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267화 (26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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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Part. 꿈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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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녀야?

왜 하필이면 그녀를 좋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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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이었다. 정우도 아직 '회색빛 눈'을 가지지 않았고 나와 친했었던 그 시절.

"정우야~"

나는 무엇인가를 들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그에게 선물하고자 차곡차곡 틈틈히만들어 모아놓았던 종이학들이 들어간 통을 들고서. 종이학 천 개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러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난 소원을 이루고자 엄청나게 힘들어하면서 새벽을 지새우면서 열심히 접었다.

'정우랑 더 친하게 지내게 해주세요'

그것이 나의 소원. 그 때 나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었기에. '가족'이 아닌 '이성'으로써. 그래서 그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 바램으로 이 종이학들을 접었다.

기쁜마음으로 그에게 달려갔지만, 난 순간 멈춰섰다.

"에헤헤…서현누나~"

서현누나에게 안겨서 얼굴을 비비고 있는 그. 나는 손의 힘이 빠져서 쿵하고 종이학들을 모아놓은 통을 떨어뜨려버렸다.

"서현누나~"

"응"

"좋아해. 무척이나"

그 때. 나는 벽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놀라움과 함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랐어도 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 '좋아해'라는 말. 언니가 아닌 나한테 말하주기를 바랬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오로지 그의 마음이 언니에게 향하고 있음에 난 서러워했다. 난 그의 마음을 돌리려 정말로 애쓰고 있는데..그의 마음은 한 번도 화살표를 전환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라며. 나는 그와 어울렸다. 아니 계속 내가 붙어다녔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서.

하지만...그는 변하지 않았다.

9살의 크리스마스이브. 눈을 떠보니 부모님은 물론이고 그마저도 없었다. 대체 어디를 간 것일까.

"정우야~정우야~어디있어~?"

여기저기 문을 열고 그가 혹시나 있을까하고 찾아보아도 그는 이 집 안에 없었다. 오로지 나랑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민정이가 방 안에서 자고 있었고, 서현언니는 방 안에 틀어박혀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오늘은 정우의 생일. 그래서 난 정우의 생일선물인 조그만 벙어리장갑을 만들었다. 어머니에게서 뜨개질하는 것을 배우면서까지.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밴드를 붙여서까지 난 이 선물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 때 이들이 어디로 갔는 지 전혀 모른다. 그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장갑을 만지작하며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다.

"언니 밥 안 먹어?"

일어난 민정이의 말을 듣고서야 소파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거실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서현언니…방 안에서 안 나와…"

"어…?"

"내가 '언니. 언니'하고 이름 불렀는데도…막 말 안하고 훌쩍였어…'무슨 일'이 있기라도한 듯이…밥 먹으라고 해도 안 나오고…언니 저런 모습 처음 봐"

그 때 당시의 서현언니는 무척이나 냉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그에게. 특히 그를 정말로 싫어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난 더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는 지 모른다.

그는 날 바라봐주지도 않는데, 그녀는 항상 그의 관심을 받고서도 싫어했으니.

나라면 얼마든지 그를 좋아해줄 수 있었어.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했어. 그렇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아. 바라봐주지 않아.

그는 서현언니만을 바라보는 걸...?

그러니까 나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혹시 그가 새벽에 돌아오지않을까싶어 그를 기다렸는데도 오질 않는다.

그 때 들려오는 전화벨. 그리고 그걸 받는 서현언니.

"서현언니…?"

전화를 받는 그녀의 표정은 심상치가 않았고 갑자기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내가 미처 어디가냐고 묻기도 전에.

그 이후. 그는 1월 중순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서현언니는 맨날 어디론가 기쁜 듯이 나간다. 나에게는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고서.

그 생일선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방 구석에 내던져져 내가 찾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실망감. 서운함. 원망. 그에게서 느끼는 감정들 때문에 그래서였을까.

그 조그만 장갑이 바로 마지막 '그에 대한 애정표현'이었다. 그가 회색빛 눈으로 돌아오고나서,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부터 내 마음은 서서히 식어갔다.

그는 나를 바라보아도 감정이 없는 듯이. 차가운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나를 따뜻한 표정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지현누나'하면서 손을 내밀어주지도 않는다.

그 이후 10년간, 난 그를 향하고 있는 이 마음을 철저히 숨겨버렸다.

"나는…'기회'조차도 없었어…"

그가 서현언니와 연인관계가 된 것을 알았을 때, '끝이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서현언니가 돌아온 이후로부터 그는 온통 서현언니에게 관심이 쏠려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연인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서 난 눈물을 삼켜야했다.

고백할 기회도 있었는데..나는 그에게 '사랑해'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민정이도 지현누나도 모두 좋아해. 염치없지만…'

그 '염치없지만…'이라는 게 대체 뭐야? 왜 우리를 좋아하는데 '염치없지만'이 들어가는데..? 우리를 좋아함에 있어서 너는 항상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서현언니와 연인이 되면서부터, 우리에게 미안함을 가지게 된 거야? 그러면..진작에 빨리말했으면 좋았잖아..왜 나한테 들켜버리는 건데..?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하였을 나였는데...그 다정한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도망쳤다. 그에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계속 뛰어다니는 내내 울면서...'이런 거 어차피 도망가고 있는 것일 뿐이잖아…'라고 생각하여도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워서.

하지만..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멈출 수 없음에...

딩동. 딩동.

"누구세요?"

"나야"

"지현이?!!!"

"응"

"갑자기 네가 왜…?"

"수진아. 미안한데…"

"응?"

"나. 당분간 여기에 신세지고 있으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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