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310화 (310/318)

0310 / 0318 ----------------------------------------------

The winter, That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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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너머 가까이에, 학교가 있다.

붉은 벽돌과 수 십개의 창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진열된 책처럼, 보는 사람이 답답하게끔. 차창 너머의 광경을 막아버린다. 마치, 이 광경을 한 폭의 수채화로 표현한다면 붉은 색의 물감이 번진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앞엔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가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하였던 놀이터. 나 역시 아주 작은 꼬마였을 적엔 시소와 그네를 타고 뛰놀았었다.

혼자서. 친구 하나 없어 오직 혼자서.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고, 하얀 결정들이 하얗게. 아주 하얗게 떨어져간다. 짙은 진눈깨비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지상 아래로 추락한다.

드르륵.

문득 그 진눈깨비를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팔을 쭈욱하니 뻗어 이 하얀 가루들의 감촉을 느끼려, 손바닥을 하늘이 보이는 방향으로 펼쳐보았다.

"...."

감촉은, 느껴지지않았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이 해 겨울,

12월 24일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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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잉하는 기계음과 함께 물이 끓는다. 커피포트에 물을 담아 버튼을 누르고 그 커피포트 안에 있는 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몇 분쯤 지나서였을까.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더니 물이 끓는 내내 빛나던 붉은 불빛의 버튼이 틱하고 꺼져버린다.

딸각.

쪼르르르..

자그마한 종이컵에, 끓인 물을 부어버리고. 1회용 커피믹스가루를 부어 살살살 젓는다. 사실 커피라는 것도,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다. 종종 그들이 마시는 광경이야 보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살살살 젓다보니 갈색빛으로 바뀌었다. 이 정도면 된건가. 조심조심 마셔본다.

"달다"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내 감상평은 이러하였다. 뭔가 옅은 설탕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종이컵 너머로 전해지는 이 따뜻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진기한 경험이자 소중한 추억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컵 위로 솔솔 올라오는 연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회색빛의 하늘과 함께 차갑기 그지없던 빛으로 물들어가던 이 방안에서 나무의자에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 조그마한 종이컵 안의 따뜻함을 비워내간다.

너무나디 소중하고 소중한 1분 1초가, 나에겐 덧없음과 놓치기 싫은 것이 아닌, 고마움과. 또 고마움과. 웃으며 보내줄 수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집 안을 둘러다봤다. tv. 냉장고. 식탁. 테이블. 서랍장. 컴퓨터. 소파. 하나하나 잊지않으려...

의자를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잘 보지도 않던 tv를 틀어 여러 개의 채널을 돌려보기도 하고.

테이블을 헝겊으로 깨끗이 닦아보기도 하고.

서랍장에 진열된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보기도 하고.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

난 바깥으로 외출할 준비를 하였다. 아버지 옷장에 있던 큰 회색의 코트를 걸치고서, 출입문의 문고리를 살며시 열어보았다.

휘이이잉...

문을 열자마자 쌀쌀맞은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린다. 이번에도 다가온 이 겨울은, 무척이나 춥기 그지없었다.

난 어른 흉내라도 내보려고, 신발장 안에 있던 아버지의 구두를 신었었다. 다행히도 발 사이즈는 맞았다. 따각따각하는 구두소리가, 무척이나 나에겐 신기하였다. 이게 정말 내가 내는 발소리인가하고.

무엇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미용실로 향하였다. 무척이나 비싼 미용실이 아닌, 바로 옆동네에 있던 아주 작은 미용실. 남자컷 단돈 5000원이라고 쓰여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난 그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하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미용실 아주머니의 말과 함께, 난 '머리 자르러 왔어요..'라고 소심하게 답해본다. 미용실이란 데를 다녀본 적이 없던 지라(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난생 처음와보는 곳에 당황한 것일지도 모른다.

"학생 머리가 아주 기네요? 얼굴이 안 보일 정도네…"

"아 네…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머리 긴 남자는 처음본다'라며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아주머니에게 난 머리를 들어올려 나의 눈동자를 보여주었다.

