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89)

미연시?

여름 방학.

참으로 생소한 단어였다. 현실에서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꽤 된 사회의 톱니바퀴로 일요일과 공휴

일을 제외하고는 사무실에 나가 단순 서류 작업만 반복하는 회사의 가축이었고, 리얼 월드의 나는 학생

이었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학생 아이돌이 되어서 고등학생이란 타이틀은 달았지만 학교엔 이름만 올려 두고, 고등학생인데 학교에

좀비가 나와서 어차피 못 간다던가, 학교 뒷 운동장에서 변신 로보트가 출몰해 외계 괴수랑 싸우느라 휴

교령이 떨어진다던가.

‘진짜 고등학교 어떻게 다녔지?’

흡혈귀의 우월한 신체 능력으로도 귀찮아서 돌아버릴 것 같은 6시 기상 7시 등교 같은 스케쥴을 어떻게

평범한 몸뚱아리로 해낸 걸까, 그런 의문이 든다.

“오늘은 쇼핑 다녀온다 했던가?”

“네, 그래도 저녁 전 까진 올거에요. 여차하면 밖에서 뭣 좀 포장해 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

오늘도 사회의 노예인 소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으로 만들어 준 토스트를 덥썩덥썩 베어 물고 빠르게

학교로 향한다. B급 육체 능력자 정도 되어서 고등학교 경비 공익을 서게 된다면 어느정도 유도리 있게

근무를 서겠지만… 근무지의 윗사람이 자기 할머니니까. 어쩔 수 없지, 자업자득이다.

그릇 위에 남은 음식물 찌꺼기와 집안 청소를 정화 마법으로 대강 끝내고 휴대폰을 집어 드니 강정태로부

터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11시에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확인 문자. 참 성실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는 문자를 보내자 마자 새로운 문자 하나가 날아온다. 이번에는 김민혁의 문자. 마찬가지로 11시 쇼

핑몰에서 만나기로 한 거 맞냐고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강정태는 성실함이라면 이 선배는 소심함 때문이

겠지.

그래, 너무 소심해서 문제였다. 체육계열이라 약간의 똥군기가 존재하는 영웅 학교에서 후배에게 말을

놓지 못할 정도로. 처음에는 히어로vs빌런 구도라 강정태와 김민혁이 한 판 붙을 줄 알았는데.

김민혁은 너무 소심했다. 능력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주제에 성격은 여전히 소심하니까. 아는 사이라

는 핑계로 굴라들을 불러 살살 여자 맛을 알게 만들려고 했지만 2명의 굴라는 커녕 나한테도 말을 못 놓

는 상황. 그는 빌런의 자질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처음에는 세뇌한 여자들로 김민혁을 강간해 빌런으로 만들까 했는데 그

의 능력을 보고 바로 포기해버렸다. 김민혁의 능력은 주술의 일종이라 만약 저기서 각성 했다간, 강간의

배후자가 나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나라는 것을 못 알아차려도 흡혈귀나 지옥 마법

사용자라는 것을 알아차려 내게 불똥이 튀면 웃을 수 없다.

야생마의 고삐를 채우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달리는 호랑이 등 위에서 호랑이 발톱에 네일 아트를 해 주

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방법을 바꾸기로 생각했다. 김민혁을 객관적으로 분석

하면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니까.

이번에는 내가 문자를 보냈다. 11시까지 쇼핑몰 앞으로 늦지 말고 나오라는 내용. 휴대폰을 만지작거리

고 있었는지 바로 답장이 온다. 무슨 어장 관리도 아니고.

‘진짜 먹고 살기 힘드네.’

그냥 소희 하나 어화둥둥 하면서 편히 놀고 먹으려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게 다 그 새끼 때문

이다. 시간 배율 가지고 장난질 친 놈. 아니, 생각해보면 이게 현실이랑 1:1인가 1:100인가? 여기서 여생

을 보내고 로그아웃 했더니 1주 2주 지나 있는 거 아닌가.

나쁜 삶은 아닌데 엿 먹듯이 이런 세상으로 보내지니 기분이 묘하다. 뭔가 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고마워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심지어 받은 게 선물인지 엿인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늘 하듯 하던

걸 하는 중 이지만.

-알아, 안다고 지각 절대 안 하니까 그만 좀 해. 정태랑 갈 테니까.

그러니 오늘은 매우 중요한 것을 확인하는 날이 될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학생들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쇼핑몰 단지에는 주말을 맞이하여

인파가 가득하게 몰려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못 찾는 건 아니었지만.

“아, 여기야! 야 하늘!”

역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 볼 정도로 우렁찬 성량. 방학을 맞이하여 남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조희정이 눈이 마주치자 마자 손을 번쩍 들고 외친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강정태 또한 우리 쪽으로 접

근하기 시작한다.

“공공장소에서 너무 시끄러워. 우리 정도 능력자면 작게 말해도 들린다고.”

“반가워서 그래, 반가워서.”

