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몽과 악몽
주말의 아침이 나를 괴롭힌다. 기분 나쁘게 맑은 하늘은 햇빛을 여과 없이 내리 쬐고 산들바람이 땀을 미약하게 식혀주는 날씨.
지구 인구 150억, 한반도 인구 3억에 서울 특별시 크기의 하수구 지하 도시가 있는 디스토피아 SF 세계관 치고 날이 너무 맑았다.
초능력 덕분에.
‘초능력 대단하네.’
이쪽 모드의 초능력은 등장한지 300년이 넘었는데 정말 대충 분류해 놓은 상태다.
왜냐하면 분류 할 방법이 없으니까.
육체 강화의 경우 전소희처럼 모든 육체 능력이 상승하는 사람이 있고,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만 강화되거나 뇌가 강화되어 컴퓨터처럼 빠른 계산을 하거나.
심지어 면역력만 초인이 되는 사람이 있어 육체 강화 계열인데 의약품 개발 파트로 빠지는 사람도 있었다.
하도 다양하게 발동하다 보니 분류를 포기한 것.
그렇기에 내가 파고들기 더 편해졌다.
흡혈을 통한 일시적 육체 강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만 보여줘도 C급 히어로 딱지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능력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지만… 우스꽝스러운 소리다.
‘발을 굴러서 호수를 만드는 몸으로도 갓난애기 안고 얼러줬는데.’
힘 조절을 못했더라면 이미 초인의 육체로 섹스파티를 할 때 민간인 여자들 다 찌부러져서 죽었을테니까.
마법 등 잡기술을 다 빼고 보더라도 나를 이길 수 있는 C급 히어로는 없다.
나름 100년을 굴러온 경험이 있는데.
“안녕하세요. 좋은 고기 좀 있나요?”
“그래, 오늘도 왔구나. 오늘은 삼겹살보다 목살이 더 좋은데 가져가서 수육 해먹으렴. 기름기가 좀 있어서 퍽퍽하진 않을거야.”
학생지구 상점가에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반겨준다.
대부분 인스턴트나 외식으로 식사를 때우는 여고생 기숙사쪽에 매주 신선한 식품을 찾는 남고생이 등장하자 얼굴을 외워버린 듯 하다.
목살과 덤으로 쥐어지는 월계수잎을 장바구니에 담고 옆 가게로 향한다.
“생선? 구이용보단 찌개용이 좋은데 이번주는 해물탕 어떠냐. 소주는 취향이 아니래?”
“식빵 자투리로 러스크를 구웠는데 가져가서 맛 좀 보렴. 어유, 돈은 무슨.”
“요즘 남자애들 사이에서 아보카도가 유행이라기에 들여왔는데, 하나 먹어보고 맛 있으면 사가렴.”
신기한 기분이었다. 황제로서 신민이 바치는 조공도, 연예인으로서 팬이 바치는 선물도 아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호의로 다가오는 사람들. 이래서 반년에 한 번은 자연 경관을 그저 조용히 여행하는 잔잔한 데이터가 인기 데이터 랭킹 1위를 먹는구나.
맨날 전쟁이나 테러나 하다 쉬려고 붙잡은 연예인 데이터는 술 마시고 한 내기 때문에 인류 멸망물로 바뀌었었지.
생각해보면 여지껏 팔아 치운 데이터 중 정상적인 데이터가 하나 없다.
물론 대부분은 조금만 짜증나면 들이박아버리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상점가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산책을 핑계삼아 3구역 경계선의 산책로를 걷는다.
학생을 위한 공간이라고 예쁘장하게 꾸며진 인공 하천 아래에는 거대한 하수구 도시가 있었다.
그 아래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동질감.
‘오늘도 열 일… 안 하네?’
마치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서 있는 것 처럼 뜨거운 열기 섞인 감각이 나를 휩쓴다.
태생이 날라리였던 이소정은 평범한 고등학생 주제에 굴라가 되자 마자 남자를 강간하는 것에 거부감 없이 날뛰었는데
이제는 그 순진하던 김세민까지 합류한 것이 느껴진다.
이래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를 보내지 말라는 건가.
잠시 길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남들이 보면 바람 쐬며 쉬는 남학생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사역마 컨트롤.
늘리라는 구울은 늘리지도 않고 남자들만 납치해 하렘궁을 차린 병신년들에게 약간의 훈계를 주는 것이다.
전투 횟수가 20번을 넘어갔는데 구울이 5마리밖에 없다니.
범죄자 여성을 굴라가 살려줬을 리 없으니 전부 남자만 습격했다는 소리니까.
버프 담은 핏방울까지 보내줬는데 그걸 정력제로 사용하고 자빠졌네.
물론 너무 나대면 수사관에게 덜미를 잡히니까 적당한 규모의 세력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적당한 규모를 남자로만 채워서 문제지. 적어도 전소희가 박살낸 50마리의 구울은 다시 만들어야 할것 아닌가.
귓가에 서글픈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내 버프로 모든 능력치가 올라간 상황인데 거기에 면역력만 지워버렸다.
스스로 분비하는 독성 체액에 고통스럽게 비명지르는 걸 느끼다 다시 버프를 돌려준다.
일 좀 해, 씨발년들아 제발.
