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89)

닥쳐오는 공포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오도독 소리와 함께 인상이 변한다. 뭐, 뼈 움직이는 소리야 클럽 음악에 묻혀 남

들에겐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 지하 도시 답게 벌써 만취해서 헤롱거리는 녀석들

이 잔뜩. 취한 여자는 가드들에게 붙잡혀 자그마한 계단으로 끌려 나가 퇴출당하고, 취한 남자는 먹이를

노리는 여성들의 가운데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춤이라기 보다 말라 비틀어지는 오징어의 꿈틀거림

으로 보이지만.

늘어진 눈매를 표독할 정도로 끌어 올린다.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물어지는 입술. 창백한 피부가 검은 의

상과 어우러진다. 말 그대로 흡혈귀의 상으로 변한 것이다. 기왕 클럽에 왔는데 순딩한 인상보다는 잘 노

는 인상이 어울리지 않을까? 데이터를 팔아 재끼며 커스터마이징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라서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얼굴은 완벽히 변화되었다.

“이야, 거기 오빠! 이리로 올래?”

껄렁거리는 여성이 테이블에 앉아 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지만, 금세 다가온 웨이터 여성이 귓속말로 속

닥거리니 곧바로 손을 내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운다. 입구에서 지폐 다발로 뱃살을 후드려

친 효과가 나오는 것일까.

클럽은 생각보다 뻔하게 생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 들이 뻔하지 않았지만. 과일 안주나 양주가 있어

야 할 테이블에는 대놓고 귀엽게 생긴 알약들이 있었다. 나이 먹고 클럽에 와서 여… 남자 꼬시는 애들이

안주로 키티 모양 딸기 사탕을 먹을 리 없으니 엑스터시겠지.

두꺼운 궐련을 말아 피우는 남성과 그걸 등 뒤에서 껴안고 온 몸을 주무르는 여성이 보인다. 물론 담배나

시가 따위는 아니었다. 마약 냄새를 알지는 못 하지만 코 끝을 따갑게 만들고 육체가 유독물질에 저항하

기 시작했으니 전부 마약이겠지.

향수, 알약, 사탕, 주사기, 담배, 술, 심지어 모둠 과일 안주에서도 다양한 냄새들이 올라와 몸이 저절로

반응하기 시작한다. 일곱 테이블을 지나며 느껴진 마약은 10종류 이상. 술 안주로 무슨 모둠 마약 세트를

판매라도 하는 것일까. 슬쩍 시선을 올려 테이블이 아닌 룸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느껴지는데.

“저어, 도련님? 잠시 뵙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는데.”

검은 유리를 노려보고 투시 마법을 쓸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니 정중하게 다가온 양복 여성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입구에 있던 뚱뚱이가 뒤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좀 윗사람인 모양. 슬쩍 클럽을 다

시 한 번 둘러보았다.

1층의 스테이지에서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헐벗은 남녀가 몸을 문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마약과

음악에 취한 것인지 벌써부터 서로의 성기를 어루만지는 남녀가 자주 보였다. 내가 서 있는 2층은 스테이

지를 둘러싼 모양으로 테이블이 잔뜩. 물론 테이블에 앉은 녀석들은 아래의 춤판을 보지 않고 서로를 물

고 빨고 있었다.

위층에 있는 건 검은색 유리 박스. 매직 미러 같은 재질로 만든 밀실이겠지. 아마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을까? 아무리 지하도시의 VIP라도 변태도 아니고 클럽에 와서 이상한 유리 컨테이너박스 안에 감금당

하는 취미는 없을 테니까.

“그래, 안내해.”

주변을 보니 양복을 입은 녀석들이 오고 가며 이 쪽을 바라보는게 보인다. 클럽에 온 김에 여자 하나 꼬셔

볼까 했는데 벌써 걸린 건가? 얌전히 따라가니 그제서야 주변을 서성이던 양복녀들이 사방 팔방으로 흩

어져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슬그머니 따라오려는 두 명을 제지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앉으시죠?”

여우 같은 여자. 얼굴을 보자 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샐쭉하게 찢어진 가느다란 눈매부터 시작해서 얼

굴이 정말 여우를 닮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미녀인데 얼굴 상 때문인지 호감이 생기지 않는 녀석. 클럽과

어울리지도 않게 스테이크와 와인이 잘 차려진 테이블 너머에서 양복을 입은 여성이 나를 맞이한다.

“귀한 분이 오셨네.”

“내가 누군지는 알고?”

털석 소리가 날 정도로 맞은편에 주저 앉아 그대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이빨에 닿자 저항감 없

이 바스러지는 부드러운 육질. 입안을 가득 채우는 육즙이 살짝 흘러 입술을 촉촉히 적신다. 혀로 입술을

핥자 녀석이 동요하는 게 보인다. 마약은 아니고, 그냥 다짜고짜 먹어서 당황하는 건가?

‘대놓고 수상하네.’

여기는 지하 도시 최대 규모의 클럽이다. 클럽 자체가 비싼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는게 크다. 대놓고

처먹는 마약도 그렇고, 스테이지에서 몸 비비는 남자들 대부분은 남창이다. 어찌 보면 거대한 백화점이

라고 볼 수 있다. 1층은 성매매 알선소, 2층은 마약과 장물 거래소. 아마도 3층은 조직들의 보스가 모이는

회의 장소, 대충 그런 느낌이겠지.

