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89)

떡상

세면대에 물을 가득 받아 냉수로 얼굴을 씻는다. 분명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수인데 어째서인지 열

기는 가라 앉지 않는다. 되려 냉수에 닿는 손 끝이 아까 소년의 몸을 어루만졌던 게 떠올라서 더욱“우와… 그냥 변태 같잖아.”

짝 소리가 나게 스스로의 뺨을 때린다. 거울 속 얼굴은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게 붉게 달아올라 있었

다. 갈 때까지 간 사이면서, 맨 손으로 등을 좀 어루만졌다고 이렇게 달아오르다니. 이러면 진짜 2D와 3D

를 구분 못하는 변태 아닌가.

죽을 다 먹었는지 이불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몸이 안 좋은

데 먹자 마자 바로 정리를 하는 건가. 문득 혼자 자취를 할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1주일 넘게 뚝배기에 방

치된 김치찌개, 취사한지 2주가 되어가는 밥과 그 대신 먹어 치운 햇반의 잔해들…

‘남자는 진짜 다르구나.’

몇 번이고 느끼는 생소한 감각. 나쁜 것은 아니다. 같은 인간인데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좋은 방향

으로 놀랄 뿐이니까. 괜히 화성인과 금성인으로 비유한 글이 수백년동안 예시로 내려오겠는가?

‘그런데 이제 뭘 하지.’

아프다는 말에 급하게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공익 요원 주제에 당일 오전에 오늘 쉰다고 주장하

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알지만 근무지의 관리자가 할머니니까 가능한 이야기. 손녀가 동거인

을 간병하겠다는데 뭘로 막겠는가. 물론 남자한테 너무 휘둘린다는 꾸중은 들었지만.

세면대 옆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빈다. 기분 좋게 피어오르는 섬유유연제의 향. 슬며시

눈을 뜨면 보이는 두 개의 칫솔. 깔끔히 정리된 세면대 옆 화장품 보관함. 그 사소한 것에서 일상의 행복

을 느낀다. 이토록 행복한데 휘둘리고 뭐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나저나 이제 뭘 하지?’

휴가는 냈으니 오늘과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문득 사귀고 난 뒤 밖에서 데이트를 해본 적 없다

는 게 떠올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픈 애를 데리고 나가긴 좀 그렇고.’

본인은 감기가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주장하지만 그래도 컨디션이 나쁜 건 사실. 능력의 부작용인지 진짜

감기인지는 몰라도 육체의 상태가 흐트러진 게 느껴진다. 이런 걸 느끼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만

뭐 어쩌겠는가.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정리를 끝내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가는 건 그러니까

같이 TV라도 볼까. 소리를 좀 죽이고 보면 되겠지. 거실의 소파로 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으니 방에서

하늘이가 이불을 챙겨 나온다.

“어, 왜?”

“누워만 있으니 심심해서.”

소파에 누워 있는 소년과, 그 소년의 배 부분에 머리를 기댄 소… 여자. 이거 꽤 흐뭇한 그림 아닌가 멍하

니 생각하고 있으니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덜미에 와 닿는다. 서늘한 손가락이 손톱을 세워 목 뒤를 쿡쿡

찌르자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앗, 차가!”

“리모콘…”

등 뒤에서 중얼거리듯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에 대꾸조차 못하고 그대로 리모콘을 건네 주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고민을 잠시 해봤지만 집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아니, 반말 때문인가. 기분 좋은

고요함을 TV에서 들려오는 유명 MC의 목소리가 산산조각 낸다.

커다란 TV액정 속에서는 여러 연예인들이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각종 게임을 진행하며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그들. 하지만 TV속 우스꽝스러운 소란과는 다르게 나는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에 좋아하던 개그 우먼이 명장면을 뽑아내도.

‘이, 이건 신호인가? 뭐지?’

서늘한 손가락이 목 뒤를 쓸어내린다. 언제나 존댓말로 상냥히 받아들여주는 새신랑 같은 면모도, 침대

위에서 피를 받아가며 쾌락을 내어주는 소악마 같은 모습과도 다른. 17살이라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요염함.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사륵 소리를 내며 희롱당하고, 불규칙하게 찔러 대는 손가락에 목덜미는 흠칫거리

며 긴장해 근육이 바짝 올라왔다. 그리고 그 위에 뿜어지는 더운 숨결.

“채널 돌려도 되죠?”

“어, 어어! 다른 거 보고 싶으면 봐.”

액정 속 가장 좋아하는 개그 우먼이 우승에 실패하며 물벼락을 맞는 것과 동시에 잠깐의 암전과 함께 채

널이 돌아간다. 그 잠깐의 암전.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조차 잡아내는 B급 히어로의 동체 시력.

등 뒤의 소년은 몸을 돌려 누워 그녀의 뒷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TV 액정 따위가 아니라.

채널이 바뀐다.

머리를 올백으로 올린 멋진 아줌마가 거칠게 차를 몰며 황야를 달린다.

