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과 벌
뒷골목에서의 일이 지나고 일주일 째. 핏발 선 눈동자는 밀린 드라마를 보느라 밤을 세웠다고 말한 강정
태는 무사히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애당초 남의 눈동자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게 깐깐한 반장 부반장 콤비라면 더욱 더. 나야 사실을 은폐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니 강정태가 속
일 대상은 가족과 조희정 밖에 없다.
“아니 무슨 드라마를 그렇게 재미있게 봤냐고~ 야한 거 몰래 본 거 아니야?”
“아 씨, 아니라고!”
흔히 볼 수 없는 강정태의 거친 반응에 화들짝 놀란 조희정이지만, 여기서 대화가 끊기면 더욱 어색할 거
란 걸 느꼈는지 되려 살살 놀리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청춘이란 건 필사적이네. 창 밖을 보며 그런 늙은
이 같은 말투를 중얼거리자 앞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다치진 않은 거야?”
“에이, 대련할 때랑 비슷한 상처 에요. 흔적도 없이 나았죠.”
도시락을 펼쳐도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상처 하나 없는 나의 뺨을 노려보는 전소희. 애당초 흡혈귀가 자기
몸 안의 혈관 제어를 못하는 게 이상하지. 피를 못 다루는 흡혈귀라, 헤엄 못 치는 물고기, 날지 못하는 새
와 다를 게 없다.
“그나저나 그런 환각이라니… 사실이라면 정말 위험한데.”
“네… 저도 그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혹시 B급 히어로의 정보에도 없나요?”
나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입 안으로 계란말이를 쑤셔 넣는다. 하기야 자기 애인이 동
성의 친구랑 싸웠다가 온 몸에 피멍이 들어왔다면 뭐라고 반응할 지 애매하긴 하다. 내가 고민할 바 아니
라서 말하긴 했지만.
‘역시 B급한테도 꽝인가.’
전소희에게 말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일단 캐릭터 상 2구역에서 도망쳐 나와 그녀에게 매우 의존하는 상
황인 게 가장 큰 이유. 두 번째로는 할머니가 높으신 분이고, 가족도 한 가락 하는 엘리트 집안 같으니까
혹시 주워들은 이야기라도 있나 기대를 했던 것이다.
“으음, 역시 계란말이는 집에서 해 먹어야 하나. 이전에 갔던 곳은 계란은 싱거운데 그 위에 케찹을 범벅
으로 해 놔서 말이야.”
“아, 요 앞에 풍년집?”
하지만 뭐, 사건의 심각성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걸 봐선 실패인가. 그래도 멍청한
얼굴로 소시지 볶음을 먹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구석이 따끈해지는 기분. 물론 이사장실에서 감시의 눈
길을 보내고 있을 걸 알기에 아랫도리로 흐르는 혈액을 다시 온 몸으로 퍼트렸다.
학생인 강정태는 자신이 환각과 환청에 당해 폭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마자 세뇌 계열 빌런부터,
영웅 고등학교의 학생이 민간인을 공격하면 일어나는 일의 여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정작 진짜
B급 히어로인 전소희는 그래, 별 일이 다 있네? 그래도 다치진 마? 같은 담백한 반응을 보이고 도시락을
열심히 비우고 있으니.
‘뭐, 귀여우니까 된 건가.’
반쯤 장난 삼아 미역국에 비엔나 소시지 케찹 볶음을 만들어 왔더니 한참을 웃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어
느 정도 가시는 기분이 든다. 이것 저것 뒤섞인 모드라 해도 당장 닥쳐오는 위협은 없으니까.
지하 도시의 구울들과 세뇌된 남창들을 이용해 보니 수상하게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화재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든다지만 우리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천사와 악마가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않았고,
엄청난 빌런이 학교를 습격하지도 않았으니 평화로운 일상.
‘천천히, 차근차근.’
조급 해져도 어쩔 수 없다. 뭔 짓을 해도 정보가 없으니까. 전소희의 단말기로 B급 정보를 얻어도 없는 정
보라면 A급 이상에게 허락된 것 들. 그리고 내가 A 등급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전소희가 A급 히어로가
되는 것이다.
전소희를 먼저 A로 올려 정보를 얻고, 그 정보와 A급 히어로의 혈액, 그녀와의 섹스로 내 등급을 더욱 끌
어 올린다. 전소희가 A급이 되려면 내가 필요하다. 그녀가 올라가야 내가 올라가고, 내가 올라가야 그녀
가 올라간다. 서로가 서로를 발판으로 삼아서. 적당한 파트너 하나 건지면 성장 속도가 엄청나다는 점이
흡혈귀의 장점 중 하나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입가에 따끈하고 촉촉한 게 와 닿는다. 어느새 전소희가 젓가락으로 소시
지를 집에 입술에 톡톡 부딪치고 있었다. 하기야 근무지에서 근무중에 10살 어린 동거남과 야외노출섹스
를 하던걸 온 가족한테 들킨 상황인데 다시 덮치기는 좀 많이 그렇겠지.
내가 지하 도시에 가 있는 동안 주말 내내 사회 봉사에 끌려가서 건물 짓는 노가다를 했다고 울상을 짓던
그녀. B급 히어로라는 점 때문에 어지간한 체벌로는 성이 안 찼는지, 고아원 공사장에 가서 중장비 대신
철근과 H빔 따위를 맨 손으로 박다 왔다고 울었다.
