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89)

미연시?

수영복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벌개진 세 명은 조용하고 느릿하게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또

한 그들을 구경하는 것을 멈추고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꽁냥거리는 청춘의 관전도 좋지만,

나 스스로를 강화하여 소희를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려야 하니까.

‘여기 어디쯤 있어야 하는데.’

나름 가장 커다란 쇼핑몰이었다. 여기 없으면 서점 빌딩을 가서 몇 층짜리 건물을 다 뒤지고 다녀야 하니

까 그냥 여기 있으면 좋겠는데.

리얼 월드는 나름의 모드를 설정해 즐기는 ‘게임’이다. 대부분 여러가지 시대를 현실처럼 살아가는데 집

중해서 무슨 시뮬레이터나 가상 현실로 착각하지만 근본 그 자체는 ‘게임’이라는 뜻이다. 그 어떠한 모드

를 사용하지 않아도 불편할 뿐이지, 게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 권, 찾았고.”

“뭐야, 중고 서적 코너?”

책장에 꽃혀 있는 책 사이에서 홀로 어둑어둑한 오오라에 휘감긴 녀석이 보인다. 물론 흡혈귀인 내 눈에

만 보이는 것이다. 슬그머니 펼쳐보니 낡고 재미 없는 내용이 보인다. 에로에 치중한 판타지 만화책. 거대

한 미노타우르스와 싸우던 전사가 방패 째로 날아가 여자 동료 얼굴을 깔아뭉개고, 묵직한 방울이 부각

되어 드러나는.

‘히토미 다운로더 모드를 깔았어야 했나, 씨발.’

하필 연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그딴 그림이라니. 그 와중에 그림은 또 섬세하게 잘 그려서 기분이 나쁘다.

내 목소리를 듣고 옆으로 온 조희정도 슬쩍 내 옆에서 만화 내용을 보더니 얼굴을 붉힌다.

“이거 꽤 오래 된 만화책 같은데… 되게 노골적이긴 하네.”

“뭐, 노골적인게 개그 코드니까. 이 시리즈 좀 같이 찾아줄래?”

“그래, 뭐.”

“찾아서 몰래 읽지 말고 바로 가져다 줘.”

“야! 뭘 몰래 읽겠냐 이걸!”

사실 모르는 만화책이지만 알게 뭐람. 얼굴이 빨개져서 왁왁 소리를 치던 조희정이 그대로 만화책을 들

고 강정태와 김민혁에게 돌아갔다. 활기차고 행동력 있는 건 좋은데, 참 이성을 모른단 말이지. 여자에 익

숙하지 않은 악동 남자애를 보는 기분이다.

“너는 우리가 참고서 고르는 동안 그런 걸 보고 있냐!”

“미, 미안… 나는 그런 만화는 안 봐서…”

“앗 따가! 야! 이씨… 이거 하늘이가 찾아 달라고 한 건데!”

참고서를 읽고 있는 두 명에게 다짜고짜 만화책을 들이 밀었다가 등짝을 한 대 씨게 얻어맞은 조희정이

억울함에 투덜거리며 중고 책장을 뒤진다. 그 모습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두 사람도 참고서

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함께 책을 찾기 시작한다.

책 위에서 손이 겹치고,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이 붉게 변하고. 옆에서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

짝 놀라 서로 반대 방향을 쳐다보고.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순정 만화의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

차피 책에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에 조희정이 아닌 김민혁과 강정태 둘이 100% 확률로 찾아낼 테니 그걸

보고 짜증조차 나지 않는다.

“이야, 능력 좋네. 두 명이나 한 번에 꼬시려 들다니.”

“아, 아니라니까! 넌 요즘 왜 이리 능글맞아졌냐?”

능글맞은 건 원래 이랬는데. 귀찮아서 말을 안 하고 있었지만. 뭐, 그녀 입장에선 무뚝뚝하고 잠만 자던

양아치가 갑자기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활발하게 놀려 먹는 기분이겠지. 원인이 자기 옆에 붙어 있는 두

사람 때문이란 걸 꿈에서도 모르는 상태로.

“너도 애인 사귀어 보면 알 걸?”

“어오… 말을 말지 진짜.”

“뭐어~ 애인 없는 모태쏠로의 목소리라 잘 안 들리는데?”

일부로 과장되게 깔깔 웃자 몸을 휙 돌린다. 그 와중에도 책을 찾아주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이성이 좋아할 만 하다는 느낌이 들긴 드네. 내 취향은 쭉쭉 빵빵한 누님들이라 색기 없는 통짜 몸매

인 조희정은 어린애처럼 보일 뿐이지만.

‘참 아쉬워, 몸매만 좋았어도.’

낙천적이고 활기차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래서 대부분의 사건에 끼어드는 활기찬 미소녀. 보이쉬한 미

소녀 취향인 사람에게는 정말 취향 적중인 미녀로 보이겠지만 내겐 아니다. 보이쉬 한 미녀라 하더라도

몸매가 쎄끈하게 빠진 여자가 좋으니까. 정말 소년인지 소녀언인지 모를 정도로 굴곡 없는 몸매의 조희

정에겐 성욕이 일어나질 않는 것이다.

