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89)

상과 벌

영웅 학교의 학생들의 등급은 다양하게 나눠져 있다. 초능력의 자질만 존재하고 등급은 받지 못한 녀석

부터 실질적 B급까지 있으니까. 물론 70%의 학생들은 초능력이 있다고 판정만 받은 녀석들이긴 하다.

실제론 없는 등급이지만 학생들끼리 D급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강정태의 경우 C급 중 상위권, 아슬아슬하게 B급이 되지 못하는 수준이다. 다른 녀석들과 비교해보면 매

우 훌륭한 인재라고 볼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저냥 관계를 유지했겠지만. 그러다 연금술사를 보고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뭐야? 나만 빼놓고 노냐?”

“남자애들끼리 놀겠다는데 뭐.”

학원물은 취미가 아니다, 같잖은 핑계다. 능력 다루는 건 내가 학교 교사들 보다 더 우위에 있다. 병신 같

은 자만심이었고. 학교 생활이 귀찮다. 전소희랑 알콩달콩 지내다 보니 녹이 슬었네.

“가자, 하늘아.”

“그래.”

내 옆에서 가방을 챙기는 이 녀석은 남녀 역전 세계의 소녀틱한 행동을 보이는 징그러운 사내놈이고, 소

꿉친구와 서로가 서로를 짝사랑하는 답답하면서 달짝지근한 연애담을 보이는 청춘이며“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12번 상점가로.”

자질이 매우 훌륭한 초능력자였다.

방과 후 둘이서만 놀러간다는 말에 들러붙는 조희정을 무뚝뚝한 말 몇 마디로 물리치는 강정태. 샤워를

할 때는 얼굴을 붉히고 그렇게 사랑하는 소녀의 표정을 지었던 남자놈이 정작 본인 앞에서는 저리 차갑게

대하다니.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는 훌륭한 초능력자였다. 오후의 대련 수업 때 나를 제외하면 이 녀석을

상대로 승리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나마 능력으로 비빌 수 있는 건 조희정뿐이지만 스피드만 상승

하는 조희정은 밸런스 좋게 강화된 강정태에게 카운터를 먹고 패배하는 게 일상.

‘너무 대충 살았어. 위협이 보이질 않는다고 병신 같이 늘어졌네.’

학교에 처음 들어올 때 나를 바라보던 시선. 그걸 생각해보면 이 학교는 일종의 보물 창고였다. 초능력자

의 세상에서 흡혈귀의 매혹을 경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최면과 관련된 능력자들은 전부 국가 기관의

엄격한 감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쪽… 맞아?”

“맞아, 골목이 좀 그렇긴 한데.”

“2구역에서 너무 가까운데…”

작게 중얼거리는 강정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통 하나 줄이지 않아 발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지

통. 날 것 그대로의 곡선을 자랑하는 와이셔츠 옆 선. 목이 답답하지도 않은 건지 끝까지 잠궈둔 단추. 정

갈히 매인 교복 넥타이와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마이 깃. 좋게 말하면 교복 모델 같은 단정한 모양새였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 하나 없는 범생이 같은 모습이었다.

“괜찮은거야?”

그런 모범생도, 짝사랑을 이뤄줄 테니 같이 쇼핑을 가자는 말에 교사들이 가지 말라는 곳까지 와버렸으

니. 얼마나 사용하기 좋은 장기말인가. 낡은 골목길을 불안하다는 듯 흘끔흘끔 쳐다보는 모습은 C급 초

능력자와 어울리지 않았다.

슬쩍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다. 불안감, 설레임, 긴장감.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청춘의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에 비춰진 두 명의 인영.

“어, 누구-“

등 뒤로부터 누군가 껴안아 들어온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 목에서부터 온 몸으로 혈관을 타

고 차가운 무언가 퍼져 나가는 게 느껴진다. 화들짝 놀라 주먹을 뻗어오는 강정태.

차라리 비명을 질렀어야지.

콘크리트 벽도 깨부수는 새하얀 주먹을 부드럽게 휘감은 손. 날카롭게 세운 손톱이 강정태의 주먹을 꼬

집는다. 휘청하고 나자빠진 그 얼굴에는 공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감촉.

“…이번에도 제대로 못하면,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2박 3일동안 가지고 놀아버린다.”

“열심히 할 테니 그건 좀…”

등 뒤에서 무섭다는 듯 이소정이 바르르 떤다. 강정태를 짊어진 김세민과, 나를 들어 올리는 이소정에게

몸을 맡기고 핏 속을 흐르는 마취제에게 반항조차 하지 않는다. 오늘은 강정태의 집에서 놀다 온다 했으

니 전소희로부터 연락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나 때문에 아는 사이니까.

“어우 씨, 배 눌린다 야. 좀 똑바로 걸어라.”

“근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나를 어깨에 들쳐 맨 상태로 묻는다. 하기야 어차피 세뇌를 할 건데 이런 연극이 왜 필요한지 궁금하겠지.

나는 부하의 궁금증 정도는 풀어주는 관대한 상관이기에 곧바로 대답해줬다.

“재밌잖아.”

세상이 깜깜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목덜미로부터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차가운 감촉에 눈을 뜬다. 낡

은 천장, 금이 가 있는 콘크리트 벽. 그리고 두 여자.

“으으읍!”

눈이 번쩍 떠진다. 낡은 소파 위에 팔 다리가 묶인 상태로 있다는 걸 자각하자 마자 근육에 힘을 준다. 평

소대로라면 등산용 레펠도 종이 찢듯 찢어발길 몸에 힘이 들어오질 않는다. 그 모습에 두 명의 여성이 낄

낄대며 말한다.

