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89)

약팔이

테이프 형식의 마약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보인다. 물론 현실 이야기는 아니다. 마약은커녕 담배도 못

피는 감시 받는 사회에서 무슨. 당연히 리얼 월드의 이야기.

약품이 피부나 점막에 스며들도록 붙이는 형식이다 보니 상상하기 편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런 마약이

있어서 리얼 월드 개발자가 반영해서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 그냥 잘 안 들키는 마약과 엮이면 대부분 테

이프나 파스 형식이라 아는 거지.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 판타지나 무협지가 아니면 자주 보인다.

- 저기… 납치해온 마약 제조범 때문에 꼬리가 붙었는데요.

“물건만 챙겨서 다 태우고 떠나. 기술자는 기억 지우고 지상으로 도망치게 하고.”

나는 거기까지 알면 된다. 뒤는 전문가가 해야지. 그리고 그 전문가를 내가 돈과 시간을 들여 키우지 않아

도 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수도 많았다. 후각을 강화한 굴라 둘이 작정하고 도시를

뒤지니 스무 명 조금 넘게 건질 정도로.

순도 높은 약을 만드는 녀석들은 아직 손댈 수 없는 거대 조직이나 지난번 그 가스녀의 아래에 있겠지만

잔챙이라도 스무 명이 모이면 도움이 된다. 구체적으로는 6월 초에 시작해서 6월 말에 끝날 정도로.

애당초 새로운 마약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는 마약에 불순물을 섞을 뿐인 작업이다. 그걸로 돈

을 버는 것도 아니니 기존의 조직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 최면을 건 양아치들을 사용해 학생들에게 싸게

팔고 사라지면 되니까.

그 결과물은 학교를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

크게 체감되는 일은 아니었다. 초능력자인 학생들 중 감각이 발달한 녀석들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하

고 생각할 정도. 하지만 흡혈귀의 능력으로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것.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좋은데?’

학생들의 피가 더러워지고 있었다.

흡혈귀에게 피는 가장 순수한 물질이다. 물론 흡혈귀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처녀의 피를 좋아

한다 같은 이야기가 있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니 흡혈귀에게 순수한 인간의 피는 맛있는 음식이자 음료,

술이다. 초능력이 강할수록, 정신이 뛰어나거나 영혼이 아름다운 순수한 인간일수록 피의 질은 올라간

다.

반대로, 흡혈귀의 피가 섞이면 안된다. 흡혈귀가 흡혈귀의 피를 빤다는 일은 없으니까. 인간이 소의 피인

선지나 돼지의 피를 넣은 블러드 소시지는 먹더라도 요리에 인육이나 인간의 혈액을 집어넣지 않는 것처

럼.

‘그런데… 너무 많은데? 이 학교 인성 검사는 없나?’

히어로를 목표로 하는 학교 주제에 어쩐지 싸우는 법만 하루 종일 가르친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꼴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흡혈귀의 피 냄새가 섞여 있다. 흡혈귀는 나 하나뿐이니 당연히 마약을 먹은 녀석들.

학교에 관심을 가진 적 없다 슬슬 눈을 돌려보니 가관. 쉬는 시간 답게 소란스러운 학교에 슬쩍 시선을 돌

린다.

‘뭔 놈의 영웅 학교에 이런 것들이 잔뜩 있어.’

사회를 지키는 히어로라는 이름을 달게 될 청춘이지만 글러먹기 그지없었다. 벌써 학교의 10%는 한 번

씩 사용은 해 보았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부작용 없이 능력을 올려주는 약물 따위가 있을 리 없는데.

하지만 양아치에 속하는 녀석들은 이걸 2구역에서 몰래 가져온 마약이라며 좋다고 뺨 안쪽에 붙이고 다

닌다. 그 녀석들이 이걸 사용하는 이유는 우월감. 초능력자라는 특별함과, 그 중에서도 일진이란 형태로

자신들이 잘 나간다는 우월감에 젖어 선민사상에 썩어 들어가는 녀석들.

간혹 성적에 대한 집착이 심한 녀석들은 실기 테스트때만 파스 밑에 붙이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자기합리화가 심한 녀석들. 2구역에서 넘어온 정체불명의 약품을 불법 스테로이드 정도로 안

심하며, 부작용이 없다고 되뇌이는 녀석들.

“아니, 가져오라면 가져 왔어야지, 새끼야!”

“미, 미안해… 다음 주까지 가져올…”

“펴, 평소에 날 깔봤겠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더군다나 벌써부터 귓가에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

하나는 돈을 빼앗는 양아치 여성의 목소리고, 하나는 발악하듯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당

연히 우리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옆 건물에서 굴라의 것과 비슷하게 들려오는 일종의 사념.

다른 녀석들이 피가 더러워지는 수준에서 멈췄다면 이미 두 목소리는 중독된 상황.

‘음… 남자는 쓸만 할 것 같은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선다.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나만 빼고.

몇 명의 교사가 나를 지나치지만 고작 몇 개월동안 그들은 나를 완벽히 포기했다. 교실로 들어가라고 말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 그 모습을 보니 마음 속 깊이 잠든 꼰대스러움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교사란

것들이 말이야, 으이? 이러니까 학생들 인성이 개판이지.

귓가에 울리는 양아치 여성의 사념은 사라졌지만, 남성의 울부짖음은 사라지질 않는다. 원망 섞은 독설

을 나불거리는 것을 봐선 혼잣말은 아니고 누군가를 폭행하는 것 같은데. 귀를 쫑긋 세우고 교수들의 목

소리만 조금씩 새어 나오는 복도를 걷는다.