"…학생 눈이…"

분명히 '귀신눈깔'이라느니 '무섭다'느니 뭐라느니 말하겠지라고 예상했었던 나였으나, 이 다음에 들려오는 대답은 날 의외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이쁘네. 아주 이쁜 눈동자야"

난 그것에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눈동자를 보자마자 기겁하거나 찌푸린 표정을 짓거나 막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할 진데, 처음으로 이쁘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으니,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왜 그 이쁜 눈동자를 여태 가리고 있었어?"

"저…안 무서우시나요?"

"뭐가 무서워 이쁘기만 하구만. 자 머리 자르러 왔지? 어여 앉아. 그 이쁜 눈동자를 만인의 앞에서 보여주게 만들테니까"

서둘러 날 이끌어 의자에 앉히는 아주머니. 난 아주 얼떨떨하게 외투를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의자에 앉았다.

"학생 어떤 머리로 하고 싶어?"

"그냥…잘라주세요. 눈동자가 보이도록"

"그래 알았어"

아주머니의 그 말에 난 희망을 얻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아주머니의 손길에 편안히 눈을 감았다.

싹둑. 싹둑하는 리드미컬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위질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이고, 툭툭하니 하얀 천 위에 내 머리카락들이 사르륵하고 떨어져내려간다.

눈을 감는 내내, 난 평안함을 느꼈다. 뭔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듯한 이 풍족감이 너무 좋아서, 이 시간이 조금은 길어졌으면 좋겠다고...난 나지막이 바라고 있었다.

점점 시야가 하얗게 밝아진다. 가려져있던 어둠은 걷혀지고, 환한 전등빛이 내 시야를 밝혀주고 있다.

"자 다 됐다. 눈 떠보렴"

아직 빛이 익숙치 않아서였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감겼던 눈을 일으켜보니, 나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마주하게 되었다.

"학생 아주 잘생겼네. 연예인 저리가라인걸? 어머어머. 피부도 왜 이리 새하얘? 어디 관리라도 받았는지 호호!"

처음으로 난 내 얼굴 전면을 보게되었다. 화장실에서 샤워할 때 머리를 살짝 걷어올리고 거울을 보기는 했었으나 이렇게 내 얼굴 전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회색의 눈동자.

'두렵니?'

거울 너머에 있는 또다른 내가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 두렵지않아-

그러고서, 거울 너머에 있는 또다른 난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미용실 바깥으로 빠져나온 난 근처에 있던 영화관에 갔다. 머리를 자르고나서의 바깥 나들이. 연인도, 가족도 대동하지 않은 채 이 크리스마스 이브날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과의 이별은 그 때 하면되니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시간은 바로.

-'나'로부터의 이별-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온통 나에게로 쏠려있었다. 옆을 스쳐지나가는 연인들도, 가족들도, 혼자인 사람들도 모두 날 쳐다본다. '왜 그렇지?'하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대답해줄 사람 하나없고, 여자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 바로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회피한다.

역시나 내 눈동자는 무서운거구나. 라고 난 스스로 납득하였다.

혼자서 사람많은 강남대로를 거닏는다. 빽빽히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수많은 사람들. 모진 찬바람이 부는 이 겨울 날에 아랑곳하지않고 사람들은 이 날을 마치 따뜻한 날인 것처럼 걷고. 또 걷는다.

영화관으로 가기 전, 난 크나큰 쇼핑몰이 아닌, 길가에서 파는 노점상에서, 내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사주어야겠지'

마음같아선 백화점에 들려 선물을 사고 싶었지만, 난 그럴 돈이 없었으니까. 물려받은 크나큰 유산을 왠만해선 건드리지 않는 나였기에, 그저 받은 용돈만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나라서 내 수중엔 많은 돈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그마한 선물을 사줄 돈은 있었기에, 내 발걸음이 잠시 멈춘 것이었다.

