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89)

그녀의 방학

방학, 그 것도 여름 방학!

나이 26살먹은 고등학교 기숙사 공익 요원에게 여름 방학이란 일거리가 늘어나는 기분 나쁜 계절이었다.

작년 까지는 그게 전부. 하지만 이번 년도는 다르다. 26살의 나와 27살의 내가 다르듯이.

“다녀오셨어요?”

“어, 오늘은 안 나갔네?”

그런 상념을 하며 땀에 젖은 경비 제복의 목 칼라를 풀어 헤치며 아파트의 문을 여니 주방 쪽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애인의 귀여운 얼굴이 나를 반긴다. 벽에 가려진 저 아래는 요즘 덥다는 이유로 얇은 셔츠 한 장

만 입어서…

‘어우, 요즘 발정기도 아니고 진짜.’

육체가 강화되며 성욕도 강화된 게 아닐까. 그렇다고 저런 모습에 반응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적당히

긴 부슬부슬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엔 불 앞에서 맺어진 땀방울. 중력을 이기지

못한 그 한 방울의 땀이 또르르 새하얀 목덜미에서 노출된 어깨를 향해 내려간다. 쇄골이 보일 정도로 목

이 넓은 티셔츠는 이미 땀에 조금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에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한 숨을 내쉰다. 뛰어난 육체라 하더라도 7월의 햇볕 아래에서 육체

노동을 진행하면 어쩔 수 없이 땀이 흐른다. 그 것이 숨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더라도 요즘 날씨는 숨만 쉬

어도 땀이 흐르는 수준이니까. 신발을 발 뒤꿈치로 눌러 벗어버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이거 굴 소스 냄새 같은데, 맞아?”

“숙주 볶음이에요.”

주방으로 쏙 사라진 하늘이를 따라 들어가니 네모 납작한 프라이팬 위에서 대량의 숙주가 볶아지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옆에 쌓여 있는 차돌박이 팩. 정갈하게 말려 있는 그 모습에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고기는 아직 양념에 재우는 중이니까 대충 씻고 와요.”

나를 슬그머니 밀어내는 자그마한 손바닥. 힘 하나 주지 않은 그 연약한 손짓이지만 그저 반항하지 않고

떠밀려 욕실로 향한다. 아침에 출근하며 대충 벗어 던졌던 잠옷과 사용한 수건은 어느새 깔끔히 세탁되

고 정리되어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을 대충 벗어버리고 샤워기를 뽑아 들어 머리 끝부터 찬물을 끼얹는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

이 물에 푹 젖으며 어깨를 간질인다. 몸을 씻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물만 일단 뿌리고 나가야지.

‘길면 귀찮은데 정작 하늘이가 좋아하는 것 같고… 자르고 싶긴 한데.’

샤워 가운을 입자 늘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부분에 닿아 가운을 축축하게 적신다. 대충 여미고 주방 식탁

에 앉자 눈을 흘기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달궈진 철판 위에 차돌박이가 한가득 올라간다.

“원래대로면 숙주랑 같이 볶아야 하는데, 그러면 자리가 너무 없어서.”

“상관없어.”

“머리 좀 말리고 오지.”

식탁 위에 숙주와 차돌박이가 가득 든 그릇을 올려 놓더니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긴다. 따스한 바람

이 머리카락을 휘감고 얼굴을 찰싹 때리는 기분이 들어 눈을 잠시 찌푸리니, 느낌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다시 뽀송뽀송 하게 변한 가운이 맨 살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언제 봐도 대단하네. 내가 생각하는 흡혈귀는 영화에 나오는 그런 것밖에 없는데.”

“뭐, 밤의 귀족 같은 고귀한 이미지가 있는데 스스로 집안일을 하진 않았겠죠.”

“하긴, 늑대인간은 몰라도 뱀파이어는 맨날 귀족이더라. 백작이던가?”

“드라큘라 백작 맞을 걸요? 그런데 뱀파이어라는 말은 어디서 온 거지?”

“드라큘라가 그 뭐냐, 용? 드래곤 그거라던데.”

숙주를 한 웅큼 젓가락으로 집어 숙주와 김치로 감싸 입 안으로 집어넣는다. 혀 끝에 느껴지는 김치의 매

콤함을 굴소스 특유의 향이 밀어낸다. 차돌박이의 기름기가 혓바닥을 감싸갈 즈음에는 이미 양념은 다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고 숙주와 김치의 아삭한 식감만이 얇은 고기의 씹는 맛을 보충해준다. 아삭거리며

조금 아쉬워하는 입에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머금어 넘긴다.

“크흐으 ~ 진짜 술 안주로는 최고라니까.”

“숙주 무침은 별로인데, 숙주 볶음은 맛있죠.”

“그건 그렇지. 버섯도 버섯 볶음 같은 요리는 별로인데 샤브샤브로 먹을 땐 엄청 맛있으니까.”

김치를 다시 집어 들자 배춧잎 한 장 길게 올라와 잠시 멈칫거린다. 그 사이에 가위로 석둑 한 입 크기로

잘라주며 배시시 웃는 그. 어쩐지 뺨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멋쩍게 시선을 돌린다. 뭔가 히죽히죽, 놀

리는 기색으로 웃는 것 같아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기를 집어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안 먹여주고요?”

“뭐, 뭘 먹여줘!”

