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89)

미연시?

쇼핑은 묘사하기 귀찮을 정도로 순조로웠고, 내 가설은 짜증이 날 정도로 잘 맞아 들어갔다. 김민혁은 소

심함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조희정에게 들러붙어 소설을 설명하고 추천하였으며, 강정태

의 문제집을 고르는 손짓은 점차 절도 있게 힘이 팍팍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2번째인데, 개미에 관한 거야.”

“5번째는 신 아니었어요? 죽음, 개미, 신? 너무 뜬금없긴 한데 어떻게 이어지는 거죠?”

참고서를 꺼내 들고 난이도가 어떤지, 지문이 마음에 드는지 하나씩 흩어보는 강정태의 손등에 핏줄이

올라와 강철판도 우그러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김민혁의 소설가 찬미는 끝을 맞이했

다.

“그래서, 이야기가 다 끝났다면 도와줬으면 하는데.”

“아 맞다, 선배들이 추천했던 목록 내가 들고 있었네.”

후다닥 강정태의 옆으로 달려가는 조희정의 뒷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는 김민혁. 그 모습에 입꼬리

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만난지 30분만에 반하다니, 누가 아카데미 모드 아니랄까봐 첫 눈에 반

한다는 게 뭔지 정말 정석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강정태는 학교와 다른 모습의 조희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서 다른 남학생과의 교류가 있

다 해도 시덥지 않은 말장난으로 웃기는 정도. 혹은 교사가 시킨 일이 조금 버거워 보이면 부반장으로서

도와주는 수준이다. 남녀를 떠나 친근하게 대해주는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교복도 훈련복도 아니고 한껏 멋낸 사복 차림의 남녀였다. 심지어 그가 고르는 것

은 그녀를 위한 참고서. 소꿉친구를 위해 서점에 왔더니, 그 당사자는 처음 보는 선배와 시시덕거리는 중

인 것이다.

‘민혁이는… 그냥 말하는 게 좋은 거고.’

강정태가 느끼는 감정은 소꿉친구와 이성의 경계선에서 느끼는 고민이라면, 김민혁은 그냥 처음으로 얻

은 대화 상대에 대한 기쁨으로만 보인다. 학교에선 괴롭힘 당하고 성격은 내향적이라 쉬는 시간에는 홀

로 책만 읽는다. 외국 소설가에 대해 줄줄 읊어줄 정도로 팬심을 지녔는데 대화를 할 상대가 처음으로 등

장한 것이다.

나?

담벼락 넘어와서 사람 팔뚝을 이빨로 물어뜯어 출혈을 일으킨 폭력범 앞에서 취미를 전파하려 들긴 좀 힘

들지 않을까? 만약 김민혁이 이미 초능력을 깨우치고 전투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나를 무서워하지 않

겠지만, 1학년부터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학교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소심한 피해자다. 아마 비 능력자 입

장에서 폭력적인 초능력자는 불곰이나 고릴라 비슷한 것으로 보일 테니까.

이미 어지간한 B급 능력자들은 손짓 한 두번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괴물이 되었고, 앞으로 3년 이내에 A

급이나 S급까지 씹어 먹을 수 있을 괴물이지만 속마음은 여린 문학 소년일 뿐이었다. 내 입장에선 생쥐에

겁먹는 사자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봐요?”

“아, 아니… 그 정도 까진 아니고. 우리 반에는 이 소설 읽는 사람이 없었거든. 근데 희정이는 읽어 봤다고

해서…”

“희정이? 이야… 나한테는 말 놓는데 1주일은 넘게 걸렸으면서.”

생긋 웃으며 몰아붙이자 책을 양 손으로 모아 쥐고 빨개진 얼굴을 가린다. 그 모습이 첫사랑에 빠진 문학

소녀의 모습인지라 책장을 돌아다니며 책을 찾던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 물론 내 앞에 있는 것은

문학 소녀가 아니라 문학 소년인지라 나에겐 별 감흥이 없다.

되려 그 모습을 바라보니 풋풋한 청춘의 목격자가 되어 낯간지러우면서도 응원하고 싶은 상큼한 마음 따

위는 솟아오르기는커녕 가슴 한 구석에서 질척한 질투심이 올라온다. 조희정을 질투하는 것이었다. 내가

게이라는 뜻이 아니고.

‘나도 저렇게 개씹사기 NPC를 10분 대화한 것으로 홀리고 싶다.’

참고서를 뒤적이는 두 명의 소꿉친구와, 그걸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소심한 선배. 이내 조희정의 요청으

로 합류하여 선배의 시선으로 어느 참고서가 1학년에게 제일 좋을 지 겉으로만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 속으로 주마등처럼 그동안의 기억이 흘러간다.

낡은 누더기 걸치고 칼 한 자루 쥔 검객은 내가 일군 세력을 일검에 와해시킬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세상

에서 가장 위대한 대장장이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 만든 유작을 선물하고, 고작해야 ‘공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왕국을 점령하고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장 높은 산에 사는 용은 숨결 한 번으로 제국군도 왕국군

도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 때 바친 것은 100개의 최상급 던전에서 나온 모든 보물. 국가 예산 150년 어치

를 그대로 가져다 바쳐서 제국에 숨결 한 번 뿜게 했었지.

