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89)

닥쳐오는 공포

난잡하게 바닥과 기둥을 부숴버리던 폭풍만이 맴돌던 대련실 안에서 때 아닌 열풍이 불어온다. 흰자만

보이게 눈을 뒤집고 울부짖으며 바람의 칼날을 휘두르던 여장부는 온데간데없고 여린 손짓으로 내 머리

만 붙잡고 애원하는 가냘픈 여인만 남아 있었다.

“뭐, 뭐…! 뭐 하는 짓이약?!”

이하린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올라간다. 그야 그렇겠지. 자유 대련이랍시고 민간인이라면 시체 파편도

남지 않을 공격을 주고받던 중, 갑작스럽게 바지를 벗기고 입으로 애무를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달아오

른 몸은 그녀가 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딱히 할 말이 없어 혀 끝에 정신을 집중한다. 고작해야 커닐링구스를 하는데 무슨 집중을 해야 하나 싶었

지만…

‘아 이거 좆된 거 같은데.’

혀 끝으로 짭쪼름한 살결의 맛이 느껴진다. 코 끝을 간질이는 얇은 음모와 코를 타고 넘어와 머릿 속을 가

득 채우는 발정난 여성의 냄새. 합금으로 만들어진 대련실을 박살내던 광풍은 온데간데없고 애원하듯 머

리카락과 옷자락을 팔락거리는 애처로운 미풍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나의 몸으로 넘어오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에너지. 그녀가 제어력에 비해 파괴력

만 월등히 높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강정태와 김민혁 때와 달리 필터로 삼을 중간 다리가 없어서 그런 걸

지도.

‘다짜고짜 박았으면 몸이 터져서 죽었겠는데.’

본격적인 성교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입만 살짝 닿았을 뿐인데. 어색하게 오므려진 탄탄한 허벅지

가 뺨에 닿아 오고, 혀 끝으로 움찔거리는 그녀의 속살을 두 세번 핥았을 뿐이다. 고작 전희도 되지 못할

두 세번의 움직임만에 감당 못할 수준의 에너지가 몰려온다.

“너, 갑자기, 이게 무슨?!”

당황해서 버둥거리는 그녀와 달리, 이제 휘몰아치던 바람은 나와 그녀를 붙잡아 안정적이게 허공에 띄우

기 시작했다. 제어할 수 없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그녀의 이성은 진짜 좆 되기 전에 이 자리를 박차고 나

가기를 원하지만, 그녀의 본성은 쌔끈한 남고딩과 떡을 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바람은 그녀의 본성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뭐야 이건!”

대련실 외곽을 따라 돌던 바람이 좀 더 강하게 휘몰아친다. 뜯겨 나간 강철 잔해들을 들어 올릴 정도로.

강철의 잔해가 둥지처럼 우리를 둘러 싼다. 우그러진 철골이 대련실 문을 잠궈버린다. 표현 그대로의 밀

실. 원래대로라면 정말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제어를 못해도 너무 못하는데?’

잔잔한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게 아니라, 폭풍 속에서 표류하는 돛단배 위에서 항아리를 들고 있는 기

분이 든다. 자기 능력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니 우리 주변을 감싸는 잔해를 보고 어리둥절 하고 있겠지.

“뭐, 뭐라도 말 좀 해봐! 무슨 상황이야 이게!”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하긴, 나라도 대련 중인 여학생이 갑자기 바지를 벗기고 펠

라치오를 시작하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긴 할 거다. 그 와중에 자기 능력이 완벽하게 제어를 벗어난다면

더욱 더.

혀 끝과 얼굴에 뜨거운 여성의 살결이 느껴진다. 울컥 울컥 쏟아져 내리는 끈적한 애액. 혀 끝을 뾰족하게

세워 꽉 다물린 살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고작해야 몇 번 핥다 혀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등허리를

활처럼 휘며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인다.

“…뭐야, 벌써 간 거야?”

와장창 소리를 내며 잔해가 쏟아져 내린다. 고작해야 철근과 철판에 깔린다고 다칠 육체들이 아닌지라

몸으로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잔해 사이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며 기절해 있는 여성. 대체 이

기분을 뭘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씨발… 간 좀 보려 했더니 폭주를 하지 않나, 3분도 되지 않아서 오르가즘으로 기절하질 않나. A급 부터

는 무슨 대마인 마냥 쾌락 몇 백 배 이런 기능이라도 있나.”

그녀의 가슴께로 손을 뻗어 와이셔츠를 벗겨냈다. 보기 좋게 부풀어오른 가슴과 그걸 감싼 새카만 브래

지어. 그 아래로 잘록하게 뻗어진 허리가 보이지만 그다지 음심이 동하지는 않았다. 새총 맞은 비둘기의

심정이 이랬을까, 갑작스럽게 차에 치인 기분이었다.

“아오… 가서 체육복이나 한 벌 훔쳐야 하나.”