“진짜, 부모님에게 혼이 나더니 어리광만 늘어서.”
“아우, 쫌…”
“주말 내내 없다가 밤에 꾀죄죄한 몰골로 와서, 나는 크레인이 아니라고 엉엉 울기나 하고.”
“그만…”
입술에 닿은 소시지를 대충 씹어 넘기고 말로 그녀를 쿡쿡 찌른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무박 3일로 공
사장 중장비 취급을 받은 그녀는 창피함과 서러움에 가득 찼는지 현관에 마중 나온 내게 안겨 꺼이꺼이
울었다.
‘세상에, 그걸 소문을 내면서 일을 시키다니.’
B급 히어로가 이 일을 왜 하는 거요? 하고 공사장 인부가 물어보면 감시하던 제 어머니가 ‘10살 어린 남
학생에게 손을 대어서 벌을 주는 겁니다.’ 라고 친절히 대답해 주었 단다. 그 덕에 전소희의 어머니는 건
설 회사의 높으신 분이고, 아버지는 교수라는 것 까진 들을 수 있었지만 달래느라 고생 좀 했지.
‘좀 너무하긴 하네.’
전소희에게만 물러지는 기분이 들지만 잠시 생각을 해 보면 그녀가 왜 이리 어리광을 부리며 멘탈을 치유
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박 3일이라는 일정 보다는, 공사장에 있는 모든 인부들이 던지고 가는
농담이나 우스갯소리 때문이겠지. 3일 내내 ‘10살 어린 남자에게 손댄 파렴치한 년’이나, ‘학교 경비를
서며 남고생을 꼬신 대단한 년’ 같은 소리를 들었으니까.
“빨리 먹어요. 오후에 대련 있단 말야.”
또 다시 입가에 계란말이를 가져다 대는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폭 쉬고 받아먹었다. 남자는 커서도 애라
더니, 이 세상에선 여자가 커서도 애가 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단말기 검색 기록을 보니까 뭔가 연인을 만
들면 하고 싶은 리스트 같은 걸 검색하는 것 같던데.
시무룩하게 도시락을 비운 전소희가 돌아가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뜨끈한 햇빛과 꽉 찬 배때문에
식곤증이 미친듯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다. 오후 수업은 초능력을 이용한 대련이니까. 느릿하게 발걸
음을 옮겨 탈의실로 향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온 몸에 보호구를 덕지덕지 장착한 강정태와 내가 마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학생들도 다들 2인 1조
로 넓은 운동장에서 마주보고 있는 상황. 첫 시간에는 모르니까 상관없었지, 사이가 나쁘지 않은 같은 반
학생들과 진심으로 싸워 뼈가 부러질 정도가 되어야 끝나는 이 시간이 즐거울 리 없었다.
“사, 살살 좀 부탁해.”
“알겠어.”
과도할 정도로 보호구를 잔뜩 장비한 강정태가 긴장된 얼굴로 속삭여온다. B급과 C급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나마 그가 B급에 가까운 C급이여서 내 상대로 당첨된 것이지, 다른 녀석들을 데려다
놓으면 보호구가 있던 말던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 증거로 나는 보호구 따위 없이 찢어져도 되는 낡은 체
육복을 대여해 입었을 뿐이니까.
‘존나 지루하네.’
빌런과의 전투에 투입될 히어로 학생인 만큼, 대련은 실전처럼 이루어진다. 거리를 둔 학생들에게 각자
투명한 보호막이 씌워지고 랜덤한 필드가 발동되는 것이다. 심각하게 커다란 운동장은 이걸 위한 장비였
고.
격벽이 올라오고 바닥에 금이 가는 것이 느껴진다. 무너진 폐건물인가. 힘 조절을 하는 법을 배우는 필드
다. 히어로가 빌런 하나 잡겠다고 빌딩 세 개를 넘어뜨리면 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이 둘 인 것이니까.
“간다!”
기합을 넣고 달려들어 낮은 로우킥을 뻗어오는 강정태. 보호구를 믿고 다리를 마주 뻗는다. 물론 강정태
가 착용한 보호구다. 강철 보호구와 맨 다리가 충돌하여 풍선 수백개가 터지는 소리를 낸다.
파아앙-!
“으, 우왓!”
뻗은 다리로 강정태의 다리를 휘감는다. 인간의 무술 따위는 상관없는 초인의 싸움법. 영웅 학교에서는
격투술을 교육하지만 내게는 하등 쓸모가 없다. 나는 이미 인간을 벗어난 육체로 벌이는 싸움에 익숙하
다 못해 신물이 나니까.
한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다리를 강정태의 무릎 아래에 집어넣어 위로 휙 올린다. 불안정한 자세지
만 폭발적인 근력은 그 가벼운 몸놀림으로 강철 보호구를 잔뜩 착용한 수십kg의 사내를 휙 집어 던진다.
“무술에 집착하지 말라니까!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
허공에서 붕 떠서 당황하는 강정태에게 정권을 뻗는다. 띄우고 후려치는 가장 간단한 공격. 만약 강정태
가 무술의 형태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몸을 뒤틀어 근육의 탄성만으로 허공에서 한 번 움직여 피하고 반격
할 수 있을 텐데.
파공성을 내는 주먹이 강철 보호구를 찌그러트리며 강정태를 후려쳤고“아, 아따따 씨발!”
그와 동시에 내 손등에 시커먼 불이 옮겨 붙었다.
[작품후기]
이전화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