'마지막 선물이니까.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 노점상에서 신중히 고르고 또 골랐다. 목도리. 귀마개. 털장갑.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선물이었지만.

'그들의 미소 한 줄기를 단 한순간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였다.

갈색 털장갑과, 빨간 목도리와 하얀 귀마개를 종이봉투에 주섬주섬 넣고서, 영화관에 들어갔다. 역시나 크리스마스 이브. 거의 매진. 매진. 매진사례였다. 하지만 남은 좌석들이 있는 영화 중 나의 시선에 끄는 영화가 하나있어 주저하지않고 그 영화를 티켓팅한다.

어느 한 죽음을 앞둔 사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는 내용의 영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이벤트를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그러고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보는 앞에서, 아내의 품에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걸로 영화가 끝나갔다. 어떤 사람보다도,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그를 보면서.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결코 슬픔에 잠겨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

나도 동감하다는 듯, 그러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오후였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는 무척이나 빨리 저문다. 내가 영화관 바깥으로 나와있을 때, 벌써 거뭇거뭇 하늘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밥을 먹어볼까"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으니까. 그럼 만찬이라도 즐겨볼까?하는 마음으로 나의 하나뿐인 단골집 식당으로 향하였다. 바로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설렁탕집.

"할머니"

"아이고 정우왔냐!"

할머니는 오늘도 날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항상 이렇게.

"네 할머니"

"어매. 정우 머리 잘랐누? 이러고보니 완전 미남이구만"

"할머니 별 말씀을요"

"그래 바깥에 춥지? 어여어여 앉아. 설렁탕 한 그릇 따시하게 얼렁 갖다줄게"

"네 감사합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홀로앉아, 이 마지막 만찬을 기다린다. 그러기를 몇 분, 할머니가 고기가 듬뿍담긴 뚝배기 한 그릇을 갖다주신다.

"많이 묵어"

자상한 할머니의 웃음과 사랑이 담긴 설렁탕 한 그릇은, 어떤 저녁보다도 너무나도 따뜻하였다.

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젠 몇 시간도 남지않은 나의 불씨. 점점 꺼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몸의 피곤함과 어지러움증은 지금 당장이라도 날 어떠한 세계로 이끌어갈 것만 같았다.

비틀. 애써 흔드리는 몸을 부여잡고 나 홀로 귀가하는 길.

"이제 슬슬 시작했겠네"

나 역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를 행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딸칵.

문을 열고 집으로 와보니 이미 학교로 간 듯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었던 외투를 모두 벗어던지고,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정돈한다.

욕조에 몸을 담그는 동안, 자꾸만 밀려오는 졸움에 정신을 차리자. 하면서 이제 정말로 없는 나의 시간에, 이별을 고한다.

오늘만큼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아버지의 정장을 걸쳐입고 거울 앞에 선다. 넥타이, 자켓,바지, 구두, 벨트 모두 아버지의 것이었다. 모두 갖춰입고 현관문 앞을 나서기 전, 문득 누군가가 날 쳐다본 듯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

뒤를 돌아봤을 때에는 당연하게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불이 꺼진 집 안과, 추억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눈가에선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안녕히계세요"

난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또다른 소중한 존재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하였다.

어두운 하늘에 내리는 하얀 물방울.

환한 보름달의 달빛.

눈바람과 함께 스러져가는 불빛들.

자동차 경적소리.

하하호호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젠 추억으로, 하나의 기억으로 사라져간다. 절대 돌이킬 수 없는...그러한 시간으로.

뚜벅. 뚜벅하는 발걸음에도 사라져가는 시간들 속에, 나 홀로 하늘 위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눈을 감고 돌이켜보았다. 비참했던, 그러나 너무나 소중했던 나의 시간들. 추억들. 그리고 인연들.

마지막으로....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아무리 반복하고 반복해도 모자를 말을 속으로 곱씹고 곱씹으며.

난 아스라이 흩날리는 눈길을 걷는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무대. 2-c반 박정우 학생이 부릅니다!"

미소와 함께.

'마지막'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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