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살이
2구역과 3구역의 경계선. 유독성 화학 물질이 가득한 하수구에서 더욱 아래로 내려간 곳. 거대한 배관과
정화 장치의 사이에 법을 피해 몰려든 사람들은 도시를 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우습게 넘어갈 일
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디스토피아의 극한인데. 곧 아포칼립스로 넘어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수백명이 죽어도 공권력이 개입하지 않는 지하 도시. 초능력자는 히어로와 빌런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
고. 지하 도시 구석탱이에는 무슨 연금술사가 몬스터를 준비해 둔 상태. 그런데 민간 사이트는 물론이고
히어로 전용 사이트에도 정보 한 조각 없었다.
‘이러다가 우주 전함이 튀어나와서 지구를 식민지 삼고 스페이스 오페라를 시작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이렇게까지 짬뽕이 된 모드는 해본 적 없다. 왜냐하면 나는 데이터 팔이니까.
무협지 모드에서 검선이나 천마가 되어 무림 지존, 고금제일인이 되고 싶은 사람한테 +9 엑스칼리버를
쥐어 주고 사역마로 드래곤을 선물하면 좋아할까? 학원에서 알콩달콩 연애나 하고 싶은 사람의 세상에
좀비를 풀어버리면?
데이터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순정 데이터를 원한다.
왜냐하면 순정 데이터가 가장 어려운 난이도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협지에서 무공을 익혀 사용하는
데, 황제가 되어 전선을 지휘해야 하는데, 마법사가 되어 마도학의 연구를 하는 것을 시스템이 보조해 주
지 않으니까. 대부분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 2, 3개는 섞는다. 전에 말했듯 게임 시스템을 주로.
그렇기에 데이터 팔이로 먹고 살려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단일 모드를 사용해 왔다.
좀비로 인해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초능력자가 외계인과 손을 잡고 차원문을 넘어온 거대 괴수를 잡기 위
해 정령의 힘을 각성하는 게임을 누가 하겠냐고. 거기에 막 게임 시스템창이 조언도 해 주고, 랜덤 뽑기로
장비도 뽑고 우주 전함을 뽑아버리면 누가 수백만원을 주고 그 데이터를 사겠는가? 그냥 자기가 플레이
하지.
차라리 여기가 순수한 히어로 vs 빌런 세상이면 전소희를 기반으로 한반도를 정복하라 하면 할 자신이
있는데. 섞이고 섞이다 보니 뭐가 뭔지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도 지금 할 건 정해져 있지.
“물건이랑 사람이랑 챙길 거 마음대로 챙겨. 10분 뒤에 바로 뜬다.”
그 말에 후다닥 움직이는 두 명. 텔레파시 기능에 조금 익숙해졌는지 대화 하나 없이 척척 손발이 맞는다.
챙기는 게 물건이 아니라 남자라서 그렇지. 아직도 겁에 질려서 테이블에 앉은 상태로 눈치만 보는 남자
들의 목덜미를 빠르게 한 입씩 깨문다.
‘차라리 저게 효율적이긴 하겠군.’
깨물린 남자들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구울들과 섞여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긴
지하 도시에서 남자는 쓸 일이 많다. 타액을 마비나 발정제, 혹은 맹독으로만 바꿀 줄 알던 녀석들이 이제
가벼운 최면 능력까지 쓰는 건가.
마흔의 구울과, 스물 남짓한 남성들이 짐을 가득 짊어진다. 아공간 마법이나 인벤토리 같이 편리한 기능
이 없으니 전부 들고 가는 수밖에 없다. 돈이 될 수 있는 미술품과 각종 서류들을 연회장 테이블 위에 올린
다.
“음 주인님? 저거 다 두고 갑니까?”
휘황찬란한 연회장의 기다란 테이블 위. 핏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테이블 보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액
자와 서류와 조각품들. 저 서류 한 장에 억에 달하는 액수가 써 있고, 액자 하나가 십억을 넘어가는 금액
일 거다. 그러니까 아까운 거겠지. 말을 걸어온 김세민 말고 이소정도 아쉽다는 듯 시선이 계속 모인다.
주머니에 금괴 몇 개 챙겼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겠지.
“그래, 귀찮게 구는 녀석들이 없게 쥐덫 좀 놓으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그어 내린다. 몽글 몽글 쏟아지는 핏방울. 두 굴라는 물론 현금 다발만 챙긴 구울들과,
강화석을 챙긴 최면에 걸린 남성들의 시선까지 이 쪽으로 몰린다. 아니, 몰릴 수밖에 없다.
“원래 쓰던 아지트 말고 예비용으로 봐 둔거 있지? 그 쪽으로 옮겨. 원래 아지트는 내가 가서 태울 거니까
챙길 거 있으면 챙기고.”
“이곳에 오기 전에 다 챙겨 뒀습니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김세민이 편하다. 이소정은 잔머리를 굴리는 쪽의 머리지만, 김세민은 꼼꼼하니
까. 어디 하나 큰 곳 습격할 준비를 하며 만약을 대비해 아지트를 정리해 둔 건가. 베인 손바닥을 휘둘렀
다.
바닥으로 떨어졌어야 할 핏방울이 허공으로 흩뿌려진다. 고작해야 손바닥을 적실 정도의 양이 꿈틀대며
늘어난다. 사치스러운 연회장, 고풍스러운 테이블. 그 위에 올려진 각종 금은보화와 재물들. 샹들리에가
요사스럽게 빛나고 촛불이 기괴하게 일렁인다.
