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287화 (28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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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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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가을이 서서히 무르익으려하는 시점에서, 나는 여전히 방황에 헤매인다. 천 개의 물길 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 속은 모른다고 한다던가. 그렇다. 나 역시 사람 마음을 모른다. 내 자신의 진심조차도 모른다.

여전히 반복되는 고교생활. 나는 그 고교생활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오늘도 아침 6시 자명종 소리에 또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아니, 새벽에도 눈이야 뜨고 있었지만 말이다.

학교에 간다. 여전히 무표정. 무감정의 일상이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난 후. 나는 심한 죄책감에 안겨서 살고 있었지만 그 감정도 이젠 서서히 희석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그 약이 너무나도 쓰디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 때엔 정말로 죄수와도 같은 기분이었는데..돌이켜보고나면 이것이 모두 없어지게되다니..인간이란 정말로 망각의 동물인 것 같았다. 망각. 어찌보면 좋은 거일수도 있다. 나쁜 기억을 털어내고 좋게 발전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망각이란 것이..신이 인간에게 준 고통스러운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버린다는 거니까. 추억도. 사랑도. 모두..잊혀져간다는 거니까.

바로 그 때 우연히,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화기애애하며 걸어가는 모습. 여느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그래..그녀도 이러한 추억이 '망각'이 되었겟지..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추억의 파편이 되어..그녀의 머리 속에 있다가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겠지..

좋은현상이야. 이렇게 잊혀져가는 게. 그것이 그녀가 행복해지는 길일테니까. 나에겐 비록 아픔으로 다가서고 있지만..그것이 망각되어 가고 있다는 게 조금 아팠지만..괜찮아. 이러한 망각쯤이야..얼마든지 웃으며 받아줄 수 있으니까.

남자에게 첫사랑의 추억은 가장 머리 속에 오래 각인이 된다고 한다. 반대로 여자에겐 마지막 사랑이 가장 머리 속에 각인이 된다고 하나? 참 웃기는 남자와 여자다. 어떻게 신은 이리도 두 존재를 극단적으로 반대로 만들었는지. 그런데 그 반대선상에 있는 두 존재가 서로 사랑을 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 최고의 기적이다라고. 그래. 그 반대선상에 있는 두 존재가 거리의 격차를 넘어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서머셋 모옴처럼 사랑예찬자는 아니나 신이 인간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주었고, 그리고 인간은 그 사랑을 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찾아간다고는 생각하고있었다.

모옴이 이런 말을 하였다. 인생에서 최대의 비극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사랑의 위대함을 가르치려고 우리를 태어나게 만든 것인지 질문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

Words are flowing out like endless rain into a paper cup

끝없이 내리는 비처럼 말들은 흘러 종이컵 속으로 들어가고

they slither while they pass

말들이 지나가는 동안 미끄러져

they slip away

사라져버려요

across the universe

저 우주를 지나와서요

흥얼흥얼. 나의 입가에선 수 많은 음표의 조화가 흘러나온다. 몽환적인 어쿠스틱 기타의 흐름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가사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몸에 나부끼고, 추억과 웃음과 회한과 조그만 슬픔으로 나는 흥얼거린다.

sounds of laughter shades of earth

웃음소리와 지구의 명암이

are ringing through my open views

내 시야를 통해 울리며

inviting and inciting me

날 자극하고 날 유혹하네요

Limitless, undying love

무한의, 끝없는 사랑은

which shines around me like a millionsuns

수 백만의 태양처럼 내 주위에서 빛나고

and calls me on and on across the universe

저 우주를 지나와 자꾸만 절 부르네요

"Jai guru de va om(선지자여, 진정한 깨달음을 주소서…)"

그 우연한 만남을 빼고는, 11월을 지나면서 그녀를 본적이 없다. 12월 즈음. 학기가 다 끝나고가고 나서야 그녀를 본 것이 한 두번이었을 것이다. 그 때마다 그녀에겐 남자가 있었다. 그녀야 워낙에 인기가 있으니까. 남자가 바뀌는 것이야 일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씁쓸하냐고? 그래 빌어먹게도 씁쓸하다. 첫 사랑인 그녀가 이렇게 다른남자와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한 것이 당연했다. 추억이라고. 이젠 추억 속에 존재해야하는 여자라면서 웃으라고하지만, 씁쓸하지않아하는 것이 더 바보 같아보였다.

씁쓸하지않아한다면, 그 때 내가 품었던 감정이 모두 '거짓'이 되어버릴 테니까. 거짓말이되어버릴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아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씁쓸하지만 인정해야한다. 그러한 정도선에서 유지되어야하였다.

그녀를 사랑하지않아. 그런데 왜 난 이렇게 추억에 휩싸이고 있는 거지?라고 자신을 되물어볼 때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너는 과거에 집착하는 남자라고.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까.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 미래를 그리는 사람. 그리고...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그 세가지 부류 중 난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이제 나도 고3인가…"

그래 고3. 본격적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할 나이. 수능에 사로잡혀야할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빌어먹을 시련이 닥쳐오는 것이다.

입시에만 매달리는 사회. 학벌만 중시하는 사회. 그것에 청소년 자살율도 엄청나게 높다.아무리 교육이 다채롭게 변화되고는 있다지만 결국 모두 학벌. 취업을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하는 시점인 것이다.

"…잘해야겠지"

그래 잘해야겠지. 망하든 망하지않든, 후회없이 하면 되는 거겠지. 내가 딱히 미래를 확실히 생각해둔 것도 아니었고...그냥 꿈도, 미래도 없이 살아왔었으니까. 절망과 좌절뿐이었던 이 삶에 희망이란 것은 없었으니까.

그냥..후회만 안하면 되겠지..라고 대책없이 생각하는 나다.

12월. 무척이나 쌀쌀하다. 그렇게 길기만 하던 해가 떠있는 시간도 이젠 확 줄어버렸다. 5시쯤이어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그러한 조금은 일찍 해질녘의 하교길을 걸어가던 도중, 나는 어느 한 놀이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삐걱...삐걱...

삐걱거리는 그네소리에 놀이터를 바라보니 누군가가 홀로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쓸쓸해보여,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정시하?"

그녀였다. 정시하. 오랜만에 난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우군?"

그리고 그녀도, 나의 얼굴을 놀란 듯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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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알바잉여잉여인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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