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89)

떡상

1학기가 끝나가며 여름이 다가오는 날씨는 언제나 쾌청하여 햇빛이 밝고 바람은 선선히 분다. 초능력자

들과 SF식 과학 기술이 정화시킨 공기는 고작 몇km 떨어진 곳에 화학 공장 단지가 있어도 깨끗하기 그

지없다. 쉽게 말해서

“저기, 하늘아 괜찮니?”

최악이야.

“으음…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 있으니 전소희가 이마를 맨손으로 쓸어내린다. 일상에 너무 익숙하지 않아 저지른

실수.

‘날이 맑아서 움직이기 귀찮았을 뿐인데.’

여름이 다가오면서 직사광선은 점차 강해졌다. 중급 흡혈귀라 햇빛에 데미지를 입지는 않지만 등교가 귀

찮아서 감기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땡땡이를 쳤더니 휴가를 내고 그녀가 집으로 와버린 상황.

‘진짜 고등학생일 때 어떻게 수업 다녔지.’

생각해보면 주 4회 대학교 강의 들으러 가는 것도 귀찮아서 자체 공강으로 F만 받지 않게 땡땡이 치고 다

녔는데 주 5회 새벽 등교는 무슨 수로 했던 걸까. 더군다나 옆에 딱 달라붙어서 간호를 하는 소희가 조금

은 귀찮다.

‘좀 쓰레기 같은 생각이긴 한데.’

강정태의 성장이 너무 빨라서, 나와 대련을 하면 나를 뛰어넘을까 걱정돼서 학교를 쉬는 건데. 선배 두 명

을 으스러트리고, 같은 반 애들이랑 대화 하나 없이 쉬는 시간에 나가서 수업 시간에 지각을 한다든가. 가

끔 2구역 경계선에 굴라들과 만나러 갔더니 목격담이 소문으로 돌아 양아치랑 어울리는 깡패 새끼라는

소문도 돌고.

학교에서 쌓아 올린 이미지는 ‘성적만 좋은 양아치’ 라는 건데, 전소희 에게는 보호해줘야 할 소년 이미지

가 너무 강렬하게 박혔는지 과잉 보호를 한다. 아니 B등급 초능력자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 하면, 누가 들

어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텐데.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감기 아니라니까요.”

그냥 침대에 처박혀서 뒹굴며 강정태를 옭아맬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이온 음료와 죽을 사온 그녀가 안

절부절 못하는 강아지처럼 옆에서 자꾸 서성이니 성가시기 그지없다. 하필 흡혈귀의 특성 때문에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스탯 저하가 약간 있는 게 문제였다. B급의 히어로 답게 내 몸이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

라는 걸 알아차려 버려서.

‘아오 씨, 흡혈귀라고 커밍아웃 할 수도 없고.’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지 축축한 수건을 들고 고민하는 전소희를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저런 멍청한 면이 귀여워서 선택한 건데. 어쩔 수 없지.

“이마 말고… 등에 땀이나 좀 닦아줄래요?”

“드, 등?”

꽤나 고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직접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지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

작한다. 알몸으로 몇 번이나 뒤엉키고, 욕실에서 주방에서 학교 창고에서 그렇게 섹스를 했으면서.

‘하긴 뭐, 다 벗은 것보단 조금 걸치는 게 더 야하긴 하지.’

두꺼운 극세사 이불 아래에서 일부로 땀을 흘리도록 육체를 제어한 뒤 헐렁한 티셔츠를 벗지 않고 들어올

린다. 땀 흘린지 1분만에 촉촉하게 젖은 등. 침대에서 그녀에게 등을 보인 상태로 돌아 앉았지만 등 뒤에

서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은 온 몸으로 느껴진다.

‘거기에 이런 종류의 만화도 많았고.’

혼자 사는 피끓는 청춘의 컴퓨터에 음란물이 하나 없을 리 있나. 그녀의 성적 취향을 파악했을 때 가장 많

은 것은 새신랑 동영상이었고, 만화는 대부분 순애쪽 작품이었다. 리얼 월드의 자극적인 것에 찌든 나 같

은 양반들은 심심해서 못 읽는 그런 작품들.

“뭐 해, 몸 식는데.”

애당초 이마에 올려 두려고 가져온 차가운 물수건이지만 그런 것 따위는 뇌리에 존재하지도 않겠지. 성

인 만화에서 나왔던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는 중이니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얼굴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긴, 동거 상대한테 자기 야동을 다 들켰는데.’

요리를 하면서 뒤에서 백허그, 학교 창고에서 하는 일은 상황만 같지만 지금 나는 만화의 대사까지 따라

하고 있으니까 알아차렸겠지.

“그, 으, 다, 닦는다?”

목소리가 삐쭉 새어 올라가 기묘한 소리를 내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엇나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물수건은 물수건이었던 마른 걸레가 되어가고 있었

다.

‘하긴 뭐, 고민한다고 뭐가 바뀌나.’

애당초 강정태는 꽤나 성실한 편이니까 갑자기 적이 되는 일은 없을 거고, 인맥이나 대충 쌓아 두면 되겠

지. 이 게임 데이터가 주문 제작용 데이터도 아니고 뭘 열심히 하려고 했을까. 그냥 전소희나 놀려먹으면

서 기둥 서방이나… 여기서는 기둥 서방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전업 주부구나.

