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289화 (289/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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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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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째깍...

"차 마시렴"

난 지금 거실 앞에 있었다. 밤 9시. 이제 서서히 깊은 밤으로 들어가려하는 시각. 시하의 어머니는 뜨거운 차를 내 앞에 딸깍하고 내려놓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다시는 이 곳에 올 리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었는데. 이렇게 빨리도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새근새근 잠들어버린 시하를 조심히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에 난 이렇게 거실에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많이 놀랐단다. 네가 왜 갑자기 우리 집에 왔는지"

내 맞은 편에 앉아서,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향해 말하였다. 시하문제로 나를 만나러 학교에 찾아온이후로 두 번째의 만남. 나로서는 만나기가 정말로 껄끄러웠다. 아니 죄스러웠다. 자신의 소중한 가족.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딸을 이렇게 상처주는 나였으니까.

죄 많은 죄수와 같은 기분으로 난 그녀의 앞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건내주는 따뜻한 차도 단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건내준 차를 마실 정도로 난 뻔뻔한 인간이 되지 못하기에 말이다.

"하지만 '다행이다'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단다. 그 이유가 뭔지 아니?"

그녀의 질문에 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것일까. 어찌보면 그녀에게 나는 원수와도 같은 놈일텐데.

"그 아이가 무척이나 소중히 아끼는 네가 그 아이를 위해 이 곳에 다시 와서 그렇단다"

"…"

'소중히 아낀다'라…난 그것에 더욱 더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천하의 못된 놈이 된 기분. 난 그 아이에게 상처만 주었을 뿐인데. 눈물만 주었을 뿐인데.

왜.

대체.

아직까지도 나를 '소중히 아껴주는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정우야"

"네"

"어떻게…시하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니?"

나는 머뭇거리를 태도를 보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전후 사정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시하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어했고...나에게 위로를 받았고..울다 지쳐서 잠들어 내가 시하를 집까지 업고왔다고는 그러한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의 입가에선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눈가가 촉촉해져있었다.

"난 이 아이에게…그저 죄인에 불과하구나. 후후…어머니 실격인걸?"

"아주머니…"

자조적인 비웃음. 그저 그런 표정만 짓고 있었던 그녀. 시하 그 이상으로 힘들어했을 그녀가 분명하였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단다. 들어줄 수 있겠니?"

"…?"

"부디 오늘 하루만. 하루만 그 아이의 곁에 있어주렴. 한 아이의 엄마로서. 이렇게 부탁한단다"

"…"

나는 그 부탁을 내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해야한다. 정말로 거절했어야했다. 하지만 이 완곡한 부탁을 난 뿌리칠 수 없었다. 난 그녀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저절로 투영해버렸으니까.

이제는 죽고 없는, 나의 기억 속엔 한 없이 냉정하였던 엄마의 모습이..자식을 위해..이런 원수에게 부탁을 하는...그 모습에서 난 처량함. 그리고 동정심이 절로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정시하. 그녀는 무척이나 행복한 아이라고.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변명거리를 하여도, 통하지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것에 그녀는 갑자기 꾸벅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단다. 정말로…고마워……"

아아 빌어먹을...난 이러한 걸 바라고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은 나일 것이다. 차라리 이런 날 한없이 원망하고. 증오하고. 욕하는 게 정상인데...그래야 그나마 나을 텐데...

"아주머니. 제발 일어나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일으켜 세우고보니, 그녀의 눈가엔 이미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난 마침 주변에 있었던 티슈를 찾아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 난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 어떤 엄마든, 모두 시하의 엄마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판단지었다.

나는...'엄마'란 사람을 잘 모르기에.

어두운 방. 난 조명도 키지않고서 그녀의 방 안에 들어왔다. 조명을 켜버리면 잠들어있는 그녀가 바로 깰 까봐서였다. 게다가 조명보다도, 이러한 어둠이 나에겐 훨씬 더 편하였다.

침대에 곤히 잠든 그녀. 그녀는 무엇인가를 껴안고 자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내가 문화제때 그녀에게 준 하얀곰돌이인형. 언제나 이 하얀곰돌이인형을 '나'로 생각하고 있다고. 그녀가 그렇게 얘기한 기억이 났다.

"정시하…"

그녀는 어떠한 악몽을 꾸는 듯, 그녀의 눈가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떠한 흐느낌도 없이 눈물만. 이 악몽은 필시, '나'와 관련된 일이겠지.

"구해줘…날 구해줘 제발…"

-그녀는 팔을 뻗으며 누군가의 손길을 바랬다-

"정우군……나를……구해줘…"

-그녀는 이렇게 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나를……사랑해줘…"

-눈물과 함께, 그녀는 나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하였다-

아직, 나를 잊지못한다는 뜻이었을까. 그래. 잊지않는다는 뜻이겠지. 어두운 방. 나는 나의 가족에게 해왔듯, 난 조용히 그녀의 손을 꼬옥하니 잡아주었다.

"이런 죄인의 손이라도…너에게 필요하다면…"

누군가가 손을 잡은 것을 느낀 것일까. 그녀의 눈물이 서서히 멎어져간다. 불규칙하던 호흡도 천천히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잘 자 시하야"

나는 그녀가 더욱 더 깊은 꿈 속으로 빠져들 때까지. 한동안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녀가...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라며...

이걸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걸로 그녀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걸로 그녀에 대한 나의 죄가 사라지지않음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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