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89)

두 집 살이

2구역과 3구역의 경계선. 유독성 화학 물질이 가득한 하수구에서 더욱 아래로 내려간 곳. 거대한 배관과

정화 장치의 사이에 법을 피해 몰려든 사람들은 도시를 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우습게 넘어갈 일

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디스토피아의 극한인데. 곧 아포칼립스로 넘어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수백명이 죽어도 공권력이 개입하지 않는 지하 도시. 초능력자는 히어로와 빌런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

고. 지하 도시 구석탱이에는 무슨 연금술사가 몬스터를 준비해 둔 상태. 그런데 민간 사이트는 물론이고

히어로 전용 사이트에도 정보 한 조각 없었다.

‘이러다가 우주 전함이 튀어나와서 지구를 식민지 삼고 스페이스 오페라를 시작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이렇게까지 짬뽕이 된 모드는 해본 적 없다. 왜냐하면 나는 데이터 팔이니까.

무협지 모드에서 검선이나 천마가 되어 무림 지존, 고금제일인이 되고 싶은 사람한테 +9 엑스칼리버를

쥐어 주고 사역마로 드래곤을 선물하면 좋아할까? 학원에서 알콩달콩 연애나 하고 싶은 사람의 세상에

좀비를 풀어버리면?

데이터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순정 데이터를 원한다.

왜냐하면 순정 데이터가 가장 어려운 난이도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협지에서 무공을 익혀 사용하는

데, 황제가 되어 전선을 지휘해야 하는데, 마법사가 되어 마도학의 연구를 하는 것을 시스템이 보조해 주

지 않으니까. 대부분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 2, 3개는 섞는다. 전에 말했듯 게임 시스템을 주로.

그렇기에 데이터 팔이로 먹고 살려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단일 모드를 사용해 왔다.

좀비로 인해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초능력자가 외계인과 손을 잡고 차원문을 넘어온 거대 괴수를 잡기 위

해 정령의 힘을 각성하는 게임을 누가 하겠냐고. 거기에 막 게임 시스템창이 조언도 해 주고, 랜덤 뽑기로

장비도 뽑고 우주 전함을 뽑아버리면 누가 수백만원을 주고 그 데이터를 사겠는가? 그냥 자기가 플레이

하지.

차라리 여기가 순수한 히어로 vs 빌런 세상이면 전소희를 기반으로 한반도를 정복하라 하면 할 자신이

있는데. 섞이고 섞이다 보니 뭐가 뭔지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도 지금 할 건 정해져 있지.

“물건이랑 사람이랑 챙길 거 마음대로 챙겨. 10분 뒤에 바로 뜬다.”

그 말에 후다닥 움직이는 두 명. 텔레파시 기능에 조금 익숙해졌는지 대화 하나 없이 척척 손발이 맞는다.

챙기는 게 물건이 아니라 남자라서 그렇지. 아직도 겁에 질려서 테이블에 앉은 상태로 눈치만 보는 남자

들의 목덜미를 빠르게 한 입씩 깨문다.

‘차라리 저게 효율적이긴 하겠군.’

깨물린 남자들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구울들과 섞여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긴

지하 도시에서 남자는 쓸 일이 많다. 타액을 마비나 발정제, 혹은 맹독으로만 바꿀 줄 알던 녀석들이 이제

가벼운 최면 능력까지 쓰는 건가.

마흔의 구울과, 스물 남짓한 남성들이 짐을 가득 짊어진다. 아공간 마법이나 인벤토리 같이 편리한 기능

이 없으니 전부 들고 가는 수밖에 없다. 돈이 될 수 있는 미술품과 각종 서류들을 연회장 테이블 위에 올린

다.

“음 주인님? 저거 다 두고 갑니까?”

휘황찬란한 연회장의 기다란 테이블 위. 핏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테이블 보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액

자와 서류와 조각품들. 저 서류 한 장에 억에 달하는 액수가 써 있고, 액자 하나가 십억을 넘어가는 금액

일 거다. 그러니까 아까운 거겠지. 말을 걸어온 김세민 말고 이소정도 아쉽다는 듯 시선이 계속 모인다.

주머니에 금괴 몇 개 챙겼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겠지.

“그래, 귀찮게 구는 녀석들이 없게 쥐덫 좀 놓으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그어 내린다. 몽글 몽글 쏟아지는 핏방울. 두 굴라는 물론 현금 다발만 챙긴 구울들과,

강화석을 챙긴 최면에 걸린 남성들의 시선까지 이 쪽으로 몰린다. 아니, 몰릴 수밖에 없다.

“원래 쓰던 아지트 말고 예비용으로 봐 둔거 있지? 그 쪽으로 옮겨. 원래 아지트는 내가 가서 태울 거니까

챙길 거 있으면 챙기고.”

“이곳에 오기 전에 다 챙겨 뒀습니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김세민이 편하다. 이소정은 잔머리를 굴리는 쪽의 머리지만, 김세민은 꼼꼼하니

까. 어디 하나 큰 곳 습격할 준비를 하며 만약을 대비해 아지트를 정리해 둔 건가. 베인 손바닥을 휘둘렀

다.

바닥으로 떨어졌어야 할 핏방울이 허공으로 흩뿌려진다. 고작해야 손바닥을 적실 정도의 양이 꿈틀대며

늘어난다. 사치스러운 연회장, 고풍스러운 테이블. 그 위에 올려진 각종 금은보화와 재물들. 샹들리에가

요사스럽게 빛나고 촛불이 기괴하게 일렁인다.