그 모습에 두 명이 홀린 것처럼 테이블 위의 금괴를 몇 개 더 챙기려 든다.
“정신 차려라. 너네가 홀리면 어쩌라고.”
목소리를 들려줘도 멍하니 있는 그녀들. 어느 정도 버티는지 뒷걸음질을 치지만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는
다. 내가 원하는 반응 그대로를 보여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가!
강제적으로 명령을 내린다. 마치 졸다가 걸린 이등병처럼 두 명이 후다닥 뛰쳐나가자 나머지 부하들도
따라서 우르르 몰려 나간다. 그 모습에 나도 피를 한 번 더 뿌리고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 병사가 잠든 창
고에 불을 지르기 위해.
지하 도시에서 화재는 그 무엇보다 위험하다. 아무리 유독성 증기를 정화하는 기계가 있다 하더라도 공
기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 특히 인화성 물질이 있는 하수구에 불똥이 튀면 재산 손해가 말이 되
질 않는다. 오직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건물을 짓고 인화성 물질을 건물에서 다 뜯어 놔도 화재는 막을 수
없다.
불을 끄러 온갖 잡것들이 달려올 것이고 나는 목적을 이루게 되겠지.
지하 도시의 구석. 보잘것 없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
검은 연기가 천장을 향해 올라가다 빠르게 휘감겨 어디론가 끌려간다. 비상시에서나 발동되는 공기 정화
장치. 급격하게 회전하는 그 강력한 흡입력에 골목 안에 쌓인 쓰레기 쪼가리들이 어지럽게 나뒹군다.
- 물, 물 가져와! 아니 모래라도 괜찮으니까 일단 다 가져와!
- 이쪽 동네에는 수계 C급이라도 없는 거냐!
- 미친 새꺄, 지금 여기서 싸웠다가는 우리 전부 척살당한다고!
싸우던 놈들이 싸움을 멈춘다. 총을 겨눴던 이들이 총구를 내린다. 포커 카드를 쥔 놈도 주사기를 팔뚝에
꽂던 놈도 콧구멍에 흰 가루를 들이 붓던 놈들도 후다닥 뛰쳐나와 길가의 물 양동이를 쥔다. 무법에 가까
운 도시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유일한 법률, 소방법을 위하여.
-씨발 빨리! 안 나오는 새끼들은 어차피 전부 불타 뒤질 거라고 전해! 이번주에 공장에서 인화 물질을 잔
뜩 돌렸단 말야! 지금 E-4구역 하수구에 있는 게 다 폭탄 찌꺼기라고!
잔뜩 성이 나서 외치는 여성은 열심히 즐기다 나왔는지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아래에는 지퍼가
열린 바지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의복만 보면 참 음란한 차림인데 흥분되지 않는 것은 그 외형 때문이겠
지.
근육질에 섹시한 몸매인 전소희와는 다르게 우락부락한 몸매. 여성의 몸 보다는 남성 보디빌더의 몸처럼
각진 어깨와 근육들. 그리고 그 위를 뒤덮은 지저분한 각종 상처들. 옆 건물의 외벽을 뜯어버린 그녀는 다
시 한 번 소리쳤다.
-불 끌게 없는 새끼들은 옆 건물부터 뜯어! 번지지만 않으면 끌 수 있는 크기다!
육체 강화 능력자인지 쾅쾅 소리를 내며 달려나가는 그녀의 뒤로 십 수명의 근육질 여성들이 함께한다.
콘크리트 벽을 발로 차서 부수고, 불에 탈 것 같은 내벽들을 뜯어 저 멀리 집어 던진다. 그렇게 연기가 올
라오는 건물로 진입.
- 이건 또 뭐야?
벽을 부수고 장식품을 뜯어 던지며 화재의 근원지인 창고를 천장부터 무너트려 산소를 차단시킨 근육녀
들의 집단이 건물을 헤집는다. 급한 불은 끈 상태니 이제 수고비로 챙길 걸 챙겨가겠지. 웅성거리며 건물
안을 헤집는 사람들.
- 딱 봐도 수상하니까 손대지 마, 야 희영! 말이 말 같지 않냐!
가장 먼저 들어온 근육녀의 집단 뒤로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온다. 스스로 불을 끄지 않는 조직의 아지
트.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도 챙길 건 있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하나 둘 입장한다.
- 니가 뭔데 명령질이야!
- 너 미쳤냐! 아 씨발, 쳐!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 중 일부가 홀리듯 테이블 위의 금괴와 서류를 집어 든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저택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들. 10분도 되
지 않아 아수라장이 된다.
“이하늘 학생, 지금 제가 뭘 설명했죠?”
“네, 현대 사회에서 히어로가 어째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근무하는지 설명하셨습니다.”
감았던 눈을 뜬다. 걱정스레 쳐다보는 조희정과 강정태. 계속 눈을 감고 이마를 짚으니 아픈 거라고 생각
했나? 뭐 어때. 이제 곧 수업을 들을 일도 없을 텐데. 지하도시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토벌되게 만들자.
최대한 많은 공적을 안겨준다면 전소희가 A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 학교가 공격받
을 필요가 있었다.
습격해오는 지하 도시의 빌런 연합. 인질로 잡히는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단신으로 무찌르는 B급 히어
로, 전소희.
멋진 스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