로 점칠 된 욕망.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그 욕망의 내용이 아니다. 저런 담백한 살의는 마

약중독자의 정신과 비교하면 훨씬 깔끔하니까.

‘어디서… 대체 어디서 경험해 봤다는 거야.’

무서운 점은 딱 하나.

독살하려는 적을 중독시켜서 바닥을 뒹구는 걸 짓밟고 싶다는 욕망. 머릿 수로 찍어 누르려는 적의 부하

를 홀려 역으로 찍어 누르고 싶다는 욕망. 우물에 독을 풀고 환풍구에 가스를 터트려서 혼란에 빠진 적의

주거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싶다는 욕망.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적을 죽이고 잡아먹어서 강해지

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그것은 이미 겪어본 전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3차 세계대전? 초능력 해방 전쟁? 뭐지? 가장 최근의 전쟁은 60년이 넘게 흘렀는데. 저 앳된 얼굴 아래

에 있는 괴물은 대체 몇 살이지?’

[작품후기]

좋은 남녀 역전물 없나요? 아마하라 센세... 최신작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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