“쌈 같은 건 먹여줄 수 있지 않나? 음… 소스가 너무 흐르네요.”

숙주를 차돌박이와 쌈 무로 감싸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더니 뚝뚝 흐르는 양념장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

니 그대로 한 입에 날름 집어넣는 모습에 가슴이 크게 뛴다. 고기 기름으로 반들거리는 입술과 양념을 핥

기 위해 빼꼼 빠져나온 붉은 혀.

“그래도 둘 다 육체 강화 능력자니까, 반찬 만들 때 영양분 고려하지 않는 것도 좋네요.”

“하긴 뭐… 정말 극단적이지만 않으면 다 되니까.”

고작해야 쌈 무와 김치 혹은 차돌박이 숙주 볶음, 버섯 샤브샤브 말고는 야채를 입에 대지 않는데 건강이

유지 된다니 얼마나 효율 좋은 몸인가? 맥주와 기름진 안주와 소금기 가득한 음식을 얼마든지 먹어도 된

다는 이유로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초능력 1위였던가.

밥을 먹다 보니 대충 풀린 가운 사이로 보이는 복근. 딱히 운동은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이렇다. 초능력자

용 헬스장에서 각 잡고 운동을 했다면 이보다 더욱 우락부락 하게 변했겠지. 물론 여름에 바다로 놀러가

기 전 근육을 만들까? 라고 질문을 했다가 이보다 더 울끈불끈하면 징그럽다고 말했지만.

‘그 표정은 아무리 그래도 좀 무섭지…’

장난삼아 보디빌더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사람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근육 인형 같아서 역겹다고 평소의

느긋한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경멸하는 표정은… 내게 향한다면 조금 많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반 년도 안 되었는데… 어찌 보면 참 무섭네.’

고기 없이 숙주를 입에 넣고 맥주를 마시니 입술에 뭔가 가볍게 톡 와 닿는다. 소스를 대충 털어낸 차돌박

이. 흉한 꼴을 보일까 혀로 대충 우물거려 입 안에 남은 것을 꿀꺽 삼키고 받아먹으니 뺨을 우물거리는 모

양이 우습다고 깔깔 웃는다. 그 모습에도 가슴이 간질거리고 뺨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러고보니 방학 때 친구들이랑은 안 놀러가?”

“반장이랑 운동하고, 선배랑 쇼핑 가는 것 말고는 딱히 예정이 없는데요.”

반장과 선배. 반장은 근면 성실이란 단어가 너무 잘 어울리는 조금 딱딱한 인상의 남자애였지. 선배는 거

의 장난감 수준으로 휘둘리고 있었지만. 가정적이고 상냥한 면모 말고도 외모 또한 가냘프고 덧없어 보

이는 미소년이라 학교에서 많이 치근덕거리는 애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같은 학교로 간 건데.

“주말이 비면 수영장에 놀러 갈래요?”

“나쁘지 않네.”

학교에서의 사건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다. 애당초 2구역에서 스스로 도망쳐

나올 정도로 대담한 소년이었으니까. 능력도 개화했는데 소심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왕자님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기분이 나쁠 때에는 정말 난처할 정도로 이 쪽을 골려 먹으니까.

“그럼 이번 주말엔 같이 수영복 사러 가고, 다다음 주말에 수영장으로 가죠. 다음 주말이 근무 맞죠?”

“그래, 주말은 격주니까 다다음주가 비어.”

그 반장이란 아이도 B급으로 올라오질 않나, 선배라는 소년도 능력 등급은 아직 측정되지 않았다고 하지

만, 오싹오싹 직감이 울리는 게 B급 중에서도 중상위권은 되어 보이니.

“여자 자존심이 말이 아니네.”

“갑자기 왜요?”

“너희 말이야, 너무 우수한 거 아니야? 뭐, 나도 B급 능력자가 되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단순한 육체 강화 능력자인 나와 다르다. 이야기 속 변질된 뱀파이어에 가깝게 변해간다며 각종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하늘이. 육체를 검은 불꽃으로 휘감아 상대의 초능력을 지우고 자신은 강화하는 반

장. 자신의 그림자에서 수백 갈래의 그림자 손아귀를 꺼내 상대를 구속하고 능력을 삼켜버리는 선배.

“역시, 트레이닝 받으러 갈까?”

B급 능력과 격투 실력으로 꽤 자만하고 있었지만, 10년 어린 남자 후배들에게 제압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거 여자로서 많이 위험한 게 아닐까? 라는 고민이 들지만.

“근육 더 키우면 각방 쓸거니까요.”

딱 소리가 나도록 젓가락을 식탁에 올리며 식사를 마친 사랑스러우면서 무시무시한 애인의 협박에 그 헛

된 생각을 깔끔히 지워버렸다. 제압 당하면 뭐 어떤가. 이미 위도 사로잡힌 상태에, 말 몇마디면 바로 꼬

리를 내려야 하지 않나.

슬그머니 욕실로 들어가 '아까 대충 씻었으니까, 씻겨 줄까요?' 라고 묻는 모습에 그 어떤 여자가 반항할

수 있을까.

[작품후기]

숙주나물 무침은 입에도 안 대는데

왜 일본 라면 위의 숙주나 차돌박이 숙주볶음은 없어서 못 먹는걸까요

양념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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