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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Part. 꿈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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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쏴아..
푸스스..푸스스...
"이제…얼마남지 않았구나…"
쏴아...쏴아...
"이 나무의 생명도…그리고 남아있는 시간들도"
쏴아..쏴아...
"너의 '소망'은 이루어졌어.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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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 달이었다. 2학년 마지막으로 보는 기말고사마저 끝마치고나니 이제 정말로 이 1년이 머지 않았다고 실감이 났다.
"이제 3학년이야…"
"내년에 수능보려고 하니까 벌써부터 암울해진다…"
"겨울방학 때 잘 보면 되잖아?"
"언제 겨울방학하냐?"
"12월 30일?"
"거 참 늦게도 한다"
"여름방학을 길게했으니까"
"기말고사도 끝나는데 학교에 뭐하러 등교하냐…"
"내 말이"
시험을 끝마치고 변함없이 등교를 해서 교실에서 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12월달에는 학교에서 논다. 수업도 없고. 자습을 한다거나 애들이랑 말장난이나 한다거나 혹은 아이들 중 일부가 usb같은 거로 영화를 갖고와서 다 같이 본다거나.
"아무거나 영화가지고 온 놈!"
"나!"
"뭐 갔고 왔어?"
"퍼블릭에너미"
"…그거 재미없어"
"그럼. 에너미 앳더 게이트?"
"그거 전쟁영화 아냐?"
"맞아. 볼 만해"
"그런데 좀 오래됐는데…"
"어차피 볼 것도 없는데 그거나 보자"
오늘은 영화를 별로 가지고 오지 못했나보다. 교실에서 선생의 노트북을 이용하여 usb로영화를 보는 재미는 꽤나 쏠쏠했었지만..요새 매일 그러하다보니 아이들이 질려하는 구석도 있었다. 그래도 할 게 없었으니 뭐 어쩌겠는가?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보드게임을 갖고와서 하는 놈들도 많았다. 특히 체스와 같은 것. 심지어는 그 무거운 장기판을 갖고 온 녀석도 있었다.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은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체크모양이 있는 노트로 오목이나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잠이나 퍼자고 있었다. 시간 참 빨리 흘러간다 생각하면서...
쏴아..쏴아..
비가 내렸다. 이 곳이 어디인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서 잠에 빠져드니 난 어느새 이 곳에 있게 된 것이다.
그저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오고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와 회색빛 구름.
그리고 걷다보면 저 멀리 보이는 썩어버린 고목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고목나무 옆에있는 어느 한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이.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을 뿐, 난 그 아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못 보았다. 그 아이가 나타나려고하는 순간. 난 이 '꿈'에서 깨어난다.
근래에 들어서 이 '꿈'을 자주 꾸었다. 매일 꾼다고 해도 무방. 난 이 꿈에서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를 걷다 이 고목나무를 발견하고 그것이 있는 곳에서 도착해서 있다보면 잠시 후에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아이가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면 꿈에서 깬다. 이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에 나는 고목나무 옆에 걸터앉아있었다.
이렇게 걸터앉아 이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 것도 없다.
슬펐다. 왠지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도 왔네"
한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래…"
난 그 아이와 목소리만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런데…또 이렇게 빨리 헤어져야하네…"
나는 오늘에야말로 묻고 싶었다. 넌 누구냐고. 이 곳은 대체 어디냐고.
"'그 때'가 되면 알려줄게"
"…'그 때'?"
"아직 넌…'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으니까…"
그 소리와 함께 나의 의식세계가 무너지고. 난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어라…?"
눈을 떠보았다.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쨍쨍한 햇빛이 눈부시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에고고…또 늦게까지 여기서 자버렸네…"
교실 앞에 있는 시계를 보니 5시. 보통 학교가 4시면 끝났으므로 확실히 늦잠이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의자에 걸쳐두었던 점퍼를 집어 옷 위에 껴입고 교문을 나섰다.
입김을 불면 하얀 기체가 몽실몽실 나타나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사라져간다. 가을 때부터 불어왔던 찬 바람은 아직 버틸 만 하였지만 이 정도 날씨도 상당히 추운 편이었다.
유난히 겨울이 빨리 찾아온 해였다.
"확실히 겨울이구나…"
11월 말에 첫 눈을 본 이후로는 다시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녀와 데이트를 하면서 함박눈이 내려왔었는데..
현재는 12월 초. 언제 흘렀는지 둘째 주였다. 이제 겨울방학도 머지않았고..무엇보다 지현누나의 졸업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지현누나랑은 얘기를…"
그랬다. 지현누나와 얘기를 하는 횟수가 무척 줄어들었다. 물론 내가 서현누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그녀와 별로 만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지현누나와 얘기를 하여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단절감'이 느껴졌다.
없어진 줄만 알았던 벽이 생긴 느낌이랄까..? 지현누나와 나 사이에서 거리감이 느껴지고있었다.
가끔가다 지현누나와 아침에 만나서 같이 등교를 하면 거의 아무런 말도 없이 걸었다. 내가 '날씨가 춥지?'라거나 뭐 대화를 유도해내는 말들을 이끌어도 그녀는 묵묵부답. 안 그래도 말이 없던 그녀였는데 말 조차 거의 하질 않으니 걱정이었다.
게다가 가끔가다 나를 바라보는 지현누나의 시선은 살짝 원망과 서운함이 섞여있는 듯 보였다. 무엇인가 내가 잘못했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는 빨리 저문다. 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가서 갈 수록 하늘이 어둑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현누나가 있으려나?"
오늘도 밤에 데이트려나...그녀와 난 데이트를 밥 먹듯이 하였다. 민정이와 지현누나에게는 비밀로하고 남몰래 둘이서 데이트를 하였다. 물론 민정이나 지현누나가 있으면 말짱도루묵이었지만 둘이 없으면..
사실 언제까지 이 비밀관계가 유지될 지 모른다. 조마조마하였다.
"에휴…"
그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내쉬어진다. 말해야지말해야지하면서도 정작 보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회는 많았지만...
"이게 정말 내가 바라는 행복인 것일까…?"
난 지금 행복하다. 그렇지만 문득문득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이유도 그 이유였다. 갈 수록엄습해가는 '비밀'에 대한 두려움.
"에이…약한 소리는 하지말자"
이건 약한소리고 또 배부른 소리다. 난 사랑하는 그녀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 행복하였다.
"정우야!!!"
어느샌가 도착한 집의 문을 열면. 그녀가 현관까지 뛰어나와서 나의 품에 안긴다.
"잘 다녀왔어?"
"응"
"헤헤…♡"
난 그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무한한 사랑을. '연인'으로서..난 사랑을 받고 있다.
난 애정결핍이었기에 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에 한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누군가가 날 사랑해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일이기에.
그렇지만..나를 더 이상 사랑해주지 않는다면..그녀가 나에게 질려버려서...
마치 칭얼거리는 아이처럼...난 예전보다 더 끝없는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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