“약효 쥑이네. 팔딱거리긴 하는 데 평범한 민간인 수준으로 떨어지다니.”

“걍 애초부터 초능력자가 아닌 거 아니야?”

“학생증 보면 C급이라는데?”

나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여성이 옆의 다른 여성과 대화를 나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보니 기절한 다른

남학생이 보인다. 창백한 안색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이하늘.

“음? 야, 얘는 B인데? C만 무력화시킬 수 있는 거 아니냐?”

“돈으로 급수 위조라도 했나?”

“읍! 으읍!”

이하늘은, 한정적 B급 육체 강화였다. 점차 가슴으로 내려오는 손길이 아닌 그 사실 하나로 온 몸에 소름

이 돋는다. 흡혈. 흡혈을 하지 못하면 하늘이는 육체 강화 능력이 없고, 그런 몸에 능력자 전용 약물이 들

어갔다면…!

재갈이 물려져 있는 입은 그 사실 하나를 전하지 못했다.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몸만 멀쩡하면 괜찮을 텐

데. 남자로서 모르는 여자에게 범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코 앞에서 친구가 약물 부작용으로 죽어

가는 것은 더욱 더 무서운 일이었다.

“얘는 팔딱대니까 맘에 든다.”

“그럴 거면 약을 왜 쓰냐.”

“뭐래, 병신아. 그럼 잠든 놈 따먹을거면 딜도랑 다른 게 있냐.”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가는 두 명의 범죄자. 시야가 흐릿해지고 뺨에 뜨거운 눈물

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학교에서 이길 사람이 없다는 자만감 따위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고작해

야 목덜미에 박힌 주사 한 방으로 이토록 무력하게 범해지는데 뭐가 영웅이란 말인가.

생기 하나 없는 하늘이의 피부를 보자 가슴 속에서부터 불길보다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 오르는 게 느껴진

다. 점차 창백해지는 안색에도 불구하고 바지를 벗기고 남성의 성기를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두 명의 모

습에 역겨워 구토감 또한 솟아오른다.

- 있지, 힘이 필요해?

그때 누군가 귓가에서 속삭인다. 색기가 가득한 남성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의 순진한 속삭임

이기도 했다. 아니, 잘 들어보면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거나 묵직한 노인의 목소리 처럼도 들렸다.

- 이런 미래를 원하는 건 아니지?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새로운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무참하게 범해지는 나와 하늘. 구석에서 촬영중인

카메라. 인터넷에 퍼져 나가는 영상. 학교에 퍼지는 소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희정이의 눈동자.

‘싫어!’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사회를 지키겠다는 정의로운 사명감도, 돈을 잘 벌고 인기가 있다는 속물적인

내용도 아니었다. 그저‘나는 히어로가 될 거야!’

세상을 지키겠다고 허풍을 떠는 한 소녀의 곁에 있고 싶어서.

- 네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뭘 잘못했다고?

알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아이는 귀찮고, 딱히 모든 노인을

공경하는 것도 아니다. 되려 나이만 먹고 나잇값 못하는 걸 보면 경멸하는 쪽이니까. 규칙을 어기는 녀석

들을 깔보고 능력 없는 이들을 내려다 보며,

- 내가 힘을 줄까?

그저 옆에 있고 싶었는데.

환각은 점차 변해간다. 마약이 보여주는 환각인가? 아랫도리를 쓰다듬는 끈적한 손길. 정체 모를 액체가

닿자 따끔거리며 나의 심정과는 다르게 발기되는 성기. 쾌락에 굴복해 교성을 지르며 섹스와 약물에 미

쳐가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 더 이상은 위험한데. 아직 머리가 돌아갈 때 말해야지.

따끔하게 부어오른 나의 성기 위에 기분 나쁘게 축축한 살의 감촉이 느껴진다. 눈 앞에서 주도적으로 몇

명의 여성들과 집단 난교를 벌이는 내 모습이 나를 깔아 뭉갠 여성과 겹쳐진다. 환각이 맞나? 미래라도

보이는 거야?

‘원해! 원한다고!’

비린내 나는 미소를 지은 여성이 조금씩 몸을 아래로 내린다. 나를 희롱하며 약올리듯이. 귀두 끝에서 느

껴지던 그 축축하고 뜨거운 감촉이 점차 깊게 다가와 나는 겁을 먹고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악마라도 좋아, 뭐라도 좋으니까 도와줘!’

- 아하하하, 좋아! 계약이다!

“아니 이 씨발럼이 보고만 있으니까.”

그 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빨간 눈동자, 흉측하게 길어진 송곳니를 드러낸 하늘이의 모

습. 그 모습에 의문을 가져야 할 지, 안심해야 할 지 몰라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목덜미 깊숙하게 송곳

니가 파고든다.

‘…왜?’

“씨발놈아, 누가 남의 밥상에 멋대로 수저 올리래.”

허공에 손을 휘젓는 그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흐릿하게 변한다.

[작품후기]

A교수님이 '허허허 3월이니 과제가 없죠?' 라면서 정치 관련 영화 보고 감상평 쓰라고 과제를 땡겨주셨

습니다. B교수님이 '과제는 여유 있을때 하는게 좋겠죠?' 라면서 4월 과제를 땡겨서 내주셨습니다. C교

수님과 D교수님도.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음...

씨바알... 니들 술마시면서 다 입 맞춰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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