“뭐 때문에 불렀지?”

“하하, 여자라면 잘생긴 얼굴을 좀 보고 싶은 게 당연하죠.”

낭창하게 휘어지는 가느다란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검은 눈동자에 가슴이 두

근거리는게 느껴진다. 반했다, 같은 달짝지근한 감정은 아니다. 얇게 뜬 눈 사이로 이리 저리 움직이는 눈

동자는 마치 나를 가늠하듯 흝어본다.

‘그치, 시바… 이게 정상이지.’

수백명이 춤을 출 정도로 커다란 클럽을 운영하는 거대 조직의 보스. 성욕 때문에 뒷골목에서 여학생을

덮치는 노숙자, 혹은 빌런이 되어 히어로와 대적할 능력도 없이 지하 도시로 기어들어온 잡것들. 그딴 허

접한 조무래기들과 전혀 다른 위압감.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마시며 중간중간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은 다른 모드에서의 귀족, 아니 왕족과

도 비슷할 정도로 예의 있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과장되게 말하는데 거슬리지 않고, 먹으면서 소리를

치는데 음식물 찌꺼기 때문에 불쾌할 일 또한 없었으니까.

‘뭐지? 이 새끼도 신체 강화인가? 아니면 그냥 무술을 극한으로?’

코 끝에 와 닿는 냄새는 애매한 C급 상위권, 혹은 B급 하위권이라고 말하지만, 보이는 행동은 그렇게 호

락호락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하긴 초능력 등급이 낮아도 강할 수 있긴 하지. 이 게임에서 레벨이나 등급

만 믿다가 통수를 맞는 초보자가 몇 명인데.

“금괴를 들고 뛰어다니던 녀석이 그러더군요, 이건 저주 받은 금괴라고! 과학으로 만들어낸 지하 도시에

서, 첨단 과학으로 공기부터 지낼 곳 까지 전부 해결하면서 저주를 논하다니, 우습지 않나요?”

“저주라, 어쩌면 정말 있을지도 모르죠.”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지난 날의 소동으로 옮겨갔다.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맛깔나

게 떠드는데다, 스프부터 스테이크까지 요리의 수준이 높아 생각보다 깊게 빠져들 뻔 했다. 요즘 집에서

카카오 닙스나 클로렐라 같은 건강 식품 때문에 입이 기름진 것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윗집 여자를 최

면으로 홀려놓고 치킨을 시켜 먹긴 하지만, 아침 저녁을 건강 식품으로 도배하는 건 못 버티겠어.

“하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역시 미인과의 대화는 즐거운 법이죠.”

“아부가 능숙하시네요.”

입가심으로 나온 이름 모를 술을 한 잔 마시니 즐거운 대화였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모습에 흥이

돋았다. 탐색전만 죽자고 한 다음 그냥 가버리려 하다니, 애태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 플레이 스타일상

이렇게 적의 보스가 5m안으로 기어들어 왔는데 손 한번 섞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럼, 아부 말고 다른 것도 능숙한지 보고 싶은데…”

목소리에 마력을 담는다. 샐쭉하게 휘어졌던 여우같은 눈이 나를 향한다. 새까만, 새까만 눈동자.

“그건, 또, 무… 슨!”

떨리는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지는 순간 테이블을 두드려 나이프를 쏘아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

을 뒹구는 접시와 식기. 깨진 와인병에서 흘러나오는 달큰한 향기가 나를 취하게 만든다. 던져진 은식기

는 페이크, 진짜는 오른 손목 아래에 몰래 만든 얼음 단검, 에스토크.

눈에 마력을 집중하고 전신에 힘을 준다. 그녀가 바닥을 뒹굴었지만 이 쪽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권총? 나이프? 가스탄? 아니면 초능력? 뭘로 반격하려는 거지?

한 걸음, 왼 발을 강하게 내딛어 테이블을 밟아 으스러트리고 전진했다. 마치 잽을 뻗듯이 송곳처럼 뾰족

하고 가느다란 칼날을 그대로 찔러 넣는다. 카앙, 손바닥에 미세한 반탄력을 주며 깨져 나가는 얼음 칼날.

양복을 찢지도 못한 걸 봐선 돈 꽤나 쓴 물건 같은데.

그대로 오른 손을 뒤로 땡기며 왼발을 축 삼는다. 휘둘러지는 오른발 위에 얼음이 아닌 피의 칼날을 생성

한다. 목을 향해 날아가는 칼날이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간다. 그대로 한 바퀴 더 구른건가.

고작해야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왼발을 딛으며 오른 손을 찔러 넣고, 그걸 회수하며 날아가는 오른발 돌

려차기를 피해 다시 한 번 바닥을 뒹굴어 피했네?

“잘 피하네!”

역시, 상급 흡혈귀가 전력을 다해 걷어차는 걸 고작 바닥을 뒹굴어서 피하다니. 폼은 나지 않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

“항복! 무조건 항복!”

… 뭐?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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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에 올 인 했더니 교양이 개박살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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