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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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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마치 카메라에 흑백효과를 넣어서 찍어버린 사진처럼. 어두웠다. 회색빛의 아스팔트와 빌딩은 무채색의 빗물에 차츰차츰 적셔나간다.
투둑..투둑..하는 빗물소리가 베란다의 철창을 때리고, 옷거리에 걸린 옷가지들은 살짝 열어놓은 베란다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흔들 나부낀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이제 분간조차도 가지않는 시간. 태풍이 다가온 것인가하고 신문을 뒤져보아도 전혀 태풍소리는나오지않았다.
그저. 단순한 비.
이것저것 공상을 하게 되는 시간. 철창에 비를 때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어느 오후. 나는 무덤덤히 거실에 홀로 남겨져있었다. 어떠한 생각조차도 하지않았고, 어떠한 행동조차도 하지않았다.
그냥 멍하니, 아무 것도 하지않은 것이었다. 아무 것도. 그녀와 헤어지고나서 일주일. 나는 그녀와 만날 기회도 없었다. 그 일주일동안, 나는 이러고 지내는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일까.
아아 그래...'상실'이었지. 잃어버렸지. '친구' 한 명을. 아니, '나를 사랑해준 사람'을...
상실의 고통 속에, 나는 헤매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선택에 의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난 마음에 구멍이 하나 난 것처럼 공허한 것일까.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친구'로서 조차도 대할 수 없다는 것에, 나와 가까이 사귀던 사람이 한 명 없어졌다는 상실감에..
애초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그것을 알고서도 난 선택하였다. 그녀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것이 나았기에.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끌고 끌었다가는 상처받는 것은 그녀였기에. 그래서 내가 개새끼가 된 것이었다.
'그녀를 사랑하지않아서'. 그 이유 하나로.
솔직히말해,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은 것'인지조차도 모른다. 고1. 작년에 말이다. 작년, 그녀와 사귀면서...
그 때,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따위와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여자임을. 그래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마웠다. 나 따위에게 관심은 머나먼 거리였다. 그러한 관심이 설사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어도 좋았다. 이러한 왕따새끼한테 그래도 말을 걸어주는 그녀가, 나는 너무나도 고마웠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러지않았나싶었다. 나에게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 나한테 애정을 주는 구나'하고 마음이 혹해버리는...남자는 항상 그러한 생물이다. 그러고서 아무 것도 아닌 듯 휙 돌아서버리면, 쉽게 상처받는 것 역시 남자란 생물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와 사귀는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의 남자친구행세를 하지않았던 것이다. 여자를 처음 사귀어보는 것이라 내가 어눌하게 행동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자격지심을 가지고 사귀었던 것이기에 나는 그녀가 어떠한 행동을 하건 간에터치를 두지않으려고 하였다.
그래..터치를 둘려고하는 순간부터 이 마음이 '집착'으로 갈까봐 두려웠다.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할까 두려워 난 그녀에게 어떠한 연락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않았다. 한 달 조금 안되는 연애기간동안, 그녀와 난 딱 한번 데이트해봤을 뿐이다.
그 동안, 그녀의 곁엔 항상 남자가 있었다. 잘 생기고, 소위 말해 '일진'이라 불리는 이들. 그들이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서 정시하에게 말을 못 걸었냐고?아니다. 나는 그러한 일진들이 두렵니 뭐니 그딴 것은 상관하지않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나야 왕따니까. 왕따를 넘어 아예 '소외'받는 아웃사이더였으니까. 왕따는 그나마 얻어맞기라도하지, 나는 욕만 줄기차게 먹는다. 그리고 나는 상대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 그들은 아예 '없는 존재'로 날 취급한다.
따지고보면, 난 그녀에게 '좋아해. 사랑해'같은 연애감정도 표현하지않았던 것 같다. 그냥그녀가 좋았기에.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준 그녀가 너무나도 고마웠기에..그저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난 마음의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그 사건'을 겪고 난 이후..모든 것이 달라진 그 순간부터...
그 때부터 완전히 관계를 정리했어야했다. 그녀가 나에게 집착하지않도록 했어야했다. 그랬다면 나에게 받는 상처따위 없었을텐데...