헤어져서 나를 찾고 있었는지 곧바로 합류해 학교에서 그래온 것 처럼 만담을 시작하는 둘. 그 모습을 보

니 내 생각이 맞다는 생각이 점차 머리 속을 차지한다. 그 때 손목의 단말기가 반짝거리며 메시지를 표시

한다. 스마트폰과 손목 단말기 연동은 좋은데 화면 작은 건 미래 세계에서도 안 고쳐졌네.

-도착했어. 어디로 가면 되니?

-4번 출구로 오세요. 거기에 다 모였어요.

-다? 다라니 누구?

김민혁의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고 곧바로 4번 출구를 향해 인파를 거슬러 올라간다. 지하철에서 내린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오고 나서, 한적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홀로 올라오는 한 명의 남성. 인

파와 함께 움직이는 것 조차 못해 뒤로 물러나 있다 따로 올라올 정도로 소심한 성격.

‘저게 어떻게 봐서 빌런이야.’

“어? 우리 학교 선배 아니야?”

“넌 어떻게 아냐?”

“교무실에서 몇 번 봤지. 아까 부른 사람이 저 선배?”

쪼르르 따라 온 조희정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슬쩍 시선을 돌려본다.

조희정, 활발한 B급 능력자. 초능력은 각력 강화로 육체 강화 중 속도에 치중한 녀석. 이리 저리 돌아다니

는 인싸 중의 인싸이며 같은 학년 중 이 녀석을 싫어하는 녀석은 없다. 강정태가 모두의 아이돌이란 느낌

이라면, 조희정은 국민 개그맨이라는 느낌.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점심시간에 가족 이야기를 하다 떠올린 것이다. 조희정에게는 요리를 좋

아하는 남동생이 있어 가끔 도시락을 싸 준다는 이야기. 그 때는 나도 도시락이나 만들어올까? 같은 생각

을 하다 떠올리지 못한 것이지만.

이도 안 들어가는 강정태보다 김민혁을 타락시키려 시도하다 김민혁의 성격이 너무 소심해서 해결법을

찾다 떠올린 것이다. 굴라 말고 후배인 조희정을 붙여서 강정태의 질투를 유발해 봐? 같은 쓸모 없는 생

각 사이에서 떠오른 망상.

요리를 좋아해서 오빠에게 도시락을 싸 주는 사이 좋은 여동생.

이웃집에 사는 소꿉 친구인 모델 체형의 여자 반장 겸 학교의 아이돌.

어느 날 전학 온 폭력적이지만 자신에겐 적당히 어울려주는 양아치 미소녀.

거기에 김민혁이 추가된다면?

어둡고 소심한 분위기와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만 몸매는 좋은 선배.

뭔가 딱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쪽은 김민혁 선배, 일반과에서 히어로 물품 제작을 전공하고 계셔.”

“안녕하세요, 하늘이랑 같은 반 반장인 조희정입니다~”

“아, 안녕…”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김민혁의 낮을 가리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조희정은 활기차게 대화

를 이어 나간다. 반장 업무로 교무실을 오가며 교수들과 친분을 쌓는 녀석의 커뮤력이 빛을 발한다.

“제작 쪽이면 머리 많이 쓸 텐데, 대단하시네요! 1학년 실습 때 뭘 만드셨어요?”

“그, 발목 보호대를…”

“아, 그거 좋죠. 저도 뛰어다니는 입장이라 발목 접지르는 게 제일 무섭거든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벌써부터 따발따발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나와의 첫

만남에서 쇼핑과 노래방 등 반나절이 지나서야 말을 더듬지 않고 대화를 시작했던 김민혁이 10분만에 조

희정을 상대로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러면 2학기 실습 때 데이터 좀 받을 수 있을까?”

“네, 그러죠. 저는 달리기 특화라 하늘이보다 더 도움이 될 걸요?”

두 사람의 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인 서점을 향해 걸어가는 강정태의 뒤에서 두 명은 벌써 전화번

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말을 놨네. 말을 더듬고 다음 대답까지 한참 걸려도 그는 즐거

운 기색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고, 그 분위기에 김민혁의 입이 열리기 시작한다.

“저희는 참고서를 사러 왔는데 민혁 선배는 뭘 사러 오셨어요?”

“아, 나는 신간 소설 때문에. 혹시 메르나르라는 작가 알아?”

“아… 뭐 베스트 셀러 나왔다고만 들었는데. 학교 도서관에 있지 않아요?”

“판타지 소설이라고 구매 요청 거절당해서…”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은 옮겨가 김민혁이 메르나르라는 미묘한 이름의 작가의 소설 세계관을 설명하게

되었다. 18년 인생을 무능력자로 살며 양아치들에게 폭행과 성희롱을 당하다 강간 직전까지 가서 초능력

을 각성해도 질문 하나 없던 소심한 양반이, 처음 보는 이성 후배에게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열변을 토하

기 시작 한 것이다.

‘야, 미연시 같다 미연시 같다 생각했는데 내가 미연시 공략 대상일 줄 몰랐지.’

아무리 봐도 강정태 vs 김민혁의 구도가 히어로 vs 빌런이 아니라 사랑 싸움의 구도 같은데.

[작품후기]

이번주에 전공 과목 3과목 시험 보았고

월요일과 화요일이 전공 두 개 시험이 있읍니다.

주기가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시험 끝나면 바로 오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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