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89)

닥쳐오는 공포

아침 햇빛을 견디고 일어나 식사를 준비한다. 통판으로 대량 구매한 빌어먹을 렌틸콩과 건강식품을 어떻

게든 맛있게 만들어 요리를 하고 등교. 오전 내내 이하린에게 시달리다 점심 시간 소희를 달래 주고. 오후

내내 이하린에게 시달리다 소희를 달래 주며 먼저 하교하고. 그러다 건강 식품이 물려서 스트레스를 받

으면 윗집 힐러에게 가서 군것질을 잔뜩 하고.

1학기 초, 선배 두 명의 턱주가리를 부숴버린 사건은 이미 2학기에 넘어와서 이하린 때문에 묻혀버린 소

문이 되었다. ‘이제 선배 턱주가리 부순 걔’ 라는 수식어보다, ‘그 이하린이 달라붙어 있는 남자애’ 라는

수식어가 더 자주 들려오니까.

연예인을 얼굴로 꼬신 걔, 몸으로 히어로 선배를 타락시킨 걔, 아무튼 걔 걔 걔…

일상은 나쁘지 않았다. 점점 다정하게 변하는 소희와의 연애도 재미있고, 적당히 B급에서 멈춘 강정태와

김민혁의 능력을 연구하는 것 또한 새로운 모드 같아서 즐거웠으니까. 상급 흡혈귀에 도달한 내 육체는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변해서 이하린이랑 붙어먹었다고 욕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되려 이하린에게 나잇값

못한다는 뒷담화가 학생들 사이에서 슬쩍 도는 것도 유쾌했다.

그래, 일상이 즐거운 건 좋은데…

“진짜? 진짜 아무 일도 없다고? 너희가 뭔가 놓친 게 아니라 아예 없어?”

“네, 그냥 없는데요.”

“뒷배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전부 쑤셔서 얻은 결과라니까요?”

“뭐지 씨바…”

너무 고요했다. 지하 도시에서 몬스터 병사를 떼 몰살시키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우리 세 명이 진화할

수 있을 양의 물건을 훔치고 저주받은 재물들을 뿌려서 도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 추적이나 보복에

대한 걱정은커녕 딱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주인님이 바깥 구역에만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는데, 저희는 요즘 지하도시에서 생활하잖아요?

거긴 그냥 그런 곳이어서 저희가 벌인 사건은 사고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은데요. 복수는커녕 그냥 추격전

이 재미있었던 사건 정도로 생각하던데.”

쪼옥, 입안을 간지럽히던 차가운 콜라가 목 너머로 쏟아져 내리지만 어째 속이 시원해지질 않는다. 그 안

에 있던 재화들은 이런 배경에서 꽤 돈이 될 텐데. 미술품이나 금괴 같은 재물만 봐도 몇 억은 가볍게 넘는

다. 숨겨둔 금고에서 몇 십억이 넘는 재물을 털렸는데도 그냥 넘긴다고? 상상할 수 있던 반응은 아니었

다.

‘몇 십억이 뭐야, 오우거 같은 것만 생각해도 백억을 넘길 수 있을 텐데.’

초능력자 모드에서 판타지의 마법을 사용하는데 드는 비용이 판타지 모드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비용과

같을 리 없지 않나? 애초에 배경이 과학 기술만 발달한 현대 히어로 모드인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감

자튀김을 먹고 있으니 옆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쟤가 그…”

“잘 생기긴 했네. 와… 여자들도 예쁘장한 게 얼굴값 하는 건가.”

학생들의 시선이 이 쪽으로 몰린다. 같은 영웅 학교 학생이 아니라 옆 여고 학생들의 시선까지. 하기야 상

급 흡혈귀가 되며 곱상하게 변한 나, 그리고 모시는 흡혈귀의 격이 올라 덤으로 혜택을 받은 두 명의 굴

라. 테이블에 앉은 세 남녀가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예쁘고 멋지게 생겼으니 학생들의 시선이 안 모일리

없다. 습관처럼 손에 묻은 소금을 쪽 빨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전부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쪽쪽 빨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피 한방울을 뽑아내 슬그머니 방음막을 만든다. 시선이 이렇게 쏠렸는

데 지하 도시나 조직 폭력배 이야기를 하면 귀찮아지니까. 더군다나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있는데.

“그래서… 진짜 아무것도 없어?”

“예… 그 금괴 들고 저주 걸렸다가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조사했는데, 그냥 대박 날 뻔했다가 놓친 아쉬운

사건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마 지하 도시 중심부에서 양복입은 여자들이 나와

서 금괴나 미술품을 회수했고, 얌전히 반납한 놈들은 그냥 풀어줬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녀석들은 가스

를 마시고 죽었었지.

‘돌려준다고 해도 잠깐 멈칫했으면 바로 죽였어. 그냥 잔인한 건가, 아니면 저주를 아는 녀석인가?’

나름 지하 도시를 관리하는 녀석인데 무능력하진 않을 거고, 저주의 존재를 알아서 조금이라도 망설인

사람은 감염되었다 판단하고 죽인 건가? 만약 그 지하 도시의 수뇌부가 창고의 주인이라면 대충 이해가

된다. 그 커다란 지하 도시를 통째로 지배하는데 고작 몇 십 평짜리 창고 하나 털린 일에 크게 신경 쓰진

않겠지.

그렇기에 이렇게 평화롭다. 입 안을 짭조름하게 만드는 감자튀김을 몇 개씩 집어 들고 와작 와작 씹는다.

평화, 평화, 평화라… 정말…

“아, 씨발 꼽다.”

“예?”