다시, 채널이 바뀐다.

갑옷을 입은 히어로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부수고 있었다.

다시, 채널이 바뀐다.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몇 번이고 채널이 바뀌는 동안 등 뒤의 소년의 얼굴이 조금씩 다가온다. 이제는 큰 숨결이 아니라 그 작은

코로 들이마시는 숨결조차 느껴질 정도로. 허리 위에 올린 손으로 리모콘을 멋대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는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다.

채널이 멈췄을 때, 액정에서는 요즘 인기 있는 남배우와 여배우가 진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 영화, 인기가 좋아서 그런지 이제야 TV에서 보여주네요.”

“그, 그런가? 하긴 다른 영화보다 오래 걸리긴-“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건만, 그 순간 고개가 멋대로 돌아간다. 시야 저 너머

로 넘어가는 남배우의 키스신. 입술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감촉. 정신을 차리고 음미하기도 전에 내 뒷덜

미를 잡은 부드러운 손이 이번만큼은 억세게 내 고개를 돌린다.

“어, 음…”

“요즘 영화관을 안 가서 그런데 내일 영화라도 보러 갈래?”

“내, 일?”

“오늘은 집에서 푹 쉬고. 내일은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자.”

귓가에 속삭여오는 목소리. 평소의 존댓말이 아닌 이 친구를 대하는 듯한 나른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는

아까의 연극을 계속 하는건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든다. 아니, 그 야한 만화를 봐서 화가 난 건가? 아니면

그냥 어울려 주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화장실에 가서 인터넷 검색이라도 하고 싶었다. 존댓말을 써주던 연하의 애인이, 내가 보

던 야한 만화의 시추에이션을 보더니 그걸 흉내내면서 반말을 쓰는데 화가 난 걸까요 유혹하는 걸까요.

물론 그딴 글을 써 봐야 욕이나 잔뜩 먹고 어처구니없는 댓글이나 잔뜩 달리겠지만!

“그럴까?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있어?”

철 지난 로맨스 영화는 키스신을 너머 마지막 엔딩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떠나려는 남성. 개

찰구를 뛰어넘어와 손목을 잡아 끄는 여성. 가지고 있던 여행 가방 따위는 내팽겨치고 역무원으로부터

도망치는 유쾌한 커플. 뻔한 엔딩이 흐르고 제작자의 정보가 담긴 엔딩 크레딧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나

는 TV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뭐, 장을 봐도 좋고, 사복을 사도 좋고. 근무 서랴, 학교 다니랴 같이 밖을 돌아다닌 적 없잖아요?”

머리카락 끝만 가지고 놀던 손가락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다. 칼날도 버텨내는 피부는 소년의 손톱을

버티지 못하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헐렁한 티셔츠가 꾸깃하게 구겨지고 그 헐렁한 목덜미 사이로 서

늘한 손이 들어온다.

“그러네. 정작 밖에서 데이트 한 적은 적네.”

머리와 입이 따로 논다. 아니 몸과 정신이 따로 논다.

서늘한 손길이 근육의 결을 쓰다듬어 내린다. 성기도 성감대도 아니고 그저 등과 옆구리의 근육을 쓸어

내리는 손가락 하나에 몸이 이토록 떨려온다. 나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려 하지만 다른 손

하나가 지긋이 뺨을 누른다.

‘여, 역시 화 난건가?’

등골이 오싹하게 떨려온다. 언제나 나긋나긋한 애인을 화나게 했다는 두려움과 은근 슬쩍 밑가슴을 어루

만져지며 느껴지는 성적인 긴장감. 늘 웃는 얼굴이고 상냥하며 가정적인 소년이지만, 다른 얼굴이 있다

는 것 또한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선배를 말이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2구역에서 지낸 남자애가 몸싸움 한 번 하지 않고 몸 성히 살아남을 수 있

을 리 있나. 가출 청소년의 패거리들도 나름의 영역 다툼을 하고 서열을 나눈다는데. 하지만 그게 꺼려지

지는 않는다. 되려 흥분된다고 해야 할까.

‘진짜 변태 같네.’

뺨을 지긋이 누르던 손가락이 이걸로 만족하라는 듯 입술을 꾸욱 눌러온다. 손가락으로만 입술과 근육을

어루만지며 장난을 치다 보니 어느새 TV에서 그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다음 영화가 시작되려 하다 화면

이 꺼진다.

“그래서, 이 쪽이 더 좋았어요?”

등 뒤에서 목을 껴안는 백허그를 하며 다시 존댓말로 돌아온 그 모습에, 나는 그대로 업고 일어나 다시 침

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위에 내려놓자 양 팔을 벌리고 배시시 웃는 모습에 그 사이트 즐겨찾기를

지워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작품후기]

어제 예비군 갔던 친구랑 술마시고 일어나니가 오후 3시

운동 갔다가 저녁 먹고 글을 쓰니까 하루가 끝남

내 주말 어디갔지 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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