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9)

음몽과 악몽

오늘도 마찬가지다. 벌써 세… 몇 번 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몽롱하다.

창 밖에서는 기괴할 정도로 붉게 보이는 달이 떴고, 그 달빛을 맞으며 침대 위에는 새하얀 피부의 소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좋은 밤이죠?”

“아, 왜 또… 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울먹거리는 꼴 사나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저 소년을 안다.

바로 아래층 B급 히어로의 동거인. 장을 봐 오는 모습을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을 마주한 게 전부인, 정말로 얼굴만 아는 사이.

평범한 날이었다. 혈기 넘치는 여학생들 무릎이나 고쳐주는 게 전부인 평화로운 3구역의 보건소 공익.

1구역 공익은 빌런이랑 만나는 일이 잦다고 하니 그녀는 이 지루한 3구역이 마음에 들었다.

음악적 취향이 화끈하다고 해서 일상이 화끈하게 폭파되는 걸 바라지는 않으니까.

“괜찮아요, 이리로 와요.”

시간이 늦어 빨리 내리려고 엘리베이터 문에 딱 붙어 있다가 실수로 밀칠 뻔한 소년.

살풋 웃으며 괜찮다고 빠르게 비켜주며 마주친 눈 때문에 잠시 멍하니 있다 빠르게 달려 근무지로 향했다.

거기 까지면 이웃집과 좋은 인연을 쌓았다고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자아, 오늘도 피곤했죠? 편히 쉬어요.”

팡팡, 침대를 두드리는 저 모습. 지쳤다 지쳤다 농담으로만 말한 건데 정말 쌓이긴 쌓였나 싶은 기분이 든다.

또 이런 꿈을 꾸는 게 무서워 이번 주말에 다른 구역까지 가서 홍등가를 다녀왔는데 소용이 없다.

“네 네, 벗길게요…”

아니, 되려 비교가 되니 더욱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차피 꿈이니까 따위의 생각으로 성욕이 막 솟아오르진 않았다.

되려 꿈에서까지 이래야 하는가 자괴감이 든다.

그런 생각도 잠시지만.

홀린 듯 나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소년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벗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이 살갗을 스치며 옷을 사락사락 벗겨낸다. 이내 우리는 둘 다 알몸이 되어 침대 위에 있게 된다.

침대에 엎드리는 나와, 내 등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올라타는 소년.

어깨에 느껴지는 소년의 손도, 등허리와 엉덩이에 느껴지는 소년의 엉덩이와…

“많이 쌓이셨나 보네요… 다른 남자도 찾아가신 걸 보면.”

소년의 뜨거운 살기둥도 너무나도 생생하다. 마치 꿈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이건 꿈이다. 몇 번이고 꾼 꿈.

온 정신이 소년이 나를 짓누르며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압박감에 쏠릴 때 소년의 입술이 내 귓가로 다가온다.

“푹 쉬세요, 푹. 잠들고 잠들고 잠들어서, 깊이 깊숙히 잠들어서.”

속닥이는 소리. 기분 좋게 피부가 마찰하는 소리.

가만히 있는 나의 욕망을 풀어주듯 내 등 뒤에서 홀로 움직이며 마찰되는 이불의 소리. 다시 속삭이는 소리.

“자아, 몸에 힘 더 빼고… 괜찮아요, 다 괜찮아.”

기이할 정도의 쾌감이 머리와 아랫배에서 시작되어 온 몸을 휘감는다. 소년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차 웅웅 울려 퍼진다.

눈꺼풀에 힘을 주지만 시야가 흐릿해진다.

알 수 있는 것은 내 등뒤에 올라탄 소년이 뒤에서부터 자신의 허리를 올려 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린다는 것뿐.

뱃 속이 갑작스럽게 뜨거워지고 시야가 완전히 검게 변한다. 불쾌한 쾌감이 가득한 꿈의 끝.

“… 어우 씨, 땀 난 것 좀 봐.”

그게 기억의 끝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능력을 온 몸에 두른다.

