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89)

히어로의 자택

좋은 남자 만나야 한다.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그냥 착한 남자 찾아라.

가정적인 남자가 최고다.

그녀의 운동부 선배들은 대부분 여초스러운 감상에 찌들어 있었다.

모계 사회의 표본이 뭔지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하지만 그녀는 요 근래 선배들을 찾아가 술이라도 사 드리고 싶을 정도로 그녀들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 때는 남자는 멋진 게 최고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초능력자 기초 훈련 기관에 들어갔을 때까지 계속되어 왔는데.

“식사 준비되었어요. 오늘은 맥주 금지.”

살풋 웃으며 앞치마 차림에 벙어리 장갑을 끼고 뚝배기를 옮겨오는 그의 모습에 애가 탄다.

저 정도는 내가 맨 손으로 옮길 수 있는데. 저러다 흘려서 그 맑은 피부에 흉이라도 지면 어쩌지.

그런 걱정으로 몇 번 빼앗아 옮겨주려 했지만, 앉아 있으라는 잔소리와 구박을 들은 뒤로는 식탁에서 얌전히 기다릴 뿐이었다.

분주하게 오가며 요리를 하는 어린 남자의 뒷모습.

‘이래서 결혼하는구나.’

요즘 남성들의 미투 운동이니, 남녀 평등이니 하며 귀찮게 구는 소수의 인종들도 있고 비혼주의로 돌아서는 많은 사람들을 봐 왔었다.

그녀는 B급 히어로니 서른 넘어 좋은 선 자리에 나가 적당히 나이 차고 결혼할 줄 알았는데.

‘진짜… 이래서 결혼하는 거야.’

늘 냉동식품이 그릇 없이 올라오던 식탁 위에는,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유리 그릇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뚝배기를 마지막으로 차려지는 저녁 밥상.

늘 비닐봉지에 담긴 상태로 젓가락으로 대충 찢어 먹던 마님집 배추 김치는 정갈하게 한 입 크기로 썰려 반찬 그릇 위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 간장 종지에는 충동구매로 구매했다 귀찮아서 먹지 않던 명란젓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마요네즈와 버무려진 상태.

“그, 반찬이 이런데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

치즈가 찐덕하게 흘러나오는 계란 말이, 그녀의 입맛에 맞게 조금 불어버린 당면이 듬뿍 들어간 달짝지근한 불고기.

달고 짠 반찬만 먹으면 안 된다며 준비된 두부 계란전.

그 간단하면서도 정성과 애정이 듬뿍 들어간 식단을 보며 멋쩍게 웃자, 혀를 차면서도 냉동실에서 미리 식혀 둔 맥주를 꺼내 오는 소년.

“어휴 진짜, 육체 강화 히어로만 아니었어도.”

타박하는 말투와 다르게 미리 식혀 둔 유리잔이 가슴을 찡 하게 울린다.

벌써 몇 번이고 세뇌라도 당한 듯 중얼거리게 되는 말.

이래서 결혼하는구나.

이래서 가족이 필요하구나.

문득 부모님을 뵈러 갈까 고민이 들지만 10살 어린 학생을 덮쳤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어 계란말이와 맥주를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다.

어린애 입맛 같은 그녀의 입을 적당히 자극하는 달콤 짭쪼름한 반찬들과 목이 아릴 정도로 시원한 맥주.

마치 새신랑처럼 맞은편에 앉아 작은 입술로 오물거리며 먹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 깊은 곳이 뜨겁게 달궈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화목한 가정이고, 이게 신혼 생활이다. 내가 인생 승리자다, 남친 자랑하던 씹쉐끼덜아.

인생을 살면서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이 시간을 고를 것이다.

비록 학생 중 하나가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죽은 학생은 이름밖에 모르고, 월급이 깎이고 욕 좀 먹었지만 집에서 이토록 행복한데.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일종의 경험치 포션이었다. 남성의 성욕을 지닌 여성이라, 얼마나 좋은가.

여자의 성욕은 어차피 무한하고, 남자의 정력은 흡혈로 커버가 된다.

꼴리면 박고 꼴리면 찔러 넣고. 뒷골목 노숙자보다 젊은 학생의 피가, 젊은 학생의 피 보다 운동 좀 해본 범죄자가,

그리고 그들 보다 C급 빌런이 훨씬 양질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정도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B급 육체 강화 히어로의 혈액은 내게 있어 최고의 경험치 포션이었다.

회복력도 어마어마하니 식사만 잘 챙겨줘도 된다.

심지어 명란 마요나 치즈 계란말이 같이 대충 만든 음식 이어도 몸이 꿀떡꿀떡 받아들여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까지 한다.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나의 애정을 갈구하던 여성은 많았다.

물론 리얼 월드의 이야기다.

나는 정복 군주였고, 학원의 최고 인기인이었으며, 월드 스타였고 황제이자 무림최강이나 소드마스터나 마탑주 등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플레이어였다.

다양한 여성이 꼬이기 위해서는 권력과 금력이나 무력 셋 중 하나가 최고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언제나 플레이어를 따랐다. 이건 내 데이터만 그런 게 아니었다.

데이터 팔이를 하려면 그 데이터는 조오오온나게 특별해야 한다.

