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팔이
여름이 다가오고, 기분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 이 빌어먹을 흡혈귀. 무슨 생리하는 여자애라도 되
는 기분인데. 위대한 정복왕부터 잔혹한 선혈제, 용공이자 마왕이니 하는 존재도 결국 끼고 사는 애첩들
의 생리는 이기질 못했는데.
“어…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햇빛은 뜨겁고 실습은 귀찮다. 더군다나 상대는 이제 지옥 마법을 익숙하게 다루는 강정태. 좁은 대련 공
간은 이미 지옥불로 달궈진 지 오래. 기술에서 밀리니 파괴력보다 방어력과 지속력을 올린 강정태는 온
몸에 엷은 불길을 두르고 있었다.
‘뭐야 저건… 뭔데 한 달도 안되어서 응용을 하냐.’
피부에도 체육복도 그을림 하나 없이 온 몸을 불길로 감싼 강정태. 대응 방법이 없어 성장을 도와버리려
고 했는데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하긴 이 정도 속도는 되어야 씹사기 NPC가 되어 1억이 넘는 유저들의 원
망을 사게 되는 거겠지.
‘얘보다 뛰어난 NPC는 상상하기 힘든데. 그냥 얘 서포팅만 해 줘도 게임 클리어 아닌가.’
물론 병신 같이 미확인 데이터에 수락 눌렀다가 뾰로롱 남녀 역전 세계에 떨어진 건 기억한다. 여기가 진
짜 게임 속인지, 아니면 내가 뇌만 수집 당해서 미친 과학자한테 팔렸는지 모르지. 차원 이동일수도 있고
빙의 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뭐 어떠랴. 현실은 한 칸짜리 독방에 갇혀서 기계마냥 출근 작업 퇴근만 반복하던 사회의 톱니바
퀴였는데. 그놈의 환경 보존을 위해 인간을 양계장에 처박고,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가상 현실 기기를 무
료 보급하고.
“진짜 괜찮나 보네…”
“어, 아…”
멍하니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강정태를 바닥에 내리 박아 둔 상태. 사막전을 상정했는지 까슬까
슬한 모래 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입에서 모래를 뱉는 그 모습에 정신이 들었다. 뭔가 다가온다 싶었는데
무의식적으로 처박은 건가.
“좀 일으켜 주라…”
“아, 미안, 미안.”
힘 조절을 조금 실수했는지 움켜 잡은 강정태의 팔뚝 보호대가 으스러져 있었다. 날카롭게 찢긴 금속이
팔뚝을 파고들었나 잠시 걱정했지만 달궈져서 녹아내린 보호대는 강정태의 피부를 상하게 하지 못했다.
이제 그도 C에서 B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빠르기는 오라지게 빠르네.’
등급이란 게 그렇게 쉽게 쉽게 올라가는 게 아니다. 게임을 하는 입장의 유저로서는 레벨 업이 숨 쉬는 것
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NPC에게는 다르니까. 평생 C급일수도, 날 때부터 A일수도 있다. 결국 확률로
만들어지는 NPC들이니까. 그렇기에 레벨업이 가능할 확률과,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두 가지 희박
한 확률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지는 게 눈 앞의 강정태와 같은 사기 캐릭터.
늘 그렇듯이 찌그러진 보호구를 반납하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둘이 걷는다. 일반 학생들의 수업 내용만
강화된 청각의 끝자락에 살며시 들려오는 조용한 복도. 그리고 함께 걷는 영웅의 씨앗. 아니, 지옥 마법
쪽에 재능이 있으니 그냥 마왕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쓸모 없는 생각을 하며 냉수로 몸을 씻는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몸이지만 사막의 흙먼지가 기분이 나
빴으니. 미래 세계관은 몇 번이고 진행해 보았지만 언제나 신기하긴 하다. 가상 현실 속 가상 현실. 이러
다 끝없는 꿈 속에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도 들고.
‘그나저나 저걸 어쩐담.’
옆에서 머릿결을 정돈하는 강정태를 보았다. 오밀조밀 새겨진 근육, 숨길 생각이 없는지 가슴 어림에 새
겨진 마법진. 육망성과 여섯 문자만 존재하던 단순한 마법진은 이제 두 개의 육망성을 겹쳐 둔 모양이 되
었고 둘러싼 선은 문자의 나열로 변했다.
‘저러다가 육체 능력 B급이 되는 것 보다, 중급 마법사가 먼저 되겠는데?’
육체 능력이 먼저 오르고 지옥 마법이 나중에 오른다면 내가 쉽게 조종할 수 있다. 지옥 마법은 이름값을
하는지 상급자와 하급자를 철저하게 나누기 때문이다. 마왕조차 72계급으로 나뉘어 있듯. 하지만 강정
태는 육체의 자질보다 지옥 마법의 자질이 뛰어나다. 내가 잡아 먹힐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뭐, 뭘 그렇게 봐?”
“아니, 몸매가 더 좋아진 것 같아서.”
“어우, 무슨 아줌마 같은 이야기를.”
여러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사용할 수 있는 패는 가족, 조희정, 굴라… 김세민과 이소정은 얼굴이 팔렸으
니 안되려나.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정태를 어떻게든 쾌락의 구렁텅이에 처박는 거다. 여자
없이 살 수 없는 색남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 타락시키고, 흡혈귀가 줄 수 있는 쾌락에 미치게 해서 스스
로 복종케 하는 것. 물론 좋은 방법이 그렇듯이 가장 어려운 길이다.
