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히어로
마약부터 흑마법서까지 사용한 작전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두 명의 기괴한 성장세는 멈춰 2학기가 시작
되었음에도 B급에 머무르는 정도였고, 반대로 나는 중급 흡혈귀를 넘어 상급에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해
서 두 명에게 들킨 것도 아니었다.
정화 마법으로 온 몸을 깨끗이 씻기고, 그 위에 소맥 조금 뿌려 둔 게 그날 밤의 흔적의 전부였으니까. 강
정태는 의식을 잃기 전 낯선 여성들을 목격했지만, 골목에서 굴라들과 한 바탕 싸웠었던 전적이 있는지
라 자신의 능력이 가져온 부작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초능력과, 그 부작용인 환각
증세. 상담한다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귀찮겠지만 그는 스스로 제어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 음… 잘 잤어?”
전부 다 잘 풀린 것 같았던 그 작전의 부작용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건 소희의 태도였다.
“다녀올 게!”
눈도 잘 못 마주치고 후다닥 도망치듯 먼저 학교로 가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생명력에 반응하는
마약을 섭취했던 소희는, 내 몸에 깃든 다량의 생명력을 본능적으로 갈취해갔다. 그 생명력이란 것이 정
액에 깃들어 있었고.
남녀 역전 세계인지 그냥 SM플레이인지 모를 정도로 그녀는 나를 쥐어 짰었다. 평소의 수줍음은 어디로
갔는지 요녀를 넘어 마녀처럼 보일 정도로. 남아 도는 생명력으로 몸을 개조하느라 그녀가 이끄는 대로
쾌락에 몸을 맡겼지만… 다음날 제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미안해서 죽으려 들었다.
‘뭐, 성격으로 봐서는 한 달 정도는 저렇게 지내겠네.’
아직까지도 가끔 입으로 해 줄 때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양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인데. 침대
에 눕혀서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꿈틀거리면 그대로 양 어깨를 짓누르고 마치 강간하듯이 나를 찍어 눌렀
으니 어떤 기분이겠는가?
정작 나로서는 남녀역전세계에 온 것 같은 섹스여서 매우 만족했지만.
학교를 향해 후다닥 도망치듯 떠나는 소희를 배웅한다. 주말이라 한가할 텐데 일이 바쁜 척 어색하게 연
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재미가 있다. 아침 식사를 한 잔해들을 정화 마법으로 치워버리자 할 일이 완벽히
사라졌다.
‘…그나저나 지하 도시는 왜 이리 조용하지?’
강정태와 김민혁의 미래를 빨아먹은 이후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2학기가 되어 오전부터 오후까지 능력
을 이용한 대련만 주구장창 진행하는 학교 수업에서는 승률 100%를 유지하고 있었고, 여름 방학 때 소
희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수영장에서 알바를 뛰던 굴라들은 다시 지하 도시로 가서 본업을 뛰기 시작했
다.
그게 문제였다.
연금술사와 마법사.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종의 NPC라면 커다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실험에
대한 집착이다. 사용할 일이 없어 지하 도시의 낡은 금고에 숨겨두고 두 명이 들고 다니는 강화석, 아니
그 전에 창고를 가득 채웠던 몬스터 병사에 불을 질러 버린 행위만 해도 눈이 돌아가서 나를 찾아 다닐 텐
데.
‘아, 이러면 좀 안 좋은데.’
자신의 실험실에 대한 집착이 없다? 어쩌면 그 창고 안에 있던 물건들이 별 거 아닌 걸지도 모른다. 세력
이 너무 거대해서 그 정도 양의 손실 따위야 별 것 아닐 수 있는 거고, 아니면 레벨이 매우 높아 싸구려 병
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걸지도.
아니면 나를 찾아다니는 행위를 내가 펼쳐 둔 감시망이 탐색하지 못하는 걸 지도 모른다. 상급에 가까워
진 흡혈귀의 능력으로 지하 도시의 쥐에게 마법을 걸어 감시망을 늘렸는데. 매혹에 걸린 남성들, 세력을
늘리지 않고 이 구역 저 구역 떠돌아다니는 굴라와 구울들, 그리고 골목 마다 퍼져 있는 생쥐들. 그 모든
것의 눈을 피해서.
‘둘 다 위험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뭔가 할 수 없네.’
점심에 태양이 더 높게 떠오르기 전에 장을 보러 나선다.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 쇼핑몰로 주문을 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서 TV나 보고 싶지만, 이쪽 세상의 TV 프로그램은 전부 히어로와 연관되어 있어서 별 재미
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히어로입니다! 잠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그래, 이런 프로가 재미가 없다고.
양 손에 장을 본 물건을 들고 돌아오는 와중, 카페가 많은 거리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남성에게 붙잡혔
다. 무의식적으로 목을 날려버릴 뻔했지만 양 손에 병 우유와 계란 팩이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다.
“이 근처에 사는 것 같은데, 혹시 히어로 지망생인가요?”