다시 한 번 살며시 뒤를 돌아보며 비웃음을 입가에 건다. 움찔하고 몸을 떠는 게 눈에 너무 띌 정도라 과장

되게 맞춰주는 기분이 들 정도.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나 등에 차가운 수건이 닿는다.

‘그렇게 차갑지는 않네.’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수건을 쥐어서 그런지, 물기가 쫙 빠진 수건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물론 차가

운 것과는 별개로 나는 몸을 움찔 떨면서 반응했지만.

‘뭐 어때. 언제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다고.’

커튼을 쳐서 햇빛이 가려진 어둑어둑한 방. 대낮의 햇볕이 커튼 사이로 실처럼 넘어와 어두운 방과 대비

되는 새하얀 피부를 비춘다. 땀에 젖어 말려 올라간 헐렁한 티셔츠와 그 아래 보이는 말랑하면서도 단단

한 등.

“그, 으, 다, 닦는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히어로 선배들이 많이 했던 말이다. 물론 그녀들이 했던 말은 술자리에서 빌런

한테 역습을 당했을 때 느꼈다고 했지. 나처럼 이런 외설적인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벽을 바라보던 얼굴이 살며시 내 쪽으로 향한다. 날카롭던 눈매는 초승달처럼 휘었고, 무뚝뚝하던 입가

또한 삐뚜름하게 올라가 나를 비웃는다. 그 모습이 정말 좋아하던 어둠의 세계 작가의 캐릭터 같아서‘아, 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느새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그는 좀 더 셔츠를 위로 올린다. 눈 앞에서 요망하게 웃음 지었던 게 마치

신기루였다는 것처럼. 떨리는 손 끝이 닿자 하읏, 하고 야릇한 소리를 낸다. 고작해야 2D의 그림체 따위

와는 다르다.

‘아니, 다 들켰지 이건…’

어제 심심해서 읽었던 17금 만화를 떠올리니 상황이 명백해졌다. 읽고 나서 사이트 창을 닫지 않았던 것

과, 어제 하늘이가 나 다음으로 컴퓨터를 사용했던 것.

‘즈, 즐겨 찾기를 왜 해가지고!’

만화 번역 사이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 중복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휴대폰 메신저로 날아와서 오랬

만에 만화나 볼까 하다가. 초능력물도 이세계물도 읽을 대로 읽다 마지막에 읽은 게 하필 17금 아슬아슬

한 수위의 러브 코미디였다.

포인트도 많이 남았고, 읽던 뒷부분이 궁금해서 그 페이지에 즐겨 찾기를 누른 다음 그냥 컴퓨터를 종료

하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그러면 하늘이가 컴퓨터를 켰고, 인터넷을 키면 종료하지 않은 브라우저가 복

구되면서…

“후으… 시원해.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도 생각보다 좋네.”

‘완전 다 들켰잖아!’

평소에는 누나, 누나 하면서 부드러운 존댓말을 쓰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요염하기까지 한 반말. 저 대

사는 몰라도 아까 그 대사는 분명 즐겨 찾기를 해 둔 페이지의 장면이었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창피함 이상으로 가슴이 설레며 두근거린다.

“그, 차갑진 않지?”

“응, 괜찮아.”

에로틱한 장면 그 이상으로 연인답다고 느껴지니까. 손 끝에 느껴지는 남자의 단단한 살결보다, 젖어서

말려 올라간 티셔츠보다 더욱 야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 몰래 본 은근히 야한 만화를 파악해서 그걸 흉내

내는 애인의 모습.

수건이 땀에 젖은 등판을 살살 문지른다. 얇은 천 하나 너머로 몇 번이고 만져본 살결의 느낌이 전해져온

다. 이 다음에, 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수건을 놓고…

“흐음, 음흉해라.”

조금 떨리는 맨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니 다시 등 뒤를 돌아보며 그가 속삭인다. 즐겨찾기 해 둔 이후의 부

분인가? 그 부분 아직 읽질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스마트폰으로 이어서 볼 걸 그랬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움직인다. 어깨에서 날개뼈로, 날개뼈에서 등허리로. 옆구리에서 손을 멈추자

다시 뒤를 돌아보는 그. 아까의 소악마와 같은 비웃음 없이 순수하게 미소 짓는 옆얼굴.

멈칫거리는 손 위로 보드랍게 손이 겹쳐지며 끌려간다. 옆구리에서 앞의 옅은 복근으로, 그 위와 아래로.

“지금은 여기까지. 배고픈데 죽부터 먹죠.”

“아…”

사르륵 소리와 함께 말라버린 셔츠가 다시 살결을 가린다.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어 있었다. 일회용 용기에 담긴 죽을 천천히 떠먹는 모습에 정신이 돌아오는게 느껴진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쪽팔림에 바둥거리며 이불이라도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 이불은 정작 동거인의 허리

춤에 둘러져 있는 상태. 죽을 먹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그 의기양양한 미소에 온갖 창피함과 부정적인 감

각이 몰려와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냉수로 세수를 했다.

[작품후기]

침대에 누워서 세키로 영상을 보면서

칼럼을 쓰면서

스마트폰으론 만화를 보면서

소설을 쓰는 중.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평생 이렇게 침대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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