노말 취향의 야한 게임이 그렇듯이, 당연히 능력의 대상은 ‘이성’ 이다. 강정태가 여자라면 그냥 덮쳐버리
면 되는 건데. 나는 게이가 아니고, 이 캐릭터는 이성을 유혹하는데 특화된 흡혈귀며, 모드는 BL이 아니
다. 동성에게 쾌락을 주는 방법은 지극히 제한적…
‘아니지, 얘는 재능만 있고 정보는 없는 상태잖아.’
“나 먼저 나간다~”
“그래, 알았어.”
수건으로 조신히 허리와 머리를 감고 샤워실 밖으로 나가는 강정태를 배웅하며, 그를 타락시킬 음모를
짠다. 리얼 월드 플레이어의 기본 소양이었다.
※
흡혈귀와 피. 이야기를 할 때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쌍이었다. 물과 물고기, 바늘과 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물 밖을 돌아다니는 폐어나 망둥어가 존재하고, 바늘과 실을 따로 사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피와
흡혈귀가 떨어지는 예시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리얼 월드의 대부분의 종족은 힘을 육체에 담는다. 무사의 단전, 마법사의 마나 서클, 드래곤 하트. 그린
스킨들의 투력과 주술 또한 육체의 문신에 담기고, 엘프와 요정의 가호 또한 세계수의 세례로 인해 육체
에 새겨진다.
하지만 흡혈귀는 육체가 없다.
“12번이랑 14번, 피를 토하며 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와 육체의 관계가 정 반대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뼈는 하루에 일정량의 피를 만든다. 흡혈귀는 그 반대. 피가 있기에 육체가 존재한
다. 피는 힘을 담은 매개체이며, 육체를 이루는 근원이고, 종족 특성과 영혼까지 담긴 정보의 덩어리였다.
- 25번, 음… 완전히 미쳤는데요. 사람이랑 짐승을 구분 못 합니다.
매혹을 담는다면 강력한 사랑의 비약이 된다. 성욕을 담는다면 발정제가 되고 원망을 담는다면 저주의
매개체가 된다. 종족 특성을 담으면 흡혈귀를 늘릴 수 있고 거기에 비율을 바꿔 독을 섞으면 구울을 만든
다.
- 7번 8번도 추가로 죽었습니다. 출혈 없이 심장이 멈춘 것 같습니다.
지옥 마법의 매개체도 혈액에 깃든 힘이고, 혈마법은 이름 그대로 피를 사용하는 마법이다. 그러니까 지
금 하는 행위 또한 내 피를 빨아내며 하는 것이고.
- 아 씨발, 어지러워서 뒤지겠네 진짜.
머리가 지끈거려 험한 소리가 나온다. 팔뚝에 박힌 주사 바늘로 내 피 같은 피, 아니 그냥 피가 줄줄 흘러
나가 수혈 팩에 담긴다. 그냥 피만 뽑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마력을 담아야 해서 빈혈기와 마력 부족으로 인
한 두통이 머리를 들쑤신다.
“아오… 느긋하게 살겠다고 말한 게 지난주인데.”
소희를 느긋히 골려 주며 1박 2일간 끈적하고 꽁냥거린지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 먹은 결심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갔다. 계획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를 고통받게 하는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흡혈귀 특
유의 서늘한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싼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답 없이 빠른데, 방학에 훅 터지면 못 따라간다.’
급으로 나누자면 강정태는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빠르게 올라오는 지옥 마법의 루키였다. 나는 머릿 속
지식으로는 최상급이며, 실제 능력으로는 중급에 막혀 있는 상황. 강정태의 재능이 너무 뛰어난 게 문제
였다.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오는 데 한 달이 안 걸렸으니, 하급에서 중급으로 가는 것 또한 한 달이면 될 것이
다. 재수가 없어 요령을 잡는다면 3주, 지식을 전해준다면 2주안에 중급으로 올라오겠지. 중급 까지는 지
식의 깨달음 없이 본능과 힘으로 올라올 수 있는 경지니까.
쉽게 말해서,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강정태는 확정적으로 나와 동급이 된다. 욕밖에 나오지 않는 속도였
다. 가끔 게임을 하면 왜 3년 5년만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대마법사가 되었다고 질투하는 NPC들이 있
는데 이해할 것 같아. 100년간 쌓아 올린 지옥 마법의 노하우를 재능 하나로 커버하다니.
- 4번, 성공한 것 같은데요.
- 1번 깨어났습니다. 광폭한 상태가 되어서 더 달라고 발작 중.
그러니까 팔자에도 없는 약제사 놀이나 하게 된 것이다. 혈액을 뽑아서 굴라에게 보낸다. 나의 지식을 담
은 것과, 독을 담은 것. 지식을 담은 혈액을 먹은 두 굴라는 독을 담은 혈액으로 마약 제조를 시도한다. 실
험체는 지하 도시에 넘쳐나니까. 더군다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도 되니 남자만 없어진다는 소문도 없
다.
“줬던 만큼 동일하게 주면서 3일간 지켜봐.”
-네, 알겠습니다.
-네… 근데 25번이 지금 26번을 덥, 치는데 놔 둡니까?
25번, 42세 남성. 26번, 17세 남성.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굴라들이 전해온 정보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상
상이 가며 이미지가 떠오른다. 대꾸하기도 귀찮아 말을 멈췄더니 두 굴라의 성적 흥분감이 전해져 온다.
미친년들… 레즈비언 야동을 보는 남자에 대한 여성의 감정이 이런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