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89)

A급 히어로

내가 뭐 숙련된 검객도 아니고, 손바닥에 생긴 굳은살만 가지고 상대가 뭐 하는 양반인지 알아차릴 수 있

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 굳은살이 적어도 하루 이틀만에 생길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안다. 그것도 히어로

의 육체인데.

가볍게 맞닿았던 손아귀가 물러난다.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그녀. 아마 어린 남학생의 호기심이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내가 보는 건 손아귀 너

머,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지만.

전소희의 귀만 봐도 그렇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체육부에 들어가서 청춘의 99%를 운동에 처박았는

데. 집 안에서 몰래 찾아본 고등학교 앨범의 그녀는 귀가 약간이나마 찌부러져 있었다. 운동을 하다 바닥

에 쓸려 변형된다는 만두 귀. 하지만 각성을 한 지금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귀로 돌아온 상태.

초능력자는 육체가 멋대로 회복하고 진화한다. 육체 강화 능력자가 아니면 근육이 생기지를 않는 것. 베

이거나 화상을 입어도 흉은 지지 않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다 강인한 회복력 때문이다. 그런데 손아귀

가 뒤틀릴 정도로 굳은 살이 있다고?

“와, 진짜 이하린이야!”

“진짜네! 아, 커피 감사합니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제공된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먹고 있으니 몇 명의 학생들이 더 들어온다. 남

학생 세 명과 여학생 둘. 남학생들은 각자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학교의 체육복을 입고 있었

다. 주말 실습 보충이라도 들은 걸까?

“자아,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웅 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후덕한 인상의 여성이 카페 안쪽, 카메라 무더기 사이에서 나온다. 예능 쪽에서

꽤나 유명한 PD인지 학생들 중 두 명이 아… 하고 작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 마

시고 얼음을 와작 와작 씹고 있으니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간다.

“하하,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여러분은 이하린양과 팀이 되어서 몇몇 미션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당연히 강제하는 건 아니고, 약간의 출연료와 상품권을 드리겠습니다.”

“그, 얼마나 오래 걸리나요? 저희가 저녁에 연습이 있어서…”

“5시 전에는 촬영이 끝날 겁니다.”

그 말에 체육복을 입은 두 명의 여학생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이하

린을 좋아하는 건지. 둘 다일수도 있고. 몇몇 쓸모 없는 질문들이 끝나자 PD라고 생각되는 여성이 촬영이

시작된다며 손뼉을 쳤다.

“지금 이하린씨 외에도 총 5개의 조가 이쪽 구역에서 같이 미션을 진행중입니다. 정해진 장소에 가서 미

션을 수행하시면 다음 미션 장소를 알 수 있게 되는 방식이고, 최종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팀이 승리하

게 됩니다. 자, 준비되었나요?”

목소리 톤이 변한 PD의 말과 동시에 이하린에게 종이 한 장이 주어졌다. 뭘 해야 하는지 저기에 적혀 있

는 건가. 종이를 받은 이하린이 곧바로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우리 쪽으로 종이를 도려 보여준다.

‘482-27 공방에 먼저 도착하십시오’

앞의 숫자는 좌표인지 수수께끼인지 곧바로 어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미션

지 하나로 인해 곧바로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스마트폰을 두두리는 여학생, 단말기에 인근 지도 홀

로그램을 띄우는 남학생. 그리고 적당히 말을 걸어 방송 분량을 뽑는 이하린.

몇 마디로 긴장한 남학생들의 분위기를 띄우고, 검색하느라 입을 꾹 다문 여학생의 웃음을 유도해낸다.

정말 히어로보단 천상 방송인이라는 느낌. 나는 그걸 보며 얼음을 마저 씹어 삼켰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

다.

그저 집에 돌아가도 할 게 없어서 방송에 참여한 것이고, 지금 이하린과 학생들이 있는 내 맞은편 테이블

은 햇볕이 아름답게 내리쬐고 있었으니까. 그냥 가게 조명 아래에 숨어 있을 뿐이었다. 지난 아이돌 플레

이에서는 연약한 몸이라 이런 예능은 못 해봤으니까.

A급에 대한 약간의 흥미. 지루한 주말을 해소하기 위한 시간 보내기. 단지 그 뿐이었다.

‘이하린한테 접근하면 A급에 대한 정보를 좀 알 수 있으려나?’

처음 보는 A급 히어로는 내게 있어서 미지의 존재였다. 최면이 먹히는지, 흡혈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매혹이 통하는지, 그리고 싸워서 이기거나 버틸 수 있는지 모르니까. 그냥 적당히 정보만 얻어보고 계획

은 나중에 짜려고 했는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학생들이 이 쪽을 자꾸 쳐다본다. 나름 학교의 유명 인사라 이건가. 생각해보면

지난 번 김민혁 때문에 학교 뒤뜰의 양아치들이 단체로 기절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하필 내가 그 쪽으로

간걸 본 녀석들이 몇몇 있었다.

학생 식당에서 선배들 턱을 부숴버린 것은 적어도 내게 음식이 날아왔다는 이유라도 있었지. 이제 소문

속의 나는 뒤뜰에서 담배를 피우던 선배 무리를 급습해 박살낸 완벽한 깡패가 되었다. 틀린 말이 아니어

서 부정도 못 하겠고. 귀찮아서 안 하는 건가.