건물 안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 것 같고. 건물의 뒤뜰 쪽인가? 구석진 곳에 있어서 양아치들이 담배 피울

때 자주 가는 곳.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귀찮아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차피 박살 난 학교 이미지.

- 개, 씨발놈아! 니가, 니가 뭔데에에에!

“개, 씨발놈아! 니가, 니가 뭔데에에에!”

전에 몇 번 봐 둔 골목으로 향하자 사념과 목소리가 겹쳐서 웅웅 머리를 울린다. 골목 가장 안 쪽에 누워있

는 몇 명의 학생들 그리고 그들이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남학생. 폭행을 진행중인 남학생이

더욱 너덜너덜한 걸 봐선 집단 폭행 중 테이프를 입에 우겨 넣었나?

“우와… 요건 좀 심했네.”

바닥을 뒹구는 여학생을 계속해서 걷어차는 남학생. 하지만 바닥을 뒹구는 여학생은 교복에 먼지가 묻은

수준이지만, 걷어차는 남학생은 찢어지고 축축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가해자로 보이는 녀

석들이 가만히 있다는 것.

“너, 넌 누구야!”

“아, 역시 하나 정도 더 있을 거라 생각했어.”

자세히 관찰하니 남학생의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찢어져 바닥을 뒹구는 학생들에게 뻗어 나가 있었다.

강정태가 전투 마법으로 재능이 있다면, 이 녀석은 저주 쪽으로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구냐니까!”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자 한 가닥의 그림자가 내게 뻗어 나온다. 지옥 마법보단 주술에 가까운 공격. 물론

저주라고 부르기엔 창피한 수준으로 미약한 공격이었다. 강정태가 무의식적으로 피워낸 불꽃이 내게 정

전기 수준의 따끔함만 선사했듯이.

“나?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 사람.”

“다가오지 마!”

그림자 촉수를 쳐내고 가까이 다가간다. 내 얼굴을 아는지 새파래져서 손을 허공에 휘젓자 몇 가닥의 촉

수가 더 날아온다. 쳐낼 필요도 없이 무시하고 다가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선명히 보이는 폭행

의 흔적.

교복의 단추 세 개는 뜯어져 없어진 상태. 구정물에 젖은 와이셔츠와 안의 티셔츠는 살갗에 달라붙어 피

부색을 보이고 있었다. 목덜미와 쇄골 아래에 살며시 보이는 멍 자국. 찢어진 소매와 그 너머로 보이는 둥

그런 화상 자국.

“폭행에 담배 빵에, 가슴 쪽을 뜯은 걸 봐선 성희롱도 했네.”

“넌 뭔데 참견이야!”

양 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지만 그 포즈 때문에 어깨가 드러났다. 멍 자국 위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파스들

과 그 파스 위에 덧붙여진 테이프. 엉망진창으로 붙인 테이프는 구겨져 잔뜩 주름이 져 있었다.

“이 테이프, 니가 붙인 거 아니지?”

스스로 붙일 수 없는 위치에 붙은 파스와 테이프였다. 대답 하나 없이 입술을 깨문 상태로 나를 노려보는

남학생. 이름을 알아내려고 명찰을 보려 했지만 명찰마저 뜯겨 없어진 상황.

“개판이네, 아주. 인상 풀어 임마, 내가 교사라도 부르겠냐? 방해할 마음도 없고.”

“그, 그런데 왜 참견인데.”

그제서야 입을 여는 녀석. 질겅질겅 씹었는지 갈라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한 방울 맺힌다. 거기서부터 흘

러나오는 달짝지근한 향기.

‘…뭐야, 강정태랑 비슷한 수준이네?’

아무 말없이 바닥을 뒹구는 양아치에게 다가가 팔뚝을 깨물었다.

“아, 아아아악!”

“뭐, 뭐하는 거야!”

전소희를 깨물 듯 장난 삼아 깨문 것이 아니다. 입 안을 가득 채우고도 밖으로 튀어나오는 핏줄기. 팔을

깨물려 비명을 지르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 입 안에 느껴지는 피 맛을 봐선 이 녀석도 C급 능

력자인데. 머릿 속으로 기억이 흘러 들어온다.

음침하다는 이유로 찍힌 남학생. 언제나와 같은 괴롭힘. 우연히 얻게 된 테이프 마약. 멍을 가려주겠다고

파스를 붙이기 위해 셔츠를 벗기고 맨 몸을 어루만지며 성희롱을 한다. 그리고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파스 위에 붙인 테이프 마약.

‘햐, 이 새끼 봐라?’

부작용이 무서우니 만만한 녀석을 단기간에 중독시켜서, 뭐가 부작용인지 알게 만든다. 중독되어서 의존

성을 띄면 교사에게 신고 당할 일도 없고, 진짜 마약이면 왕따를 미끼로 자신들은 안전히 빠져나간다. 그

런 사악한 계획을 세워 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맹점은

‘오늘이 첫 날인데, 여섯을 구속시켰네?’

이 새끼가 강정태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기 캐릭터가 같은 곳에 둘. 하나는 정의로운 반장이고, 다른 하나는 왕따를 당하던 피해 학생이다. 정의

로운 강정태는 자신을 강화시키며 보호하는 능력을 각성했고,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남을 저주하며 구속

하는 능력을 각성했다.

히어로와 빌런.

“아, 모드 설계 한번 끝내 주네. 이래서 리얼 월드를 못 끊어요.”

잡탕이 된 세상의 중심이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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