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303화 (303/318)

0303 / 0318 ----------------------------------------------

사계(四季)

=====================================================

"오빠"

"응?"

하교길, 그녀와 난 오늘도 함께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질문을 하였다.

"세희언니 말야…"

"연세희가 왜?"

그녀의 입에서 '세희'라는 입이 나오자, 나는 표정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민정이가 나에게 세희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그녀의 질문은 이러하였다.

"왜 오빠랑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거야?"

"…"

말을 못하였다. 할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하기 싫었는지 몰라도 나는 끝끝내 침묵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민정이가 대체 어떤 일이냐며 물어왔어도, 나는 '세희에 관해선 그만하자'라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한테 세희언니는…'친구' 아니었어?"

"민정아"

"얘기해"

"나랑 그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친구'가 아니야"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계속 물어왔다. 그래서 난 한 마디를 해주었다.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이제 그 녀석과 나는 옳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나를 생각하지않으니까, 나 역시 그녀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편할 거라고. 그러한 마음으로 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

"…이제 그만얘기하자 민정아. 피곤하니까"

나는 회피하듯 나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만남. 이어진 시선회피. 서로에게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나와 그녀는 길이 엇갈리고 있었다.

나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정이라도 아는 척을 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하였다. 그 녀석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더라도 난 할 말이 없으니까 말이다. 마음은 씁쓸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늘상 저녁에 하는 영어과외는 이루어졌지만, 뭔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이 되었다. 민정이는 나에게 한 마디도 해주지않고 조용히 있는다. 서현누나와 지현누나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나 잘래' 하면서 먼저 방에 들어가버린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정우야?"

서현누나가 물어봤지만, 그것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글쎄…'하고 모르쇠로만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

새벽엔 네 남매가 함께 자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민정이가 내 방으로 오지않는다. 역시나 그 일 때문이었을까. 나도 마음이 조금 심란하였다.

"우웅 정우야…"

양 옆에서 지현누나와 서현누나가 내 양팔을 나눠가지며 잠이 든 상태. 나는 그것에 역시나 어리광쟁이누나들이라며 그녀들의 머리를 번갈아가며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잘 자네 누나들"

사실은 말이다. 민정이는 물론이고 지현누나, 서현누나도 모두 나한테 고백을 하였었다. 나를 동생 혹은 오빠로서가 아닌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솔직히말해 서현누나의 고백때엔 마음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난 그러한 부적절한 관계가 이루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러한 그녀들의 마음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또 상처받은 그녀들이 날 외면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야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들의 마음에 난 답할 수가 없었으니까. 고3으로 올라갈 무렵, 난 그녀들에게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대할 수 밖에 없었다.

밥도 혼자먹었고, 혼자 다녔다. 방에만 처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않고서, 난 늘 생각에 잠기거나 잠을 잤다. 그리고...

짝!!!!

나는 싸대기를 얻어맞았다. 어느 날 저녁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왔는데, 마침 세 자매가 모두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피하고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고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지현누나가 날 멈춰세웠다.

"정우"

"…"

"왜…우리들을 피하는 거야?"

"이러는 게, 맞으니까"

이러는 게 맞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들의 마음을 모두 거절하고 나서, 나는 모든 짐을 꺼내들고 홀연히 집을 떠났다. 몇 달동안. 학교가 시작하는 3월에도 나는 떠돌아다녔다. 더 이상 그녀들에게 짐이 되고 상처가 되긴 싫었으니까. 내가 없어지는 것이 그녀들에게 편한 입장이다 싶었다.

내가 없어져야 그녀들이 더 행복할 것을 믿었기에, 나는 떠났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걸렸다. 아니 찾아내었다. 서현누나가. 내가 매일 가출했어도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든 날 어떻게든 찾아내었었다.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나를 찾아낸 것이었다. 이 넓디 넓은 대한민국의 땅을 모두 다 뒤져서. 아주 귀신같이.