그 짠돌이 새끼들이 고작 2GB 자위용 데이터를 위해 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박아버릴 정도로.

그리고 나는 그 특별한 데이터를 파는 새끼 중 가장 유명한 새끼였다.

고전적으로 가면 참으로 많은 여성이 있었다. 너무 많아서 기억도 못할 정도로. 망국의 공주, 만 해도 열명이 넘는다.

내가 부숴버린 제국과 왕국이 오십을 넘으니까.

왜?

정복자로 성공하는 것은 남자의 본성을 화끈하게 긁어주니까.

뭐 나라를 잃고 반란자에게 제압당한 왕비와 공주들은 전부 달랐다.

허영심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랑이를 벌리고 아양을 떨고.

정조를 지킨다고 자결하고. 겁을 먹어서 인형처럼 가만히 있고.

아버지의 남편의 복수라고 독 들고 왔다가 병사들에게 돌림 당해서 미쳐버리고.

나는 대부분 정복자나 혁명의 영웅, 지배자나 우상의 위치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팔아먹었다.

신경 쓸게 많아서 대가리 터지는 군웅할거의 시대는 내가 클리어 하고, 데이터 사간 놈들은 돈 내고 주지육림으로 꿀 빨고.

그러니까 지금 이 플레이는 내게 있어서 일종의 신세계였다.

충성을 바치는 여기사나 신앙을 위해 나를 수호하는 전투 수녀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다녀올 게, 집 잘 보고, 모르는 사람 올 일 절대로 없으니까 문 열어주지 말고. 히어로 단지라고 잡상인들이 한 건 물겠다고 자주 돌아다니니까. 알겠지?”

경비복을 입고 나서는 그 모습에 옷 매무새를 다듬어준다. 넥타이 매는 법 따위는 몰라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정도.

인터넷에 검색해서 연습이라도 해 둘까, 그런 생각도 든다.

살짝 입에 뺨을 맞춰주니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간다.

초인의 능력까지 사용했는지 문이 닫히기도 전에 복도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이 공을 쫓아가는 커다란 개 같다는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아 씨바, 요거 재밌네?”

흡혈 한 번에 백 명 처먹어도 오르지 않던 능력이 올랐다.

매혹 능력도 생겼고, 죽인 시체로 구울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염력 밖에 없던 능력은 기초 혈마법과 흑마법까지 깨우친 상황. 고작해여 겅험치 포션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기똥찬 능력.

고전 게임 중에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있다고 들었다.

VR 게임 기기에 출시되자 마자 리얼월드 게시판에서는 프린세스 메이커 데이터는 안 파냐고 물어보는 새끼들이 폭증했는데.

물론 리얼 월드 게시판인 만큼 좋은 소리는 못 듣고 다 쫓겨났다.

“육성물도 꽤 할만 한데.”

영지 경영은 머리가 아파서 부하들에게 맡겼었다. 떡치고 흡혈하고 매혹 걸고 해서 호감도나 사랑 100찍은 애들로.

그렇기에 내가 즐겨온 메인 컨텐츠는 대부분 전투.

그 쪽으로 재능이 꽤 있어 게시판 1위도 찍고 PVP 우승도 하고 거기서 홍보했다가 운영자한테 1주일 벤 먹고 씨발.

그러니까 무슨 말을 위해서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했냐면.

“저거 S급까지 키워볼까.”

1회용 경험치 포션을, 히어로 메이커로 변경할 마음이 충분히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죽였다.

도시락 전해주러 가서 학생들 앞에서 알콩달콩 염장이나 질러볼까 하는데, 괜히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뭐 어차피 죽었어야 할 년인데.’

나 아니었으면 뒷골목에서 아저씨 셋한테 역강간 당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1주일 삶을 연장시켜주고 좋은 경험시켜주면 된 거지. 그런 논리로 김세민의 피를 전부 빨고, 그녀의 시체를 2구역 슬럼가에 던져 놓았다.

아무리 이 세상이 히어로를 사회에 자연스럽게 합류시키기 위해 공익으로 쓴다지만, 여학생 기숙사에 B급 히어로를 셋이나 박아 두지는 않으니까.

장보러 가는 척하고 오늘 점심 시간에 전소희가 이름 모르는 아줌마 경비랑 교대를 한 타이밍에 말이다.

야겜 버전 흡혈귀의 육체였다.

지금이야 초반의 쪼렙이라 시체를 구울로 만드는 정도에서 멈추지만 조금 더 레벨이 오르면 파트너의 능력도 강화할 수 있다.

정통성 있는 스토리 아닌가. 음양교합으로 서로 강해지는 것.

‘2구역 슬럼가에 경험치 농장 하나 만들어서 적당히 굴리면… A급은 어느 정도지? 정보가 감이 안 잡히네.’

그녀의 피를 빨면 내 레벨이 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를 A급이나 S급으로 올릴 수 있다.

지금이야 여기 집에서 가정주부 놀이나 하고 있지만, 나름 히어로 vs 빌런의 흉악한 세상 아닌가.

B급은 그렇게까지 안심되는 레벨은 아니었으니까.

간만에 보는 신선한 유형의 여성이여서 그런 걸까. 여기사나 여전사와는 조금 다른 그 신선함.

그 때문에 나는 그녀의 곁에서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작품후기]

아침을 여는 기습의 2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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