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253화 (25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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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3. Betw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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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마음들이 교차한다.

애정. 고뇌. 불안. 혼란. 집착. 조바심. 무엇인가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에 난 안달하고 안달해있는 것일까.

그 대답을 난 영원히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또다시 죽는 그 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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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 드디어 이 날이 다가왔다. 지현누나의 수능일. 그 전날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 안에 들어있는 동물들을 제거할 때. 나는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차차 마음을 누그러트리며 동물들을 없앴다. 그런데 난 그녀의 안에 무슨이유에서 동물이 생겨난 것인지 뻔히 알고있음에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갈림길에 서있다. 무엇인가와 무엇인가 '사이에서' 괴리하고 내적갈등을 일으키고있다. 나는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올바른 길로 이끌어줘야 할 역할을 해야했다.

'목동'이 되어 양을 인도해줘야했다.

"그러고보니 지현누나의 수능일이 내일이구나…"

떠나야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달력의 칸이 오른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카운트다운을 세야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나였다.

마치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준 것 같았다. 내가 운명론같은 것을 믿는 놈은 아니었지만 왠지모르게 '운명'이 나에게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 넌 떠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까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나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죽은 사람이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있게 되다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전혀 몰랐을 때에는 느껴지지 못한 것이 알았을 때에는 뭔가 느껴지게 된다. 평상시에 일어나는 일도 모두 다르게 보여진다. 무엇일까. 무엇에 나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무지의 자각.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내가 무엇인가 알게 되었을 때 겪는 변화인 것일까.

나는 아마도 그런 것이라고 판단한다.

세상에는 자기에게 각자의 역할이 주어진다. 신에 의해서든 혹은 스스로에 의해서든 어디에서 비롯되어있는 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 역할을 인간은 꼭 수행하게 되어있다. 크나큰 업적을 날리거나. 돈을 많이 번다거나. 사회에 봉사를 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거나. 사람들은 '역할'을 수행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나의 역할'은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난 그 마지막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않을까? 내가 떠나고나서 나의 가치가 모두 사라져 버렸을 때. 난 비로소..'삶의 의미'를...

"정우"

아침에 난 지현누나와 함께 등교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압박감이 심했을 그녀. 나는 어떠한 말로 위안을 줘야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나는 그냥 잘하라고 얘기하려하였다.

"내일…드디어 수능이네"

"응…내일…"

"잘 봤으면 좋겠다"

"고마워…난 정우의 말 한마디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는 지 몰라…"

"지현누나?"

"내일…잊지 않았지?"

"어…?"

나는 사실 까먹고 있었다. 지현누나가 말하고나서야 난 전에 지현누나와 단 둘이서 야구장에서 얻은 커플식사권을 이용하러가자고 한 것을 깨달았다.

"응. 잊지않았어"

"거짓말. 분명히 까먹고 있었을 거야"

역시나 지현누나에게는 들켜버리는 구만.

"…미안"

나는 순순히 인정을 하고 잘못을 빌었다.

"그래도…다시 한번 말하면 정우가 까먹지 않을 것 같으니까 얘기하는거야"

"응"

"그 때. 내일 나는 너에게…"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가자"

지현누나와 헤어지고나서 난 오늘도 평범하게 수업을 듣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에 나는 매일같이 밥 먹듯이 해왔던 수업시간에 자는 것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을 출석부를 들춰보이며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하는 행동. 나는 머릿 속에 이 곳에 있던 추억들을 하나라도 더 담아두고자 이러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8개월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아니 학교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들은 나를 외톨이취급하였기에 나는 이들의 이름을 억지로라도 기억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내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비참해지는 기분을 느낄 것만 같아서였다. 이들은 나를 싫어하는데 기억하려 하면 뭐하냐고. 일종의 반발심이었다.

하나 하나 이름이 들어온다. 1학기 때 안경을 쓰던 회장의 이름도 드디어 알게되었다. 나는 기억저장창고에 차곡차곡 기억한다. 이 학교에 있는 시간내내. 나는 이들의 이름을 노트에 써내려가며 기억을 하였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남지 않았으니까. 비록 내가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잊혀지는 존재가 될 테지만...나의 변덕이랄까. 아무튼 나는 여태까지 하지않던 행동들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며 이상하게 쳐다보는 아이들. '쟤 뭐 잘못먹었나?'라는 눈빛이다.

방과 후. 애들이 모두 없는 시간에 난 혼자 남아있었다. 자다가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난 일부러 남은 것이었다. 이 빈 교실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기억하고. 기억한다. 내가 사라지면서 난 추억을 안고 떠날 것이다.

'인간'으로써. 이미 죽어버린 시체가 아니라 제대로 인간으로써의 생각을 하고 싶었다.

이러한 내 자신이 모순덩어리이지만, 글쎄? 나는 눈을 감고서 내가 앉는 책상을 쓰다듬으며 이 교실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한다. 내 머리에 남아있는 그나마 남은 기억들을 되새겨본다.

내일은 학교를 오지않는다. 수능일이어서 말이지..

아직은 '안녕'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른시점이다. 그래서 내가 떠나기 전까지 난 이러한 행동들을 반복할 것이다. 인간은 반복해야 기억을 잘하게 되니까말이다.

이러한 하찮은 찌질이의 추억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겠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한 줌의 미소를 흘리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다가오는 이별에 대한 준비를 난 더 해야했기에.

집에 들어오자, 민정이가 나에게로 후다닥 뛰어나왔다.

"오빠!!"

유난히도 급한 그녀의 목소리.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나 싶었다.

"대체 왜 그래?"

"언니가…언니가…"

"언니…?"

"서현언니가…서현언니가…"

"뭐…?"

"서현언니가…쓰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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