만약 그녀의 가슴이 한 컵이라도 컸다면, 골반에 조금이라도 S라인이 들어가 있었더라면 아마 몸으로 유

혹해서 조종하려 들지 않았을까. 그 경우에는 저 괴물 같은 두 명의 질투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고민

했겠지만.

‘남녀 역전 세계, 의외로 좆같군.’

여기가 평범한 정조 관념의 세계였다면 주인공은 남자였을거고, 저 괴물 같은 NPC들은 여자일 것이다.

그러면 NTL 한 편 찐하게 찍고 손쉽게 게임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순정만화처럼 커플을 이

어줘서 간접적으로 조종하는 게 아니라.

네 명중 세 명이서 찾아낸 총 13권의 만화책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 서점 밖으로 나선다. 뒤에서는 13권

중 단 한 권도 찾아내지 못한 조희정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무시하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왜 나는 한 권도 못 찾았지?”

“집중력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니야? 니가 지나간 곳에서 발견된 게 4권인데.”

“아냐! 진짜로 한권 한권 일일히 손으로 만지면서 넘어갔단 말이야!”

“그럼 손으로 잡고도 몰랐다는 건데, 말이 되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가끔 책을 찾다 보면 그렇게 넘겨버릴 때가 많으니까…”

“그쵸! 사람이 좀 실수할 수도 있지.”

“단 한권도 못 찾고 하는 변명 치고는 너무 추한 거 아니야? 설마 책장에 있던 야한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

서 그런 거야?”

“여, 여자애는 그럴 수도 있지.”

“선배! 그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팀 킬인데요!”

등 뒤에서 진행되는 즉석 콩트를 무시하고 책을 만져보았다. 낡은 재활용 종이와 닳고 닳은 비닐 표지지

만, 손가락 끝에 지옥 마력을 담아 쓰다듬으니 전혀 다른 감촉이 느껴진다. 보드라우면서도 서늘한 가죽

의 느낌.

‘이 귀한 마법책을 중고 만화책으로 변장 시킨다는 발상은 누가 한 걸까?’

어지간해서 귀한 마법서, 특히 지옥 마법과 흑마법, 저주에 특화된 으스스한 책들은 낡은 고서점이나 중

고 물품 사이에 껴 있다던가, 갑자기 나타나거나 하지 않나.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그랬었는데. 하지만 여

기에서는 달랐다.

‘생각해보면 지난 아이돌 모드에서도 매혹의 서 찾느라 중고 서적 판매 웹사이트를 2주 넘게 뒤졌었지.

사람까지 고용해서 새로 올라오는 모든 중고 서적을 체크하면서.’

이게 리얼 월드 제작진의 개그 코드인지, 아니면 이름 모를 모드 제작자의 개그 코드인지는 모르겠다. 속

내용물은 어린 아이의 가죽으로 만든 책에 처녀의 피로 쓴 악마의 책이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에로

코미디 만화책이니.

“어… 진짜 사게?”

“그럼 가서 벗고 놀까?”

일단 다음주 주말에 수영장에 가기로 약속을 했으니 수영복은 사야 한다. 물론 정조 역전 세계인지라 소

희는 자기 수영복에 무심하기 짝이 없어서, 내 수영복 사는 김에 사이즈에 맞는 것 아무거나 사 오라고 부

탁받았지만.

“우와, 이거 봐… 이걸 입을 수 있나?”

“어휴, 저 변태가.”

“아니, 대놓고 입구에 걸려 있잖아!”

이번에는 쫙 달라붙는 남성용 부메랑 팬티를 보고 세 사람이, 아니 두 사람이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고

한 명은 뒤에서 후후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성욕을 떠나 저런 면만 보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긴 하

네.

‘이건 또 뭐야.’

휴대폰 메일함에는 소희가 보낸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허리 사이즈가 어느 정도고, 가슴이 D컵이고, 색

은 하얀색이나 하늘색 말고 심플한 남색이나 검은 색으로 부탁한다는 메시지. 이게 한창 대의 여성이 자

신의 수영복을 사올 애인에게 보낼 메시지인가 싶었지만… 뭐 여성의 몸매는 남성의 몸매보다 가치 없는

세상이니까.

마치 메두사와 눈이라도 마주친 것 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딱딱히 굳어버린 일행을 놔두고 수영복을

이리 저리 뒤져보았다. 남녀 역전 세계라 그런지 모든 수영복이 위 아래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가, 남자도 가슴 노출을 못하는 세상이네.

내 수영복은 둘째 치고 소희에게 입히고 싶은 새카만 비키니를 골라 잡자 그 모습을 본 세 명이 그제서야

슬금슬금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남성용 수영복에서 얼굴을 돌리고 있는 조희정과 진지한 얼굴로 아

까 그 부메랑 팬티를 바라보는 둘.

‘…다음주에 같이 가자고 해 볼까.’

너무 질질 끄는 건 재미가 없으니 수영장에서 돌아갈 때 둘 중 한명과 같이 모텔에 처박아 볼 까? 그런 생

각이 들었다. 저 숫기 없는 반응이 남자 맛을 보면 좀 색기 있게 변할지도 모르지.

[작품후기]

다른 남자 둘 이야기가 너무 많아지는데 곧 퇴장시킬 예정입니다.

멍하니 쓰다보니 자꾸 이야기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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