"어떻게…"

왜 날 찾아낸 것일까. 이렇게 떠나는 날 붙잡지 않아야 할 텐데. 그녀들에게 있어서 나는 원망대상인데. 어째서 나를 찾아낸 것일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날 한번 포근히 안아주면서 하는 말 한마디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가자. 정우야"

뭐, 그렇게해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나서도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였다. 자괴감이었는지 자책감이었는지는 몰랐어도 말이다. 그리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지현누나가 날 붙잡은 것이었다.

"나는 누나들이랑 민정이에게 상처줬잖아? 나는 죄인이야. 사실 이 곳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을 지도…"

그 순간 지현누나의 손이 매섭게 돌아가 나의 볼을 후려쳤다. 씁쓸히 웃으며 얼얼해진 나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잡고서 지현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에 난 얼마나 당황스러워했는지 모른다.

"우리들한테 상처줬다고해서…그래서 죄인같은 기분으로 돌아온거야?! 너는 왜 그렇게 우리들의 기분을 멋대로 판단하고서 멋대로 행동하는 건데! 오히려 그러는 게 우리들의 마음에 더 상처주는 건데!! 네가 거절하였을 때…내가 무슨 원한이라도, 원망이라도 품었을 것 같아!"

나의 어깨를 붙잡고서 눈물을 흘리는 그녀. 그리고 그 뒤에서 덩달아 함께 울고 있던 서현누나, 민정이.

나는..진정으로 죄인이었다.

"너에게 고백한 것에 대해서…절대 후회안해. 후회하지 말아야해. 이것은 나의 솔직한 마음이니까. 이건 모두 다 같은 마음이니까…이러한 나의 마음을 말하기에 앞서서…민정이도…서현언니도…그리고 나도…모두 너의 가족이잖아…"

"…"

"10년 동안의 그 미안함을…너는 또 반복하게 할 참이야…? 거절당했다고해서…우리들은 가족이 아닌거야?"

"…지현누나"

"얘기해 정우야…우리들은…가족이 아닌거야…?"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지현누나에게서 '정우야'라는 소리를 들었다. 늘상 '정우'라고 부르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정우야라고 불리는 것이 너무나도 생소하였었다.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고, 나는 멍하니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나의 어깨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모두가 울음바다인 가운데에서, 나는 홀로 시간이 멈춰진 듯 있었다.

"우리를 진정으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안아줘 정우야. 제발…제발…"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모른다. 얼마나 쓰레기같았는지 모른다. 그녀의 절규어린 울음에 나는 얼마나 죽어 마땅한 놈이었는지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다. 그녀들은 나를 이렇게나 생각하고 있었는데..정작 나는 바보같이 그러고만 있었다.

그것에, 나 역시 눈물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미안해…정말로 미안해!! 지현누나! 서현누나! 민정아! 내가 정말로…미안…"

"우아아아앙!!!!"

결국 모두가 부둥켜안고 우는 아주 진상아닌 진상꼴까지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때엔 모두가 회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펑펑 울었다. 모두가 나의 품에 안겨서 울고, 나 역시 울었다. 정말이지..찌질이가 아닐 수 없었다.

한 번 모두가 그렇게 울고나니 감정의 앙금이 모두 다 싹 풀어졌다. 그렇게 한바탕 울다가 시간이 흐르니 웃음까지 나왔다. 그러고나서 되찾은, 일상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함께 자고 있는 것이 여전하기도 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세희일 때문에 민정이가 오지않았던 것이다.

끼익....

그러던 바로 그 때, 나의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베개를 들고서 찾아왔다.

"오빠…"

민정이였다.

"자?"

"…아니"

나의 아니라는 소리에 그녀는 조금씩 내 쪽으로 다가와서 서현누나의 품을 비집고 들어아 내 옆에 누운다.

"세희언니랑…그렇게 계속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낼 거야?"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오빠는…우리에게 했던 일을 또 반복할 참이야?"

"뭐?"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자자 오빠. 더 얘기하면 피곤하니까"

"…그래"

민정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희와 나의 관계가 풀리길 바라고 있음이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아...

'얘기…해봐야하나?'

나는 새벽 내내 그러한 고민으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

============================ 작품 후기 ============================

세 자매는 대인배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