더운 날씨에 맞게 가벼운 차림으로 차려 입은 남성 리포터는 자신의 하얀 셔츠 위에 달린 것이 박살 나 셔
츠를 더럽힐 뻔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쾌활하게 질문을 해 온다. 이 근처에 있는 학교는 김세민 이소정이
다니던 여고, 그리고 내가 다니는 영웅 학교.
“네.”
결국 이 근처에 돌아다니는 남학생 대부분은 영웅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결론이 나온다. 귀찮아서 짧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마저 옮기자 쪼르르 따라붙는 리포터. 카페와 디저트 가게가 몰려 있는 거리라서 그
런지 길가에 넘쳐나는 게 남학생들인데 왜 이럴까.
“자자, 학생분. 인터뷰에 응하시면 사은품도 드려요. 아니다, 아니다.”
리포터가 커다란 마이크에서 입을 때고 슬쩍 귓가에 속삭여온다.
“저기 카페에, A급 히어로 이하린양이 있어요. 싸인 받고 싶지 않아요?”
A급 히어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리포터를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은 아닌데. 히어로 협회 사
이트에서 주구장창 검색해도 나오지 않던 A급 히어로가, 지금 이 동네 카페에서 고삐리 인터뷰 때문에 와
있다고?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본다. A급 히어로 이하린. 검색 버튼을 누르자 마자
수 십 개의 기사가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이야, 씨발. 이걸 몰랐네?’
히어로 협회에는 정보 따위 없었는데 인터넷 뉴스에는 정보가 수두룩하다. 뉴스 기사를 읽어보니 바로
이해가 간다. 이쁘니까, 남자들한테 인기가 좋으니까 여론 몰이 용으로 작전에 투입하지 않고 연예계에
돌리는구나?
협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작전에 대한 것. 빌런 소탕, 치안 유지를 위한 순찰, 불법 조직
의 검거에 관한 공문들. 하지만 저 A급 히어로 이하린의 뉴스를 대충 흩어보면 한 4년 내내 방송 활동만
해 왔다. 예능부터 드라마, 영화 조연이나 아이돌 뮤비 까메오 같은 일까지.
“무슨 일인데요?”
“아, 혹시 상하는 물건이 있으면 물건은 저희가 맡아 드릴 게요. 자자, 가죠!”
다시 마이크에 대고 활발하게 말하는 리포터. 퉁명스럽게 대했는데도 친근하게 대하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니다 싶었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반말로 찍찍 왜요 뭐요 하는데도 이런 태도라니, 역시 방송인인가.
리포터가 슬그머니 가리킨 카페에 가니 스태프가 자연스럽게 내 장바구니를 받아간다. 손바닥에서 맴도
는 한기를 보니 C급 능력자는 되는 것 같은데. 빙결계 C급 능력자가 촬영장 에어컨&냉장고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존나 큰 방송인가? 아니면 저 이하린이란 히어로가 그만큼 대단한 건가?”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C급 히어로라 해도 민간 회사에 가면 어지간히 대우를 받는다. 일반적인 회사에는
취직하지 못 하겠지만 유통이나 식품 회사에 가면 일반 사원보단 높은 월급을 받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
서 막내 스태프 역할이나 하고 있다니.
호기심에 이하린의 이름을 지우고 오늘의 히어로! 를 검색한다. 매주 주말의 황금 시간대에 방영하는 인
기 예능 프로그램. 히어로 예능에 관심이 없어 몰랐던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위키에 들어가 살펴보니 제
작 지원에 히어로 협회가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니… 방송 공익이라 봐야 하는 건가.
왼 손으로 우유와 계란을 시원하게 만들고, 오른손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얼리는 섬세한 컨트롤을 보
여주는 불쌍한 방송 공익을 뒤로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점차 강해져 가는 햇빛이 피부에 닿지 않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선선하게 틀어진 에어컨 바람도.
‘근데 왜 하필 창가에서 저지랄이냐.’
테이블이 스무 개는 넘어가는 커다란 카페 안에는 카메라가 득실득실 했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테이
블에 혼자 앉아 있는 검은 생머리의 여성이 한 명. 아까 웹페이지에서 봤단 이하린으로 보였다.
“영웅 고등학교 다니는 거 맞지? 후배님 이네.”
리포터가 뭔가 속닥거리더니 웃으며 이 쪽에 손을 뻗어오는 그녀.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악수를 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여성의 부드러…럽지 않은 거친 손. 시선을 내려 손바닥을 보니 고운 손등과 다르
게 이리 저리 일그러진 손바닥이 보인다.
“아, 미안. 느낌이 이상했으려나? A급 히어로 이하린이라고 해.”
생글생글 웃는 부드러운 외모.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연예인 겸 히어로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방
송만 한다고 A급 자리를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작품후기]
중간고사 끝난 기념으로 6장짜리 레포트 내 준 교수님
문턱에 새끼발까락 박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