어젯밤 정사의 흔적 따위 없이 그저 불쾌한 식은땀으로 축축한 옷과 침대.

애당초 꿈에서는 늘 보름달이지만 퇴근할 때 본 달은 초승달이었다.

“… 아오, 또 마주치면 쪽팔린데.”

온 몸이 달궈지는 쾌감은 둘째 치고, 이웃 사촌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꿈 속에서 질펀하게 놀아나는 것 자체가 여성으로서 자괴감이 든다.

사춘기 여중생도 아니고 무슨 성욕이란 말인가?

홍등가에서 찐하게 놀아나도 풀리지 않고 꿈으로만 풀리는 성욕이라니.

누군가 알게 되면 당장 자살할지도 모른다.

애당초 좋아하는 남자애를 상상하며 야한 꿈을 꾸는 건 만화나 소설 같은 곳에서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옷 갈아 입는 남학생의 방에 모르고 들어간 여자애가 코피를 흘린다던가.

반쯤은 현실적인 표현이었더니 웃을 수 없는 상황.

물린 어깨를 확인하기 위해 잠옷 상의를 벗는다.

역시나 깨물려 뜯긴 상처는커녕 모기 물린 자국도 없이 매끈한 어깨와 팔.

그 호리호리하 팔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그 이름도 아직 모르는 소년은 B급 육체 강화 히어로랑 살지.

확실히 건강미 넘치는 게 남자에게 더 인기가 좋을 것 같다.

더군다나 바로 옆 2구역과 연결된 하수도에 관한 찝찝한 이야기도 돌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찝찝한 몸을 미지근한 물로 씻어내는 그녀였다.

물 찰팍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온다.

흡혈귀의 시야는 그게 꽤나 곱상하게 생긴 남자라는 걸 알려준다.

키와 얼굴을 봐서는 학생은 아니고 20대 후반 정도.

“도, 도망쳐!”

“우와, 여기서 남 걱정을?”

꽤나 신선한 반응이었다. 이제껏 만난 90%는 인간 쓰레기였고, 9%는 무기력한 피해자였으니까.

도망치면서 되려 나를 걱정하는 건 1%도 되지 않는 적은 수.

그나저나 참 거대한 하수구였다.

역한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괜찮아요, 자아, 가만히 있어.”

차차착, 차차착 발소리라 보기엔 조금 기묘할 정도로 빠른 물 튀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거대한 하수구에 점차 울려 퍼지며 크게 들려올수록 내 어깨를 붙잡은 남성의 눈동자가 커진다.

어깨를 밀고, 손을 잡아 끌려 들지만 이제 중급에 가까운 흡혈귀의 육체는 민간인이 밀어낼 수준이 아니었다.

“왜 버티는 거야, 들이 온다니까! 너도 소문 들었을 거 아니야! 빨리 가야해!”

“소문… 생각보다 퍼지는 게 느리네?”

어깨를 잡은 손을 마주 잡는다. 내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바둥거리지만 벗어나지 못한다.

그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본다. 높이가 3m는 되어 보이는 높다란 천장, 버스 한 대는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물길.

구울들이 네 다리로 뛰어다닐 수 있는 걸 봐서 수심이 깊지는 않지만… 충분히 넓었다.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을 정도로.

“아, 오는 게 느리네 진짜.”

나 아니였으면 도망쳤잖아. 그렇게 중얼거리자 사색이 된 남자가 그대로 주저 않는다.

퍼져 나가는 지린내, 김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노란 물 웅덩이.

“아 씨, 드럽게 진짜. 착해서 봐준 줄 알아요.”

어지간해서는 남자 피 안 먹었는데. 집에 그 좋은 B급 히어로 미녀가 있는데 뭣 때문에 남자 피를 빨아야하는가.

피를 빨며 시선을 내리자 오줌에 젖은 바지가 불룩 솟아오르는 게 보인다.

크기가 어마어마하네.

“… 야, 너 이거 일부로 놔줬냐? 너만 먹으려고?”

찰박이는 소리가 멈추고 등장하는 것은 굴라 이소정. 김세민의 룸메이트였던 금발 날라리였다.