“아니, 그렇잖아. 불지르고 지랄하고 테러하고 독가스까지 난리가 났는데 별 거 아니 여서 무시를 당했다

는 거 아니냐?”

평소와는 다른 내 말투에 두 명이 당황하는 게 느껴진다.

“그… 말하자면 그렇죠?”

그래, 나는 지금 몹시 심기가 뒤틀려 있었다.

소희와 보내는 알콩달콩함이 좋았다. 이하린에게 빨아먹은 에너지를 소희에게 넘겨주며 세 명이 같이 성

장해 나가는 것도 순조로웠다. 슬슬 가을 여행을 가자고 꼬셔서 강정태와 김민혁을 또 재우고 재능을 훔

칠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근데 그건 그거고.

“씨이바… 조직 몸집을 아직 안 불렸지?”

“네, 아직 그대로 50명 선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이 올라왔다. 이 짜증의 근간은 부끄러움이다. 휴가용 플레이니, 알콩달콩이

니, 순애물이다 뭐다 지껄였어도 본질은 PVP 육식계열 유저다. 대회에서 1위 먹고 게이머로서의 자부심

으로 장사하던 내가, 고작 NPC 창고 하나 털고 쫄아서 움츠렸는데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다.

“연장 챙겨. 오늘 200선으로 늘린다.”

나는 별 거 아니었다.

“지난번 창고에서 챙겼던 그 파란 돌들도 전부 다 챙기고.”

나는 무시당했다. 더워서 짜증이 좀 나는데 근처에선 나를 손가락질하며 속닥거린다. 어금니에 힘을 주

니 와자작 소리가 들린다. 이게 얼음 깨지는 소리인지 어금니 갈리는 소리인지 모르겠네. 마음 같아서는

이 가게를 통째로 터트렸지만 그 순간 바로 현상수배범이 되어서 평온함과 작별하니까.

스마트폰을 사용해 대충 소희에게 외박한다는 문자를 보내 놨다.

“근처에 놀 만한 곳, 있던가.”

역시 게임에는 전투가 필요했다.

해가 채 지기 전의 지하 도시는 활발하다. 길거리에서 상인이 물 건너온 권총을 츄라이 츄라이 외치고 있

었고, 신나는 EDM비트가 쿵쿵거리는 클럽에 헐벗은 남자가 엉밑살을 자랑하며 반바지인지 사각팬티인

지 모를 것을 입고 샐룩거리며 입장하고 있었다. 클럽 앞에 총포상이 있다니, 미국이 이런 느낌일까?

“거기 오빠야~ 우리랑 놀래?”

“그래, 그런 새끼들 말고 우리랑 놀자.”

얌전히 지내라니까 정말 얌전히 지냈는지, 클럽 근처의 양아치인지 가드인지 모를 여자들이 떡대를 자랑

하며 나를 꼬신다. 그 모습에 인상을 일그러트린 이소정이 앞으로 나섰지만 내가 가슴을 툭 건드리며 막

았다.

“에헤이, 아직 아니다?”

“이야, 어려 보이는데 강단 있다. 그랴, 일행 놓고 이리로 와. 꽁짜로 입장하게 해 줄게.”

어리둥절한 표정의 둘을 놔 두고 앞으로 걸어간다. 두껍게 살찐 손아귀가 슬금슬금 등허리를 건드리고

엉덩이로 향한다. 나도 양 팔을 뻗어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 어깨동무를 하고 가슴을 만져본다. 축 늘어진

큰 가슴은 거유보단 뱃살이 세 개 늘어진 것처럼 보여 기분이 나빴다.

“아하하, 직원으로 취직하러 온-“

짝 소리가 날 정도로 그 녀석의 뱃살을 지폐 다발로 후려친다. 한 묶음에 오 백만원, 경제가 맛탱이가 간

지하 도시에서도 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두툼한 손이 허공을 잠시 휘젓다 그대로 지폐 뭉

치를 만지작거린다.

“내가 들어가서 좀 마음 편하게 놀고 싶은데… 좀 시끄럽네?”

“어휴, 죄송합니다! 제가 눈에도 살이 쪄 가지고.”

손 끝에서 옅은 빛이 나는게 보였다. 일반인이라면 낮에 볼 수 없을 수준의 미약한 불빛. 초능력은 아니고

손가락 끝에 무슨 기계를 달아 놨나? 곧바로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모습을 보니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그… 도, 도련님?”

주인님 대신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는지 뒤에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번쩍거리는 형광색 불빛들. 담배 냄새는 나지 않는다

는 게 신기하긴 하네.

솔직히 욱하는 심정에 여기까지 왔지만 정조역전세계의 클럽이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일단 여기가 근처

에서 가장 커다란 클럽이기도 하고, 현실에선 클럽에 다녀본 적 없으니까. 아이돌이 클럽에 가는 것도 애

매하고, 그 전에는 황제나 무림인이여서 이런 곳에 온 적이 없지.

“대체 뭘 하시려고…”

“몰라, 니들끼리 가서 춤이나 춰. 나중에 부를 테니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둘을 놔 두고 나는 그대로 인파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작품후기]

죄송합니다 못난 작가입니다.

시험이 2주 땡겨졌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데 한달 뒤라고 생각한 기말고사가 2주 뒤라는 예술적인 상황이 닥쳐서 글을

못 쓰고 있습니다. 아니지, 이걸 올리는 지금을 기준으로 삼으면 전공 기말 고사까지 6일 남았네요. 홈페

이지에 공지를 올렸으면 문자를 보내줘야 하는게 아닌가.

끼에에엑, 다다음주부터 방학이니 그 때부터 연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학점과는 작별인사

를 올리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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