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과 벌
악마와의 계약. 인간이 신을 믿으며 그 대적자인 악마를 상상해냈을 때부터 떠올린 행위다. 인간의 노력
과 신의 은총으로 얻을 수 없는 부정한 힘을 얻는 대가로 영혼을 바치는 것. 물론 리얼 월드에서의 악마 계
약은 영혼 따위를 바치진 않는다.
“미친 새끼가 상도덕이 없네.”
- 네, 네 녀석은 누구냐?
“밥상 주인, 씨발놈아.”
그대로 손을 뻗어 녀석을 움켜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 일반인이었다면 손바닥 살이 다 벗
겨질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었겠는데. 평범한 소악마는 아니었다. B급에 가까운, 거기에 속성이 비슷한
흡혈귀에게 데미지를 입힐 정도면 마왕의 하수인 정도 되겠네.
- 이몸은 마계 서열…!
“알았으니까, 뒤져.”
우드득 소리와 함께 머리와 몸을 분리시켰다. 역시 소악마 계열 답게 육체 능력은 쓰레기에 가깝네. 손바
닥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머리에 몽롱하게 남아 있는 약 기운을 완벽하게 몰아내 주었다. 생각의 정리
가 필요해.
“잠깐 저 남자애 안 깨게 수면제라도 만들어서 주입해.”
목덜미에 난 이빨 구멍에 다시 한 번 김세민의 손톱이 파고들어 푸른 액체를 주입하는 걸 보고 시선을 돌
렸다. 남녀 역전에 야겜 모드라 난이도가 낮을 줄 알았더니 지옥불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네.
‘세력만 해도 몇 개야?’
첫 번째 세력은 히어로다. 히어로 협회를 필두로 사회 치안을 유지하는 국제적 거대 집단. 초능력자의 가
입은 필수기 때문에 빌런이 아닌 초능력자는 전부 여기에 몸 담고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A급과 S급이 있
다고 선포해놓고 정보를 완벽히 감췄다는 것.
두 번째는 빌런. 여기도 특이 사항으로는 현실의 IS 같은 여러 범죄 집단이 있는데 A급과 S급 빌런이 보
이질 않는다는 것. 있다고는 하는데 대외적 활동이 없다. 손목의 스마트 워치에서 홀로그램이 올라오고
초능력자가 수두룩한 세상에서 인터넷에 단 하나의 정보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여기까지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 번째는 마법사, 혹은 연금술사다. 지하 도시의 불법 창관에 몬스터 병
사를 숨겨 두는 걸 봐선 빌런에 가깝겠지. 강화석은 꽤 귀하니까… 그 창관이 나눠 담은 달걀이면 대단한
거물이고, 거기가 본진이면 별 볼일 없는 병신이다. 이 쪽은 규모가 미지수.
네 번째는 괴수 혹은 몬스터가 있냐 없냐의 문제고, 다섯 번째 세력으로는 지금 악마가 등장했다. 악마가
있으면 천사도 있을 테니까… 미치겠네 정말.
“인생이 씨발, 되는 게 없네. 그냥 좀 빨때 하나 꼽고 편히 살려고 했는데.”
히어로 메이커 같은 장난질이 아니라, 이대로 뒷세계 음모 같은 흔한 클리셰에 전소희가 휘말릴까봐 두
렵다. 평범한 B급 히어로도 아니고 일단 가족 관계가 예사롭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뭐 하는 지는 못 들었
지만 할머니는 한국 영웅 육성 기관의 대가리다. 일종의 로열 블러드에 가깝지.
“…일단 얘한테 환각제 좀 먹여봐.”
마음이 조급해 지더라도 일단 해야할 걸 차근 차근 해야겠지. 유황 냄새를 풍기며 잿가루가 된 소악마의
시체를 가져와 손에 가득 쥐었다. 지옥 마법의 숙련도는 낮지만 이렇게 악마 시체를 재물로 바치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니들은, 음… 그냥 복귀해라. 여기까지 오는 길에 CCTV 없는 거 확실하지? 아지트 갈 때도 조심하고.”
나는 고작해야 중급의 흡혈귀. 민간인도 아니고 육체 강화 능력자를 손가락 딱! 소리 내서 홀리는 게 불가
능하다. 나름 눈독을 들일 정도로 강정태의 육체적 포텐셜은 훌륭했으니까. 잠재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게
오히려 독이 된 상황.
그래서 두 명한테 강간당한 충격으로 마음에 금을 가게 만들고, 거기에 비집고 들어가 지옥 마법으로 이
녀석을 일종의 인큐버스로 바꾸려고 했었다. B급에 가까워지는 육체 강화 초능력자보단, 정신이 망가진
인큐버스가 더 조종하기 쉬우니까.
‘그래도 이 악마 새끼가 멍청해서 다행이지.’
손에 쥔 잿가루를 강정태의 가슴 부분에 바른다. 검은 잿가루에서 선홍빛 불똥이 튀며 파고들어간다. 심
장 부분에 새겨지는 기괴한 문양. 마왕의 문양을 띄려는 그 것을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죽죽 긋는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갈기발기 찢는다. 마치 불에 달군 나이프로 버터를 휘젓는 느
낌. 남의 밥상에 수저를 얹는 것도 아니고 밥상 째로 들고 도망치려는 버르장머리 없는 마왕 새끼한테 넘
겨줄 리 있나.