룸메이트를 애도하겠다며 2구역으로 넘어가는 걸 낚아채 친구와 같은 꼴로 만들어줬다.

어느새 불룩 솟아 바지를 밀치며 움찔거리는 남자를 휙 밀쳐버리자, 좋다고 들쳐 업고 하수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뭐… 저 꼴이면 아프지는 않겠지.’

굴라의 체액은 독성을 띈다. 손톱 밑에 독액샘이 있는 건 둘째 치고, 이빨로 깨물어 침이 묻거나 싸우다 피가 튀어도 독에 당한다는 소리다.

물론, 떡치려고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시면 거기도 약한 독성이 있어서 아프다.

그 것을 알아내기 위해 몇 명의 소년들이 당했지.

“니들은 뭘 눈치 보냐, 빨리 잡아.”

명령을 내릴 상위 굴라가 지 좋다고 남정네 하나 들쳐 업고 사라지자, 그 뒤에서 무수히 많은 붉은 눈동자들이 껌뻑껌뻑 눈만 굴리고 있었다.

답답한 새끼들. 굴라가 아닌 진짜 하급 구울들은 언데드의 특성 답게 뇌까지 썩어 있다는 기분이 든다.

지금도 이소정이 ‘남자를 공격하는 척해라’ 라는 명령을 내리고 갔는데,

남자 중 하나가 사라지니까 명령이 취소된 줄 알고 눈만 꿈뻑 대고 있는 상황.

체감상 2주 전에 1주일에 1억씩 받는 경호진들을 부리고 다녔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저 멍청함이 짜증만 난다.

이쁜 여자애가 그러면 귀엽다는 기분이라도 들지.

머리털 듬성 듬성 빠진 언데드 새끼들이 멍청한 짓을 하면 짜증밖에 나지 않는다.

양 팔을 벌리고 나를 녀석들의 손에 강제로 쥐어 준다.

‘슬슬 올 때가... 왔나.’

팡- 팡- 하수구 저 멀리서부터 바람 터지는 소리가 난다.

나름 화학물질 찌꺼기가 지나가는 곳이라 환풍 시스템 따위 없는데.

흡혈귀의 육체로 인지할 수 없는 저 먼 곳, 무언가 미친듯이 달려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야, 지금 오는 여자 공격해라, 꺄아아앙아악!”

목청을 가다듬고 비명을 지른다.

저 너머로부터 이소정의 신음소리와 남자 비명소리가 나는데 괜히 거기로 갔다가 애꿎은 애들 머리나 박살나지.

그런 생각을 하며 구울들에게 사지를 잡혀 들어 올려진다.

“이, 개새끼들아아아아아아!”

그 직후, 유독물질의 아지랑이와 느릿하게 흐르던 끈적한 액체가 박살이 나 사라진다.

고작해야 인간의 발길질 한 번에 하수구의 일부와 흐르던 유독 물질과 나를 둘러싼 구울들이 바스라진 가루가 되어 하수구 저 편에 처박힌다.

나만 빼고.

“괘, 괜찮지? 안 다쳤지?”

울먹거리며 나를 내려다 보는 시선. 등과 엉덩이를 붙잡아 공주님 안기를 해 준 그 품이 무척이나 든든하다.

일격에 박살낸 최하급 구울이 50. 양은 적지만 조금씩 기숙사 쪽으로 보내면 될 것이다.

“병원은… 안 가도 되요, 알았죠… 병원은 안…”

유독성 아지랑이로 인해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있는 소년은 파리한 안색으로 기절하기 일보 직전.

‘너도 당해봐라.’

휙 하고, 혈마법을 응용해 머리로 가는 혈액을 잠시 멈춘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것은 막았다.

괜히 장례식 치룰라.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엄청난 바람 소리에 묻혀버리는 걸 느꼈다.

‘아 씨, 이렇게 빨리 달리면 일반인은 목 꺾이는데.’

뭐, 그녀가 그런 걸 생각할 상황은 아닌 것 같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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