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89)

아카데미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들. 곱게 늙었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노파가 인상

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한 젊은 여성. 구도만 보면 사고를 친 부하 직원을 혼내는 사장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아니 근무지 변경 신청은 제대로 밟았다니까요, 할머니.”

“이 무식한 새끼야!”

평소의 그녀만을 아는 학생들이 본다면 화들짝 놀라 까무러칠 카랑카랑한 목소리. 앙상하게 주름진 손이

명패를 집었다 내려놓는다. 그녀의 육체 능력을 생각한다면 이걸 손녀에게 던져봐야 오히려 속만 터질

거다.

“설명을 해 줘요! 왜 그러는 건데요.”

가슴 속에서 불길이 들끓는다는 표현이 뭔지 온 몸으로 느낀 그녀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10년은 더 늙었

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에 차는 것 없는 손녀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생각이 짧다니. 아니, 남자한테 푹

빠져서 이런 걸지도 모른다.

“이, 이 생각 없는 육시럴놈아. 이사장 손녀가 공익 근무지를 지 할매 있는 곳으로 정하면, 사람들이 뭐라

고 손가락질하겠냐!”

그녀의 자그마한 불찰이었다. 첫 날 보여준 충격적인 폭력 장면에 그 소년에게 집중하느라 자신의 아둔

한 손녀가 어떤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는지 눈치 채지 못한. 그래도 멍하니 시간은 잘 보내니 얌전히 처박

혀 있을 줄 알았건만.

“할머니한테 부탁한 것도 아니고 내가 조건 다 채워서 지원한 건데.”

“사람들이 그렇게 진실을 확인해서 손가락질을 안 했다면 정치를 왜 하고 언론이 왜 있겠어!”

후우, 거친 숨을 내쉰 그녀가 애써 호흡을 가다듬는다. 괜사리 손에 힘이 들어가 만년필 펜촉만 상하고 잉

크통만 엎어졌다. 아끼는 책상도 아끼는 만년필도 전부 상해버렸다. 들끓는 분노를 겨우 잠재운 그녀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구겨진 서류를 치우고, 잉크로 못 알아보는 것을 따로 모아둔다. 잉크병의 잉크를 다시 채워 책상 위를 말

끔하게 정리하는 동안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손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입을 연다면

손에 든 잉크병이 날아올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나보다.

이 멍청하고 눈치 없는 손녀는 자신이 B급 히어로라는 자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체육인의 길을 걸어서

그런지 스스로를 그냥 몸 좀 튼튼한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겸손하고, 나쁘게 말하면

제 주제를 모른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부족한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 소년이나 꽉 붙잡아라. 절대 놓치지 말고. 크게 될 녀석이다.”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이하늘이란 소년이 자신의 손녀의 집에 오지 않고 그대로 2구역 지하 도시에서

지내며 B급 빌런이 되었더라면 아마 3구역까지 마수를 뻗치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수십년을

굴러먹으며 온갖 인간 군상을 봐 온 그녀는 확신이 있었다.

“알았어?! 절대 놓치지 마라. 너 같은 멍청한 녀석을 그렇게 잘 내조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

“아니… 왜 여기서 내 연애사업 이야기로 빠져요?”

영문도 모르고 혼만 나다 이제는 제 연애 사정을 건드리니 억울하다는 듯 입이 삐죽 나오는 모습에 답답

함이 느껴진다. 능력이 뛰어나서 오히려 멍청한 년.

손녀는 체육인의 길을 걷다 육체 강화 능력자가 된 케이스다. 거기 까지만 놓고 보면 희귀하지는 않다. 하

지만 초기 각성 등급이 B라는 점이 더해지면 매우 희귀하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생겨난 어마어마한 육체

능력. 문고리가 으스러지고 엘리베이터 버튼이 박살이 나며 발 한번 구르면 콘크리트가 깨져 나가는 수

준의 통제할 수 없는 괴력.

‘지가 뛰어나다고 남도 뛰어난 줄 알아.’

능력을 각성하기 전의 그녀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냥 저냥 지내다 국대 후보에 이름이나 올리고 재능

있는 사람들의 발판이 되어 사라질. 동네 체육관이나 차려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 평범한 여성.

하지만 시작부터 B급 능력을 각성한 뒤로 모든 게 바뀌었다.

한 걸음 내딛으면 수십m를 뛰어오르는데 달리다 넘어지지를 않는다. 손아귀에 힘을 주면 강철도 우그러

트리는데 라면 끓이겠다고 날계란을 잘도 쥔다. 길 가다 사람에게 치일까 어깨에 힘만 줘도 상대방의 뼈

가 박살 날 수 있는데 툭툭 밀쳐내며 피해 없이 다닌다.