화들짝 놀라 움직이는 그녀들로부터 감각을 끊은 다음 다시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여고 근처라 그런지 남학생은 거의 없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여학생마다 내게 시선을 보낸다.
교복도 아니고 평범한 사복 차림으로 장을 봐서 돌아가는 모습에.
학원가에서 기숙사로 흘러가는 여고생의 무리를 뚫고 공무원 기숙사로 향한다.
C급 히어로가 넷, B급 히어로가 하나. B급 히어로는 당연히 전소희고 C급 하나는 윗집 힐러, 나머지 셋은 옆 동에 산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니까 답답하네. 빌어먹을 초능력 수사관들.’
C급 히어로가 10% 이상. 대충 18%였나 19%였나. B급 히어로가 1%. 그리고 A와 S는 국가 기밀로서 민간인에게 통계를 알려주지 않음.
1%라는 숫자는 매우 적어 보이지만, 한반도에 인구가 3억이라는 걸 생각하면 생각보단 많다. 3백만명은 있다는 소리니까.
그렇기에 빌런들의 초능력을 이용한 범죄도 넘쳐나고, 그를 수사하는 초능력 경찰도 넘쳐난다.
사물의 기억을 읽는 탐정부터 미래의 일부분을 보는 경찰이라니.
만약 그런 존재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하수구 지하 도시를 이미 점령 했을 거다.
‘…생각해보면 이 구울 되게 쓸모 없네.’
발차기 한 번으로 구울 50마리를 박살내는게 B급이었다.
근데 그 B급이 300만명이 있다고?
무쌍 세계관이나 전쟁물이나 실컷 해온 나에게는 이런 파워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게임 모드는 익숙하지가 않다.
물론 남녀 역전도 안 익숙하고, 한 명이랑 알콩달콩 하는 것도 안 익숙하지.
‘그냥 없앨까? 수천마리를 갈아 넣어도 A급은 안 될 것 같은데. 차라리 B급 빌런을 굴라로 만들어서 소희가 소탕하게 해야 하나.’
계획을 짜는 건 반쯤 습관이었다. 일관적인 데이터가 더 잘팔리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자본주의의 노예 같은데.
현실에서는 노예처럼 살긴 했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집에 들어오자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던 전소희가 반갑게 인사를 해 온다.
“어, 왔어? 무거울텐데 배달 시키지.”
“그때 봐 놓고서… 뭘 무거워요.”
흐트러진 가벼운 티셔츠 너머로 커다란 가슴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내가 하도 주무르니까 이게 좋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브래지어를 아예 하지 않는 그녀.
일반인이라면 가슴이 처질까 두려워 하겠지만 그녀는 B급 히어로다.
고작해야 가슴이 스스로의 무게를 못 버티진 않는다. 누워도 위로 볼록 솟아있는 탄탄함을 자랑하니까.
“식탁에 핸드폰이랑 신분증 있어. 핸드폰은 그냥 최신으로 샀고, 신분증은 간이로 나온 거주민 확인증이야.”
그녀가 소파에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이름은 언제 알려줄거야?”
“글쎄요~”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았는데 신분증을 구해왔다… 이건가.
고작해야 고등학교 기숙사 경비 공익이?
역시 그녀는 뭔가 숨기는게 있는 것 같았다.
장바구니를 식탁에 놓고 핸드폰을 챙겨 그녀에게 등을 기대고 앉자 등 뒤에서 슬며시 껴안는다.
“이름은 왜 안 알려주는거야?”
‘귀찮아서 그래, 귀찮아서.’
그녀가 내게 익숙해 지고 나서는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몇 번이고 물어온다.
물론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데이터 팔이로 살아온 직업병이라 할지 휴유증이라 할지.
‘현실의 이름을 쓰기는 좀 그렇고, 게임마다 이름 바꾸기는 귀찮고.’
현실에서는 한반도에 사니 한국 이름을 가진게 당연하다. 문제는 리얼 월드.
무림에 갈 때도 있고 고대 시대로 가서 인디언이 될 때도 있고, 판타지 중세에 떨어져 미들 네임만 세 개를 가진 적도 있었다.
그 뒤로 굳어진 관습.
“이름, 새로 만들건데 예쁜걸로 지어주시던가요.”
“뭐? 이름을 새로… 만들, 어도 상관 없긴 하구나?”
그녀의 품에 안겨 휴대폰 설정을 하며 만지작 거리고 있으니 시선이 슬그머니 셔츠 틈사이로 향하는게 느껴진다.
이름은 이름이고, 성욕은 성욕인가. 27년 모태쏠로 처녀의 원한은 깊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지 그녀는 슬그머니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간단한 이유로 아랫도리가 솟아오르는 걸 생각해보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나?
“그래서, 원래 이름은 뭔데?”
“몰라요. 새로 지어줘요.”
슬금슬금 손바닥이 어깨를 타고 목덜미로 기어와 가슴을 어루만진다.
이쪽 세계 남자놈들 가슴 성감이 발달 되어 있던 말던 나는 발달되지 않았다.
유두를 만지작 거리면 조금 거슬리는 수준.
판판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대로 휴대폰을 조작한다.
“이름, 이름… 입학 전 까지 지어주면 되지?”
“작명소 가서 돈 내고 살 생각 말고 지어줘요.”
내 마지막 말에 그녀의 손바닥이 멈춘다. 참 파악하기 쉬운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