그 모습에 두 명이 홀린 것처럼 테이블 위의 금괴를 몇 개 더 챙기려 든다.

“정신 차려라. 너네가 홀리면 어쩌라고.”

목소리를 들려줘도 멍하니 있는 그녀들. 어느 정도 버티는지 뒷걸음질을 치지만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는

다. 내가 원하는 반응 그대로를 보여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가!

강제적으로 명령을 내린다. 마치 졸다가 걸린 이등병처럼 두 명이 후다닥 뛰쳐나가자 나머지 부하들도

따라서 우르르 몰려 나간다. 그 모습에 나도 피를 한 번 더 뿌리고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 병사가 잠든 창

고에 불을 지르기 위해.

지하 도시에서 화재는 그 무엇보다 위험하다. 아무리 유독성 증기를 정화하는 기계가 있다 하더라도 공

기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 특히 인화성 물질이 있는 하수구에 불똥이 튀면 재산 손해가 말이 되

질 않는다. 오직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건물을 짓고 인화성 물질을 건물에서 다 뜯어 놔도 화재는 막을 수

없다.

불을 끄러 온갖 잡것들이 달려올 것이고 나는 목적을 이루게 되겠지.

지하 도시의 구석. 보잘것 없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검은 연기가 천장을 향해 올라가다 빠르게 휘감겨 어디론가 끌려간다. 비상시에서나 발동되는 공기 정화

장치. 급격하게 회전하는 그 강력한 흡입력에 골목 안에 쌓인 쓰레기 쪼가리들이 어지럽게 나뒹군다.

- 물, 물 가져와! 아니 모래라도 괜찮으니까 일단 다 가져와!

- 이쪽 동네에는 수계 C급이라도 없는 거냐!

- 미친 새꺄, 지금 여기서 싸웠다가는 우리 전부 척살당한다고!

싸우던 놈들이 싸움을 멈춘다. 총을 겨눴던 이들이 총구를 내린다. 포커 카드를 쥔 놈도 주사기를 팔뚝에

꽂던 놈도 콧구멍에 흰 가루를 들이 붓던 놈들도 후다닥 뛰쳐나와 길가의 물 양동이를 쥔다. 무법에 가까

운 도시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유일한 법률, 소방법을 위하여.

-씨발 빨리! 안 나오는 새끼들은 어차피 전부 불타 뒤질 거라고 전해! 이번주에 공장에서 인화 물질을 잔

뜩 돌렸단 말야! 지금 E-4구역 하수구에 있는 게 다 폭탄 찌꺼기라고!

잔뜩 성이 나서 외치는 여성은 열심히 즐기다 나왔는지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아래에는 지퍼가

열린 바지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의복만 보면 참 음란한 차림인데 흥분되지 않는 것은 그 외형 때문이겠

지.

근육질에 섹시한 몸매인 전소희와는 다르게 우락부락한 몸매. 여성의 몸 보다는 남성 보디빌더의 몸처럼

각진 어깨와 근육들. 그리고 그 위를 뒤덮은 지저분한 각종 상처들. 옆 건물의 외벽을 뜯어버린 그녀는 다

시 한 번 소리쳤다.

-불 끌게 없는 새끼들은 옆 건물부터 뜯어! 번지지만 않으면 끌 수 있는 크기다!

육체 강화 능력자인지 쾅쾅 소리를 내며 달려나가는 그녀의 뒤로 십 수명의 근육질 여성들이 함께한다.

콘크리트 벽을 발로 차서 부수고, 불에 탈 것 같은 내벽들을 뜯어 저 멀리 집어 던진다. 그렇게 연기가 올

라오는 건물로 진입.

- 이건 또 뭐야?

벽을 부수고 장식품을 뜯어 던지며 화재의 근원지인 창고를 천장부터 무너트려 산소를 차단시킨 근육녀

들의 집단이 건물을 헤집는다. 급한 불은 끈 상태니 이제 수고비로 챙길 걸 챙겨가겠지. 웅성거리며 건물

안을 헤집는 사람들.

- 딱 봐도 수상하니까 손대지 마, 야 희영! 말이 말 같지 않냐!

가장 먼저 들어온 근육녀의 집단 뒤로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온다. 스스로 불을 끄지 않는 조직의 아지

트.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도 챙길 건 있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하나 둘 입장한다.

- 니가 뭔데 명령질이야!

- 너 미쳤냐! 아 씨발, 쳐!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 중 일부가 홀리듯 테이블 위의 금괴와 서류를 집어 든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저택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들. 10분도 되

지 않아 아수라장이 된다.

“이하늘 학생, 지금 제가 뭘 설명했죠?”

“네, 현대 사회에서 히어로가 어째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근무하는지 설명하셨습니다.”

감았던 눈을 뜬다. 걱정스레 쳐다보는 조희정과 강정태. 계속 눈을 감고 이마를 짚으니 아픈 거라고 생각

했나? 뭐 어때. 이제 곧 수업을 들을 일도 없을 텐데. 지하도시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토벌되게 만들자.

최대한 많은 공적을 안겨준다면 전소희가 A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이 학교가 공격받

을 필요가 있었다.

습격해오는 지하 도시의 빌런 연합. 인질로 잡히는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단신으로 무찌르는 B급 히어

로, 전소희.

멋진 스토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