“아, 씨발, 씨발, 씨바아알…”

이하린이란 여성이 얼마나 미친년인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집착이 심한 지 알았더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거기서 목을 꺾어버리던, 피를 전부 빨아서 혈액팩에 담아 두던 했을 텐데. 평소에 TV를 보지 않은 죗값

을 이렇게 치루는 건가? 고개를 처박고 욕설을 중얼거려도 매정한 현실은 바뀌질 않는다.

“이하늘, 앞으로 나오렴!”

A급 히어로니까. 공직자니까. 연예계 인생 7년째의 대 스타니까. 지금 드라마를 찍고 있으니까. 지금 영

화관에 이 여자가 찍은 영화가 상영중이니까. 그걸 광고하려고 지난 주 예능도 찍었으니까. 인터넷을 뒤

지고 뒤져 그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순간이다.

“자, 모의 대련을 할까!”

이하린, 이 인간이 가지고 있던 집념은 그 어떠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한다는 것을 몰랐던 나의 실

책. 유리창 너머에서 불편한 시선을 던지고 사라지는 소희가 보인다. 하지만 그것 보다 지금 내 앞에 잇는

이 미친년을 어찌 상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인터넷 뉴스에는 영웅 학교 남고생과 이하린간의 섹스 스캔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웹 사이트에

는 온갖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고, 이하린의 팬클럽에 가입한 남학생들은 나를 창남이니 뭐니 욕하기 바

빴다.

왜?

갑자기 연예계 은퇴를 하고 영웅 고교 교사로 와서 나만 붙잡고 늘어지니까!

벌집처럼 각자의 대련실에 들어가 2인 1조로 대련을 하던 공간에 오직 나와 그녀만이 서 있었다. 나머지

는 저 멀리서 관객이 되어 구경 중. 다시 한 번 대련실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바닥과 기둥이 뜯겨 나가며 나

를 공격해온다. 지난 번 보다 훨씬 광폭하고 매끄럽게.

‘이 씨발, 죽 쒀서 개 줬네!’

흡혈귀의 능력은 에너지를 빼앗는 것. 색공 같은 것처럼 상대방의 능력을 올려주는 기능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이 오히려 이하린에게 이익이 되었다. 제어력이 부족해 힘에 휘둘리던 그녀였으니까. 내게

힘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그녀는 점점 더 섬세하게 자신의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씨이발… 먹다 배 터져 뒤지겠네 진짜.’

대련 중 먼지와 잔해로 모두의 시선이 가려질 때 마다 그녀의 팔뚝이나 손등을 물어 뜯는다. 그녀는 그 것

을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슬그머니 허용한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짝지근하다 못해 머리가 얼얼한 단

맛.

질투를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대련이 끝난 쉬는 시간마다 소희와 섹스를 하며 에너지를 넘겨주지 않았더

라면 나는 진작에 터져 죽었을 거다. 진짜 모기도 아니고, 피를 빨다 에너지가 넘쳐서 죽다니, 게임을 처

음 하는 초보자도 그런 쪽팔린 죽음은 겪지 않을 것이다.

“…즈기요 선생님, 미쳤어요?”

“이거, 대련할 때만 되는 거야? 따로 만나서는 못 해주니?”

“와, A급 히어로가 지금 남고생한테 원조교제 거는 겁니까?”

이런 미친년은 처음이라 상대하는 법을 잘 모르겠다. 자신이 소속된 기획사에 막대한 위약금을 내고, 다

시 영웅 학교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영화와 예능과 드라마에 출연하여 받기로 한 금액을 전부 포기하

고 고삐리와의 추문이나 마약 거래 같은 추잡한 썰이 돌며 히어로의 자질을 의심받아도.

“그걸로 S급 히어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생긋 웃으며 팔뚝을 내민다.

“필요 없어요. 지금만 해도 감당이 안 되는데.”

내게 이익이 되니까 참고 견딜 수 밖에. 상급에 가까웠던 흡혈귀의 육체는 완벽히 상급에 올라섰고, 소희

도 뭔가 간질간질 하게 능력의 변화를 얻어가고 있었다. 요즘 대련이 끝나면 거칠게 덮쳐오는 데 묘한 표

정을 보면 뭔가 NTR에 눈을 뜨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뭐, 더 필요하면 말해. 흡혈귀가 되는 특성이라면서?”

“그건 또 어디서 알아낸 건지.”

흡혈을 하면 육체가 강해지는 특성, 이라고 등록을 해 놨지만. 실제로 나는 흡혈귀가 되는 특성이라고 마

법을 은근 슬쩍 써 왔다. 물론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소희 앞에서만. 그런데 저 미친년은 이걸 어떻게 알

게 된 걸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 하늘아… 왔어? 오늘도 고생 많았어.”

빌어먹을 대련과, 잔해를 치우는 노동을 하고 나서 집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소희가 밥을 차리고 있었

다. 초능력자 이전에 남자고 자신의 애인으로 생각하는 그녀로선 늘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는 내가

안쓰러운지 하교한 나를 껴안고 토닥여준다.

“저기… 찌개 타는 것 같은데.”

“응? 아냐, 불 꺼놨어.”

주방에서 불길하게 끓어오르는 김치찌개 비슷한 것을 놔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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