.......이별의 순간은 늘 괴롭다. 그것이 나의 냉정함으로 이뤄진 것이라해도..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픈 건, 당연했다. 사실 원하지않았으니까 말이다.
"하하…"
그저 웃으며, 웃으며 또다시 자기자책과 혐오에 빠진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더 깎아내려야하는 것일까. 어떠한 사람이 그러하였다.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자기혐오주의자에게이렇게 말하면서...
'위로'받고 싶으니까 네 자신을 깎아내리는 거다라고.
위로...? 위로...?
아아..그래. 그럴 지도 몰라. 하지만 말야...그 '위로'조차도 할 사람이 나에게 없다면? 그렇다면 왜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고 부정하는 것일까?
자기합리화? 나 자신의 위로?
"…아니야"
아니다. 이러한 이유도 맞겠지만..완벽히 100%로 할 수 없다. 이리도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마음의 편안함과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이라면...차라리 하지않는게 낫다. 난 그러한 자기합리화조차도 '혐오'스러워 질 테니까.
"못 생겼다…"
tv에 내 얼굴이 비친다. 기나긴 머리카락으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않았지만 분명 머리카락 너머엔 초췌한 얼굴만이 보이겠지. 혐오스러운 얼굴이 보이겠지. 내 자신의 얼굴조차도 싫어서, 이렇게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녔으니..
긍정적으로 살아보겠다. 희망을 갖고 싶다. 빛을 얻고 싶다. 그래야 인생성공이다. 인생의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래야 삶의 목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 이미 포기해버린 것들 뿐. 결국, 자기회의인가...그녀를 버린 생각이 결국엔..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인가..
어떠한 것들을 생각하여도, 결국 끝엔 자기혐오니 부정이니 뭐니해서 찌질하게 나아간다. 내 자신이 찌질이라는 거 아주 잘 알고 있다. 고쳐나갈 생각도 없는 쓰레기란 것도 잘 알고 있다.
부정과 패배와 절망과 회의와 공허와 슬픔과 분노와 마지막으로..
'갈망'.
갖고싶으면 갖고 싶은 거 일 수록 멀어져가는 말을 아는가. 그렇다. 사람이 너무나도 원하면 원할 수록 그 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멀어져나간다. 어쩌면 다시 얻지 못할 정도로 멀어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몫. 난 아무 것도 해보지않는 주제에 갈망만 많았다. 끊임없는 탐욕이 내 머리 속을 지배한다.
나도 빛을 얻고 싶다고. 희망을 가지고 싶다고. 그렇지만 안돼. 그럴 수가 없어. 그러니까그저 이렇게 갈망만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빌어먹을!!!!!!!
미쳐버린. 너무나도 미쳐버린 나.
정신이 있을 뿐이었지 내 정신은 이미 피폐 그 자체.
피곤하다. 졸리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유난히도 눈이 감겨왔다. 그냥 차라리 이렇게 영원히 잠을 자고 싶다. 아무 것도 하지않고서. 그냥..이렇게..
비가 투둑투둑 내린다.
그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난 잠이 들어버렸다.
"사랑해 시하야"
그런 말을, 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정우군…기뻐"
나를 향해 웃어주는 그녀. 그렇지만...
푸욱!!!
"…그런데 어쩌지? 정우군…"
"시…하…?"
"나는 이제…아무 것도 믿지않으니까. 그 정우군이 말해주는 '사랑해'조차도…"
"…시하 너…"
"믿을 수 없으니까"
"…정시하…"
이 일주일 간, 꿈을 꾼다. 그러면서 꾸는 꿈은 항상 '그녀'. 그리고 '나의 죽음'.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는 날 죽인다'.
그래...현실에서도 정말로 날 죽이려했었지..날 가지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내가 눈을 떴어도, 비는 아직도 내렸다. 바람이 베란다 밖에서부터 불어와 이 거실 안을 메우고 있었다. 난 더위보다 이러한 습기찬 날씨가 더 싫었다.
마음의 우울.
"난 그녀를 사랑하지않아"
그래 사랑하지않아. 난 그녀를 사랑하지않아.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정말 나 이기적인 놈이야. 정말로...
빌어먹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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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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