“그래서… 학생 이름은 어떻게 되죠? 아, 말 놔도 되나요?”

“이하늘이요. 말 놔도 되요.”

“좋아. 그럼 만약에 1등이 되면, 내가 우리 팀원들 소원 하나씩 들어줄 테니까 빨리 이 공방부터 찾자.”

그 말에 여학생들은 남자 아이돌 그룹의 사인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고, 남학생들은 수줍게 웃으며

이하린의 한정판 굿즈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풀리지 않는 미션에서 잠시 눈을 돌린 그들의 시선

이 내게 몰려온다.

“그럼 하늘이는, 우리가 이기면 뭘 원해?”

현직 히어로가 예비 히어로를 격려하고 토닥이는 보기 좋은 장면. 오또케오또케 하며 벌써 굿즈에 대한

환상을 지닌 남학생들과, 어느 그룹의 복근과 쇄골이 더 섹시한지 열변을 토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나

는 마지막 얼음을 씹어 부수며 내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우승하면 한 판 떠주나요?”

까드득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크게 울린 것 같았다. 잠시 술렁이던 촬영진의 모습과, 이걸 잘라야 하나 편

집해서 써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런가. 남녀 역전 세계여서 그렇게 들릴 수 있구

나.

“학교 대련실 빌려서 지도 대련 한 번 부탁하고 싶은데.”

예능 게스트로 길거리에서 붙잡힌 여고딩이, 인기 좋은 남배우한테 한 판 떠 달라 하면 그런 쪽으로 생각

할 수 있겠지. 내가 생각하기엔 병신 같이 몰아가는 걸로 느껴지지만. 하기야 중세 무림부터 미래 SF까지

불편러는 어디에나 있었다.

“음… 죄송한데 이하늘씨는 초능력 등급이?”

“B등급이요.”

다시 한 번 촬영하던 사람들이 웅성이는게 느껴진다. 하기야 학교에서는 개나 소나 B급이라 느껴지지만,

실제로 B급 정도만 되면 어마어마한 초인이니까. 우리 반에 B급이 셋이나 되는 거지 그냥 B급이 흔한 게

아니었다. 강정태와 조희정, 나. 이 세명 말고는 육체 강화 능력 쪽엔 B급이 없고, 다른 과에도 두 셋 정도

만 있다고 들었으니까.

학생이 천 단위로 다니는 그 거대한 학교에 B급 능력자는 전부 합쳐서 십 수명이라는 소리였다.

“좋아요, 우승을 하면 촬영이 끝나고 바로 한 번 지도 대련을 하죠. 우승 상품이 제가 참 원하는 거라. 원

하는 걸 얻으려면 이 공방이 어디인지 알아야겠죠? 힌트 없나요?”

“힌트를 원하시면 게임에서 이기시면 됩니다. 자, 여기 테이블 보이시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여러 개의 뒤집힌 종이컵. 안에 있는 숫자와 사칙연산 기호로 높은 숫자를 만들어 내

면 힌트를 준다는 말에 조용히 일어나 그 앞에 섰다. 지난 플레이부터 해 보고 싶었던 짓이긴 한데.

‘1:1 대련하다가 각 봐서 피도 좀 훔쳐 마셔야겠다.’

눈동자에 힘을 준다. 상급 흡혈귀가 되어서 설마 간단한 투시조차 못하겠는가? 망설임 없이 도전이라 외

치고 종이컵을 뒤집으니 카메라맨 하나가 들러붙어온다. 나누기 1, 곱하기 10. 육체 강화 능력자라는 정

보에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찮으니까 빨리 끝내고 가도 되죠?”

예능 촬영은 순조롭다 못해 하품이 났다. 열심히 게임을 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냥 후딱 끝내고 이하린과

대결 한 번 할 생각이었으니까. 조금 지체된다 싶으면 흡혈귀의 육체가 지닌 기본적인 초능력을 꼼수처

럼 사용했다. 가벼운 투시를 해서 벽 너머를 슬쩍 보거나, PD쪽 발치에 쥐를 보내서 속닥거리는 것을 엿

듣거나.

“그래서, 이건 또 뭐야…”

그 와중에 여학생들이 체육복 상의를 탈의하고 몸매를 자랑하거나, 다른 팀의 여배우를 만난 남학생들이

얼굴을 붉히고 고음으로 꺅꺅 비명을 지르거나 하는 귀찮은 일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슬그머니 그늘에

숨자 이하린이 귀신같이 캐치해서 다가오고.

그렇게 순조롭게 우승을 하고, 촬영이 끝나고 약속한 대련을 위해 학교로 향했다. 영상 촬영을 위해 따라

온 카메라는 대련실 밖에서 비밀 엄수를 핑계로 쫒아 냈고. 바람을 다루는 초능력자인 그녀와 가볍게 대

련을 하다, 상처를 슬쩍 내서 피를 받아가려 했는데.

“조, 좀만 더어어어!”

갈기발기 찢겨 옷의 역할을 못하는 누더기를 걸친 그녀에게 쫓기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작품후기]

중간고사 끝난 지금이 한가한 타이밍이라면서 과제를 주는데

에브리 타임에서 교수님이 과제를 이상하게 준다는 강의 평을 믿었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