두 개의 뿔을 가진 흑염소의 문양이 되려는 걸 마력으로 방해해 단순한 육망성으로 바꾼다. 원 안의 육망
성, 그 안에 떨어진 나의 피 한 방울. 선홍빛 마법진은 내 핏방울이 닿자 마자 화상 흉터처럼 검게 변해 그
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정태야, 정신 차려!”
짝짝, 짜증을 조금 담아 강정태의 뺨을 후려친다. 그와 동시에 내 뺨에 피를 집중시킨다. 모세혈관이 자연
스럽게 터지고 턱에 멍이 든다. 입술도 깨물에 입가에 핏방울을 머금는다. 준비는 다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강정태는 미끼가 될 것이다.
“으, 시, 싫어어…!”
“정태야! 정신이 들어?!”
심호흡을 하고 연기를 한다. 캐릭터 메이킹이다. 정신을 잃은 친구를 걱정하는, 하지만 병원으로는 데려
갈 수 없는. 그 와중에 살짝 내 조작된 과거까지 이야기 해 주면 되겠지. 앓는 소리를 내며 깨어난 녀석을
다시 편히 눕힌다.
“머리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누워.”
“그, 그 두 명은? 그 강간범 새끼들…”
어깨를 눌러 눕히려 들어도 억지로 일어나려 든다. 그 모습에 속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고 감정을 담아 물
어본다.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정말 괜찮은 거야? 갑자기 시민을 공격하려 했다고!”
“어, 뭐? 시민이라니?”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는 눈동자는 천장과 벽을 흝어본다. 내부의 가구까지, 임시 아지트 중 제일 작은데
다 위치상 3구역의 것이니까 논리적으로 문제될 건 없다. 어깨를 강하게 붙들고 눈동자를 마주치고 노려
본다.
“아까부터 허공에 싫다느니, 도와달라느니, 계약한다고 그러고. 몰래 마약이라도 한 거야?”
“무, 무슨 소리야?! 마약이라니!”
“눈동자를 봐!”
강정태의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보여준다. 핏발이 가득 선 흰자, 한국인 답게 갈색에 가까운 연한 눈동
자는 검붉게 변한 상태. 자신의 눈을 깜짝 놀라 바라보던 녀석은 거울 너머로 내 얼굴을 봤는지 이제서야
화들짝 놀라 물어본다.
“너, 너 그 뺨… 얼굴에…”
“…니가 때린거야. 갑자기 달려들길래 붙잡아서 일단 데려왔어.”
혼란스러워하는 강정태에게 5분 만에 지어낸 사실을 줄줄히 나열한다. 원래는 오늘 속옷을 사러 가려고
조희정을 놓고 온 거다. 가는 김에 야한 속옷으로 너 좀 놀려주려 했다. 그런데 여고생 두 명을 보더니 갑
자기 공격하려 들어서 2구역 살 때 넘어와서 쓰던 아지트로 끌고 왔다.
“그, 그게 정말… 아니, 2구역 출…신?”
갑작스레 밀고 들어오는 온갖 현실에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에게 정보를 더욱 때려박는다.
“10살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봤지? 나는 2구역 출신이야… 소희 누나한테 구출되서 반한
거고. 그래서 약물에 관해서는 조금 알아.”
다시 한 번 손거울을 들이민다. 여전히 핏발 선 눈동자.
“그래도 학생들 수준에 유통되는 약 중 이렇게 부작용이 심한 건 없었어. 너 뭔가 숨기는 거 있어?”
“아니야! 그냥, 귓가에… 누가 막 속삭이고… 너랑 내가 강간당하는 걸 봤어.”
스스로 말하고 심각하게 표정이 굳어버리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한국 최고 학교에서도
수재로 꼽히는 녀석이다. 스스로 말하고 어떤 가능성을 찾아 낸 거겠지.
“설마 미등록 된 정신계 빌런이 있나? 하지만 왜 나를…?”
혼란에 가득 차서 중얼거리는 녀석을 그대로 놔 두고 뺨을 어루만졌다. 스르륵 가라 앉는 멍과 붓기. 그대
로 손을 뻗어 강정태의 목에 난 상처도 아물게 해 주었다. 짐을 챙겨 일어나니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인
다.
“일단, 집으로 가자. 니가 약쟁이가 아닌 건 믿으니까.”
“그, 그런데 왜 경찰에 가지 않고…”
“너, 소문 나잖아. 말했지? 2구역 살았다고. 2구역이던 3구역이던 경찰은 믿을 게 못 되니까.”
소문이란 단어에 다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다. 하기야 눈동자에 핏발이 선 상태로 환각을 봐서 민간인
을 공격하려 한 초능력자라니. 미성년자 감형이고 뭐고 폭행 미수로 적어도 5년은 감옥에서 살 수 있는
행위였다.
정말 공격하려 들었다면.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는 강정태. 불안감에 몰래 병원이라도 가겠지. 그의 피에는 지옥 마법의 마력이
흐르고 있고 몸에는 악마 계약의 마법진이 간략하게 새겨진 상황. 천사나 악마, 혹은 마법사가 있다면 반
응할 수 밖에 없는 먹음직스러운 미끼다.
‘뭐가 낚이려나?’
천사, 악마, 마법사. 혹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초능력자 높으신 분들. 인큐버스 강정태를 필두로 학
교 남학생들로 거대한 성매매 왕국이라도 세우려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조금 자중할 수 밖에.
[작품후기]
칼럼 쓰면서 같이 썼더니 글이 너무 개판이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