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팔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화학 공장 아래의 범죄 도시인데 마약이 없을
까. 중국에서 건너오고 일본에서 물 건너오고. 심지어 싼 값에 사려면 화학 약품 찌꺼기로 만든 불순물 그
득한 마약들도 존재했다.
애당초 현실에서도 의학 지식이 있는 양반들이 약국에서 파는 기초 의약품으로 마약을 만들다 걸리는 일
이 반년에 한 번은 있는데 리얼 월드에서 없을까. 초능력과 최첨단 과학이 더해지니 마약의 천국이라 부
를 수 있을 수준.
- 1번 실험체의 기록입니다. 전직 교수라 그런지 무슨 미식 기행처럼 써 놨는데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에서 헤메다 포근한 구름에 휩싸여 천국으로 인도되는 기분. 피부를 불태우던 저주스러운 태양이 사랑하
는 남자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는 행복감. 그 뒤로도 구구절절 써 놨네요. 금단 현상 때 극심한 허기를
주장합니다.
- 4번 실험체의 기록입니다. 평소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 자각하던 실험체인데 귓가에 속삭이던 것
들이 사라져서 행복하다고 뭘 해도 좋으니까 좀 더 달랍니다. 금단 현상일 때 스스로의 고막을 찢으려고
합니다.
‘진짜 한 명 때문에 고생 많이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렇지만.’
강정태, 강정태, 강정태. 그닥 마음에 담아둔 이름은 아니었다. 그냥 반장 부반장 소꿉친구 콤비. 무림으
로 치면 세가의 사형 사매 1, 2 수준이었고, 판타지로 치면 그냥 기사단 엑스트라 A, B였을 녀석들. 능력
도 중간, 인성도 평범. 평범에서 미남 미녀 쪽으로 살짝 올려 친 외모만 제외하면 정말 그림자 NPC와 다
를 게 없는 녀석.
소꿉친구니까 여자애를 빼앗아서 놀아볼까, 아니면 두 명을 므흣하게 이어줘 볼까. 굴라 두 명이 강정태
를 강간하면 조희정이 자살할까? 그런 생각이나 잠깐 했다가 너무 까불거리는 조희정의 모습에 있던 성
욕도 뚝 떨어졌지.
하지만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냥 옆에 있던 엑스트라 A가 세계관 최강자를 진지하게 노려볼 수 있는 괴물
이란 걸. 가장 쎈 NPC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게 잘 와 닿는 단어는 아니지만, 힘과 비례하는 괴팍한 성격에
당해본 리얼 월드의 유저들은 자다가도 발작을 일으키며 깨어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아직까지 정상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전학을 오자 마자 선배 면상을 박살내고, 무단 결석을 하며 연상의 애인과 학교에서 섹스까지
하는 씹 양아치 새끼인 나와 다르게 강정태는 모범생의 표본이다. 소희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애당초 소문을 좋아하는 발랑 까진 고삐리들이다. 남녀 애인이 몰래 창고에 들어가서 한참을 안 나오는
데 그 둘이 사이 좋게 손만 잡고 왔다고 생각하겠는가? 했네, 했어~ 라고 소문이나 나지.
깔끔하고 준수한 외모, 좋은 몸매와 단정한 몸가짐. 우수한 반장으로 학급의 일을 챙겨 주며 누구와도 잘
지내고 상냥함.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지만 소꿉 친구에게는 풀어진 모습을 보임. 거기에 선배 얼굴을 으
스러트린 문제아 전학생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미남.
잘생기고 의젓한 모범생이 더 잘 생겼지만 성격은 개 같은, 아니 그보다 더러운 양아치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학교 수업을 듣게 만드는 장면은 강정태의 인기를 더욱 더 올리기 충분했다. 왜 그런 백합류 만화
도 인기가 꽤 있는 편 아닌가.
이미 강정태는 공대 여신을 떠받드는 것 이상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애당초 이 사회는 히어로를 아이돌과 동일시하는 사회기 때문에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C급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강정태는 일종의… 고등학생 아이돌이란 뜻이었다. 실제로 반의 오타쿠 그룹들 중 만화,
게임, 아이돌 말고 히어로 오타쿠가 참 많았으니까. 성공한 오덕이 되기 위해 스스로 히어로 협회에 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녀석들.
물론 그 아이돌은 이제 곧 마약 중독자가 되겠지만.
피 하나로는 어찌 할 수 없으니 마약을 섞는다. 하지만 그것 하나로 지옥 불로 태울 수 있는 강정태를 제어
할 수 없다. 저 정도 되면 스스로를 태워 정화시킬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만들 건 오히려 몸에 좋은
영양제다.
장황하게 찬미하는 글을 써 내린 교수의 말처럼, 잘 정제된 흡혈귀의 피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닌다. 굴
라들이 느끼는 것을 인간들도 느낄 수 있게 정제하는 것이다.
한 방울 입에 대는 순간, 무능력자는 초능력자가 된다. 육체는 강화되고 병마는 사라지며 잃어버린 젊음
이 돌아온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상처받은 영혼은 치유되며 인간에서 초인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다.