그 외에도 금보다 희귀한 광물을 톤 단위로 바치고 정보 한 자락을 제공한 기계 장치의 신이라던가, 1만

명의 산 제물로 현자의 돌을 만들어 바쳤더니 포션 한 병 주던 연금술의 악마라던가. 하나 같이 가성비를

따지면 피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기억밖에 없다.

그런데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라.

“이건…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네. 적당히 지어내서 쓴 것 같아. 2학기에 도움이 안 될 거야. 차라리 이쪽

출판사가 좋겠다. 실제 초능력자들을 고용해서 썼는지 묘사가 정확해. 아마 학생들한테 돈 주고 정보를

샀을지도 몰라.”

“그럼 이 문제집은 어때요?”

“이론 설명은 자세한데 실전 내용이 없어. 아마 학교에서 얻은 정보로만 써서 그런 것 같아.”

책장에 자리 잡은 김민혁의 앞으로 조희정과 강정태가 문제집과 참고서를 들고 오면 김민혁이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비록 김민혁은 초능력자가 아니여서 실기 시험을 직접 치룬 적은 없지만, 오히려 지원 물품

제작자였기 때문에 이론에 더욱 자세할 수 있었다.

“작년 실기 시험에는 그물탄과 점착탄을 통한 면 단위의 제압 사격이 있었어. 그런데 여길 보면 작년 기

출이라면서 화재 현장 내용이 적혀 있잖아? 사기 치는 거니까 이 출판사 물건은 다 걸러.”

“혹시 재작년이나 그 전 자료도 있나요?”

“응, 과제 때문에 선배들한테 구입 한 5년치 정보가 있어.”

“구입? 그러면 저희도 돈 드릴 게요.”

“괜찮아, 대신 오늘 책을 좀 많이 살 것 같은데 좀 도와주기만 해.”

“그럼요, 남자를 저녁에 혼자 보내지는 않죠.”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조희정의 말에 김민혁의 볼에 발그스름한 혈색이 돈다. 강정태는 5년의 실습 기록

에 마음이 동했는지 마치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꽁냥거림.

‘초능력과 첨단 과학을 통해 E-Book 홀로그램 데이터로 받거나 택배를 시키면 될 것을…’

물론 이 딴지는 내 목구멍 너머로 넘어오는 일 따윈 없었다.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의 약속과 그 뒤의 에스

코트까지 계획에 잡혔으니까. 고작 몇 십 분 좋아하는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준 댓가로 건네지는 호

의. 부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아… 선배님, 이건 어떤가요?”

“음… 좋네. 괜찮다. 너도 책 보는 눈이 좀 있는 것 같아. 혹시 소설 좋아하니?”

“좋아하냐 싫어하냐 묻는다면 뭐, 많이 읽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강정태의 입장에서 김민혁은 갑자기 반의 손 많이 가는 친구가 소개 시켜준 귀여운 선배로 보인다. 반대

로 김민혁 입장에서 강정태는 자기를 도와주겠다고 갑자기 나선 깡패 후배의 목줄을 쥐고 적당히 제어하

는 후배로 보이겠지. 그리고 둘 다 나의 피로 만들어진 특이한 마력을 지녀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게 3P로 가는 매개체가 되어 셋이 하렘 섹스를 하던 말던 내 입장에서는 괴물 두 마리가 사이 좋게 하하

깔깔 웃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야, 혼자서 뭐 해?”

“임자 있는 남자 꼬시지 말고, 가서 저 두명이나 꼬셔. 나는 책 따위 안 읽는 거 모르냐?”

“내가 언제 꼬셨냐! 아냐! 아니라고!”

내 목소리에 화목하게 서로를 칭찬하던 두 명의 고개가 이 쪽으로 휙 하고 돌려져 온다. 남자끼리 온화하

게 웃으며 서로를 치켜세우는 장면은 언제 봐도 짜증이 나기 그지 없었지만, 이쪽 세계 사람들에겐 포상

인 모습인지 아까부터 이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 느껴진다.

“너는 책 가지러 간다더니, 그새 하늘이한테… 이건 연락 드려야겠는데.”

“아, 아니라고! 소희 언니 은근 마음에 담아두니까 개소리 하지 마라 진짜.”

물론 공략 대상 따위가 될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주인공 친구인 조연이 될 것이다.

왜 순정 만화나 러브 코미디 만화 모드를 보면 꼭 그런 사람 하나씩 있었다. 숫기 없는 남주인공을 놀려 먹

는 당찬 여자애. 히로인은 아니고 다른 남자랑 사귀는 중이라 자기 경험담을 말해줘서 주인공 등 떠밀어

주는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그런 캐릭터.

“근데 책 안 읽을 거면 여긴 왜 온 거야?”

“수영복 사러. 책 다 샀으면 가자.”

그리고 나는 좀 많이 밀 것이다. 찔끔 찔끔 진도 나가는 건 답답하거든.

[작품후기]

중간고사도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도 다 끝났습니다.

작가는 자유로운 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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