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89)

A급 히어로

대련은 평범했다. 산을 가르고 지진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 일격으로 군단을 지우는 괴물 상대로도 이

리 저리 도망쳐 다니며 저항했던 게 나다. C급과 B급의 격차만큼, A급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간만 보는 식이었는데.

“더 할 수 있지? 제발!”

콰아앙! 귓가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의 칼날이라 불러야 할 지, 바람의 폭탄이라 불러야 할 지

모르는 것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대련실 내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도 이하린도 걸치고 있던 옷은

이미 누더기가 된지 오래.

‘대체 이 꼬라지를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냐.’

집에서 기다릴 소희는 둘째 치고, 지금 밖에 내 장바구니를 든 막내 스태프부터 문제였다. 음란한 스캔은

나지 않겠지만 반대로 폭력이나 살인에 대한 스캔이 날 기세. 내가 아니라 강정태 같은 다른 B급 능력자

가 있었다면 5분 내로 다진 고기가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가 아니라 진짜 죽었다.

“아오 씨, 진짜 미쳤나?!”

등 뒤에서 터져 나가는 공기를 추진력 삼아 앞으로 도약해 주먹을 날린다. 건물 기둥도 부숴버릴 괴력이

담긴 기둥은 허공을 두드리고 기묘하게 휘어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뻗은 주먹을 회수하기도 전에 발 밑

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력에 그대로 바닥을 뒹굴어 도망친다. 그 와중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미쳤냐는 외침은 욕설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질문이었다.

펑 소리와 함께 폭발하는 바닥. 그녀는 명백하게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풍과

도 같이 몰아치는 바람의 틈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던 단 한 방울의 피는 그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

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강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C도 되지 않는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올라오는 어중이

떠중이와 달랐고, 어느 날 갑자기 B급으로 각성한 전소희와도 달랐다.

그저 날 때부터 A급.

그녀는 A급 초능력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A급 초능력자일 것이다. 일종의 고정형 NPC다.

내게 있어서 그녀는 성장이 없는 대신 성능이 준수한 초반용 NPC였고 다른 생각 따위는 하지 않지만 인

간과 동등한 지능을 지닌 그녀는 그것을 늘 고민했다.

25년간 발전도 퇴화도 없는 능력.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막대한 폭력. A급의 육체가 뒤틀리고 변형될 때

까지 노력하고 노력했음에도 변함이 없는 그 모든 것. 그런 자신에게 쏟아지는 선망의 눈길.

날 때부터 A급이라는 막대한 능력은 그녀가 S급 초능력자가 되어 한국을 수호한다는 헛된 꿈을 심어주

기에 충분했고, 25년간 변하지 않는 능력과 제어력은 그녀의 정신을 마모시키기 충분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A급인데 배부른 소리라고 일축하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날 때부터 A급이다. 날 때부터 바람을 다룬 것이다. 신생아 시절 응애 응애 하며 휘두른 바람과, 지금 대

한민국의 A급 히어로의 입장이 되어 악독한 빌런에게 휘두른 바람과, 후배에게 지도 대련을 해 주며 휘두

른 바람이 똑같다는 소리다. 바람과 함께 태어난 그녀에게 있어서 초능력은 신체의 일부였다.

왼 팔 하나가 신생아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그녀의 피를 마셨다. 한 방울 밖에 되지 않는 미세한 양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요

동치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 제어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 해도 기본은 A급의 초능력자니까.

“더! 뭔가 해봐! 네 능력을 보여줘!”

평생 변화가 없던 능력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화일지 퇴화일지 몰라도 그녀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예인으로, A급 히어로로 대중들에게 추앙받을수록 더욱. 그 결과가 이 꼴이다.

“아오, 씨발 미친년이!”

캐릭터 메이킹이고 지랄이고 간에 죽게 생겼다. 능력의 제어도 익숙치 않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능력이

지만 위력은 A급. 아니, 오히려 제어력도 부족한 주제에 A급에 올라설 정도니까 위력만 떼어 놓고 보면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던 흡혈을 해야 하는데…’

심지어 한 방울 겨우 마신 것도 유효타를 먹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제어하지 못한 능력 때문에 파편에 뺨

이 살짝 베인 것이었다. 미친 척하고 마법을 쓰자니 후환이 두렵고. 이대로 대련실 문을 열고 도망칠 수

있긴 하지만 그건 너무 아쉬웠다.

예능 방송만 4개를 찍고, 한 달 내내 스케줄로 가득한 연예인을 또 어느새 만나? A급 히어로 이전에 연예

인 활동을 하는 그녀는 학생 지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지역도 마구잡이로 돌아다니겠지.

그래서 벗었다.

“뭐, 뭣?!”

너덜너덜한 상의를 확 찢어버렸다. 그러자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실내의 바람이 이상하게 요동치기 시작

했다. 씨발, 능력의 부족으로 몸을 미끼로 삼는 건 한 두번 이 아니지만 할 때마다 기분이 좆같아.