부작용은 단 하나.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헤엄치지 못해 가라앉는 물고기와 날지 못하는 새의 심정은 어떨까. 좁은 관 안에 갇힌 인간은 어떤 기분
이 들까. 상상력을 빼앗긴 작가와 시력을 빼앗긴 화가는? 당연히 있었어야 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 감
각.
생겼던 초능력이 사라지며 온 몸에 무기력함이 맴돈다. 온 몸의 피부가 점차 주름지고 늘어나며 모든 관
절이 삐걱거리며 욱신거린다. 한 걸음에 올라섰던 산 정상은커녕 몇m 걷는 것 만으로 숨이 차오르고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입에 닿는 한 방울의 피. 다시 돌아오는 모든 것.
“그 때 누구였지? 발정한 놈. 25번?”
- 네, 25번입니다. 마약에 찌들어 몸도 못 가누던 양반이 무슨 힘이 나서 우리를 깨부수고 26번을 강간했
습니다.
육체적 안락감을 주는 1번 실험체의 기록. 정신적 안락갑을 주는 4번 실험체의 기록. 그리고 성욕을 느끼
게 하는 25번 실험체의 기록. 원하는 결과는 나왔다. 고작해야 30의 실험체로 결과를 뽑아 내다니. 역시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있다는 것은 편하다.
“거기 엎드려 자는 거 누구니?”
“하늘이요.”
“…그래, 좀 깨워라.”
누군가 툭툭 건드리는 감촉에 인상을 쓰고 일어났지만,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는 강정태의 모
습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비비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요즘 굴라들에게 이것 저것 시켜 먹느라 책상에 엎어
져 있었더니 교사들의 눈총이 따갑다. 물론 그게 전부지만.
칠판을 바라보며 정 자세로 필기를 하는 강정태의 옆 모습을 본다. 특별히 지루한 역사 수업이 아니면 바
른 자세로 멋진 글씨를 쓰는 걸 옆자리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악마가 튀어나오기 전까진 친구처럼
다녀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으니까.
저런 모습 때문에 더욱 인기가 있겠지. 강정태는 고지식하지 않다. 내가 선배 얼굴을 으스러트리던, 수업
시간 내내 잠을 자던 과한 참견을 하지 않으니까. 마냥 모범생이면 나를 가르치려 들겠지.
그 때문에 그나마 강정태의 말을 들어주고, 그걸 알아차린 교수들은 내 옆자리에 강정태를 배치했다. 초
능력이 없는 학교였다면 정학이나 퇴학을 당했을 수준이지만, 교수와 비등한 B급 능력자에게 그럴 깡은
없나 보다.
‘생각해보니까 이 학원 너무 대충인데.’
오감이 느껴지는 증강 현실 기기를 운동장에 km면적으로 깔아 두는 최첨단 학교인데 어째 교수 수준이
질이 낮다.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귓가에 굴라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고 예비 약쟁이
들의 신음 소리도.
※
“야 이거 봤어?”
“어, 나도 한 번 먹어 봤어. 돈 값 하더라.”
“세상에 참 대단한 사람들 많아. 그치? 어떻게 지하 도시로 도망친 낙오자 주제에 이런 걸 만들까? 그 능
력이면 협회에 붙어서 잘 먹고 잘 살겠다.”
“반대 아니야? 이런 걸 만드니까 지하 도시로 도망간 거겠지. 부작용도 없는데 협회에 있었으면 이거 만
드는 노예가 되어서 평생 일만 할 걸?”
“하긴, 지하 도시에서 이걸 찍어내면 술도 남자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텐데.”
“큭큭, 근데 이거 보면 그 불량 식품 생각나지 않냐? 먹는 테이프.”
“근데 몰래 먹기엔 좋아 보이긴 한다. 종류마다 약빨이 다른가?”
“나는 투명 테이프였고, 다른 건 박스 테이프나 흰 테이프도 있던데 약빨은 잘 모르겠다. 양이 다르니까
가격도 달라서 약빨의 차이가 있는지는… 누구 다른 놈 없나.”
“옆 반 희령이 평소에 필통은커녕 가방도 안 들고 다니다 요즘 필통에 필기구에 테이프까지 들고 다니던
데.”
속닥속닥. 한국 최고의 학교라 할 지라도 일탈하는 이는 반드시 있다.
능력에 취해 만용과 오만으로 2구역을 넘어가는 녀석들. 손에 쥐어진 ‘특별한’ 약품. 호기심으로 복용하
자 정말로 발달되는 능력, 발견되지 않는 부작용. 남들이 모르는 세상을 안다는 우월감에 비밀이란 이름
으로 조금씩 전달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세상엔 비밀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정태야, 이게 뭔지 알아?”
“뭔데?"
그 덕에 부반장의 직위를 지녔음에도 까불거리는 성격과 특유의 활발함으로 오타쿠 계열의 학생부터 초
능력을 사용하는 일진 패거리까지 고루 친한 미끼가 훌륭하게 일을 진행해 주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TS를 원하는 분이 많네요.
근데 남녀 역전에서 남자를 여자로 TS 시키면
부끄러워하는 여자니까 그냥 여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