그녀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괴력을 자유자재로 섬세히 다루는 재능이. 만약 B급 히어로가 되지 않았더라면, 하다 못해 C급 히어로로

시작했다면 그걸 눈치 채지 못했겠지. 아니, 지금도 입이 댓발만큼 튀어나온 이 멍청한 손녀는 눈치 채지

못했다. 부 활동에서 제가 평범했다고 지금도 자신이 평범한 B급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C급 히어로가 B급으로 각성해서, 혹은 자연 각성자가 B급 히어로가 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사회와의

격리다.

딱밤으로 화물 트럭을 몇 십m 날려버릴 수 있는

손에서 뿜어낸 화염으로 63빌딩을 일격에 소각시킬 수 있는

대학로에서 버스킹 한 번 해서 수백명을 정신조종 할 수 있는게 B급 히어로. 그런 괴물을 최소한의 조치

도 없이 사회에 방치한다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사가 매일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손녀는 그런 조치가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애도 평범하다고 생각하겠지. 눈치는 먹고 뒤지려 해도 없는 아둔한 년. 10년간 단련한

신체와 경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재능으로 이뤄낸 자신의 경지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년. 그리고 17살

소년이 자신의 그 높디 높은 경지를 똑같이 따라하는데 그것 또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병신 같은 년.

“너는 그 남자애 놓치면 아주 쫓겨날 줄 알아! 알겠어?! 저어기 북쪽 올라가서 개마고원 근무 서게 만들어

버리기 전에 꼭 붙잡아!”

“아 씨,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튀어나온 주둥이를 넣지도 않은 손녀가 자신의 학교 경비 제복을 입고 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전희민은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 천재라는 족속들은 교육자와 맞지를 않아.

싸늘하다. 시선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힌다. 이 대사가 아니었나? 고전 만화와 고전 영화를 보다 뇌리

에 강하게 남은 명대사를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히익 소리를 내

며 눈을 내리 까는 몇 명의 학생들. 그 날이 후로 계속 저런 모습이다.

“안녕 하늘아.”

“왔어?”

복도에서 눈을 내리 깔고 길을 비켜주는 남학생을 지나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명만이 반겨준다. 반장

인 강정태와 부반장인 조희정. 식당에서의 유혈사태 이후 어째서인지 처벌받지 않은 나에게 말을 거는

건 저 둘이 전부였다.

‘아 좋다.’

물론 나는 그 점이 매우 좋았다. 조희정은 말이 좀 많은 편이었지만 내가 궁금해하는 걸 나불나불 전부 알

려주는 편이었고, 강정태는 내가 해야 하는 서류 작업 같은 필수적인 행정사항을 정확하게 지시해줬으니

까.

더욱 좋은 점은 전소희가 학교로 와서 좀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점일까. 경비원 겸 체육 교사 보조로

들어온 그녀는 꽤 빠르게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나쁜 쪽은 아니었다.

B급 히어로의 괴력으로 학생 서너 명이 옮길 짐은커녕 인부를 불러야 할 설비 교체도 혼자 몇 분이면 해

결되니까. 붙박이 장이나 학생 캐비닛 등 거대한 물건을 등에 업고 8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그녀는 일종

의 학교 명물이 되었다.

“소희 아줌마는 저기 별관에 있던데.”

“아줌마, 인가.”

“뭐, 군 복무중이니 아줌마 아닌가. 아줌마라고 부르니까 너도 곧 군대 온다고 막 뭐라 하던데.”

그 말에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누군가 창틀에 매달린 게 보인다. 등에 TV를 업고 있는 전소희.

그 모습에 스마트폰을 엄지로 따다닥 누른다. 그 모습에 조희정이 다시 말을 걸어온다.

“강정도 그렇고 너도 남자애 치고 타자가 되게 느리다.”

내가 직접 타자를 쳐서 문자를 보낼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모바일 타자는 조금 느린 편. 그래도 오탈자 없이

정확히 적은 문자가 발송된다. 수신인은 당연히 전소희.

-점심 시간에 봐요.

학교에서는 학교에서 하는 맛이 있지 않겠는가. 저 멀리 문자를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에 손을 살짝 흔들

어준다. 내가 본다면, 그녀도 볼 수 있겠지.

아까 전보다 열심히 짐을 옮기는 전소희의 모습에서 시선을 책상 단말기로 옮긴다. 최첨단 PC가 홀로그

램 터치 패드와 함께 붙어 있는 거대한 책상. 구석에 강정태가 무뚝뚝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글

씨체로 붙여준 시간표가 보인다. 다음 교시, 한국사.

앞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귓가에 마력을 두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꿉친구 콤비도 깔끔히 귀를 막고 고개

를 끄덕인다. 나머지 학생들의 안색이 푸르딩딩해지고, 몇 명은 포기했는지 자세를 바로잡고 숙면을 취

할 준비를 한다.

오후에 힘을 쓰려면 지금 자 둬야지.

그런데 왜 중세 유럽부터 미래 SF까지 역사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다 지루하게 할까.

[작품후기]

중간 수업 교수님이 수업 첫날이라고 해방시켜줬더니

공강이 세시간 반 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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