“자, 잠깐! 뭐 하는 거야! 진지하게 하라고!”

연예인이자 히어로가 되어서, 밀폐된 공간에서 알몸에 상처를 가득 입은 남고생과 단 둘이 있다는 게 무

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그저 덤벼들었다. 무시당한다고 느꼈는지 손아귀에 실체화된 바람

의 칼날을 쥐고서.

‘저거 때문에 손바닥이 저 모양이었구나.’

그나마 가리고 있던 셔츠가 사라지자 허공에 땀방울이 뿌려진다. 나의 핏방울과 매혹의 마력을 가득 담

고서. 직접적인 흡혈도 없이 향기만으로 거는 매혹은 매우 약하다. 고작해야 일반인, 혹은 C급 중에서도

밑바닥만 건드릴 수 있을 정도.

“너, 너어…!”

이리 저리 뒹굴고 온 몸에 생채기가 나서 땀인지 핏물인지 모를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나와 다르게, 그녀

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부서진 벽 파편에 스친 뺨과, 이리 저리 휘두르느라 너덜너덜해진 소매자

락 빼고. 그런 괴물 같았던 그녀의 호흡이 점차 빠르게 변해간다.

“이게 뭐, 뭔데…”

바람이 요동친다. 울부짖으며 마구잡이로 날뛰던 바람에서 맥없이 고꾸라지는 바람으로. 허공을 날아다

니며 톱날처럼 내벽을 긁던 잔해들이 바닥으로 내려 앉아 대련실 저 먼 구석으로 굴러간다. 이 세상에 떨

어져서 처음으로 겪는 최초의 위기가 이딴 것이라니 웃기지도 않지만… 뭐 리얼 월드니까 어쩔 수 없지.

얼떨결에 대치 상태가 되어 나는 도망 다니는 것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마법을 만들어갔다. 대놓고 마

법진을 만들거나 엄한 짓을 하면 이하린이 눈치채고 다시 덤벼들겠지. 그 때문에 숨을 고르는 척하고 몸

에서 흐르는 핏물에 마력을 섬세하게 담는 게 전부였다.

지도 대련을 하다 상대가 육체 강화 이외의 미등록 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지도 대련을 하다 대련 상대의

노출된 살결에 욕정을 느끼는 것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있으니까. 전자의 경우 그녀가 나를 제압

해 어디 심문실에 박아버릴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포돌이가 와서 그녀에게 은팔찌를 채울 것이다.

왜냐면 지금 나는 미성년자니까!

점차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인다. 전투에 미쳐가던 머리가 성욕에 물들기 시작하니 잠시나마 이성

이 돌아오는 것이다. 아니, 이성이 돌아온게 아니라 몸이 달아오르며 이곳 저곳에 정신이 분산된다고 보

는 것이 맞았다.

대련이 시작되고 거의 40분. 내가 한 것이라고는 대련실 바닥을 뒹굴고 흐르는 바람에 몸을 맡겨 이리 저

리 도망 다니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제 승기는 내게 있었다. 고작해야 뺨에 흘렀던, 이제는 완전히 아물어

버린 상처에서 흐른 단 한 방울의 피 때문에.

“이, 이 씨바알… 오지 마!”

‘혼란스럽지? 좆같지? 넌 씨발 내가 골수까지 빨아먹어 버린다.’

그녀의 흐릿하던 검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다. 그와 동시에 열기도.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폐

허가 되어가는 대련실을 돌아본다. 정신줄을 놨다가 잡았더니 눈 앞에서 남고생이 웃통을 까고 가슴을

보여주며 다가오고 있으니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잔 생체기는 사라졌지만 핏물로 촉촉하게 젖은 상태

인데.

더군다나 그 장면을 보고 자신이 성적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것 또한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왜요, 좀 더 해달라면서?”

과장되게 미소를 짓고 키득키득 웃는다. 갓 상급이 된 흡혈귀로 A급 히어로에게 비빌 수 없다는 걸 알았

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도 같은 결과일까?

“저, 저기! 시간 다 되었는…”

띠디딕 소리와 함께 막내 스태프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다. 갈 곳을 잃고 구석에서 맴돌던 바람이

열린 출구를 향해 휘잉 몰아친다. 멍하게 풀리는 눈동자. 헤 벌어진 입. 손의 힘이 풀렸는지 장바구니를

툭 떨어트린 여성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외면하고 문 밖으로 슬며시 밀어냈다.

“이제 방해꾼도 없네요?”

힘이 부족해 몸을 굴려 벗어났어야 했던 모든 과거의 플레이에 걸고 맹세하건데, 이 빌어먹을 년은 내가

말라 뒤질 때 까지 빨아먹어서 소희의 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작품후기]

중간고사가 끝남

끝났다는 이유로 A전공 6장짜리 레포트

연휴 내내 고생함

연휴 3일 쉬었다는 이유로 B전공 과제

...?

뭐지? 전공 교수들끼리 뭐 있나 진짜

내 연휴 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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