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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3. Betw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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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부류의 사람이 있다.
'과거에 집착하는 자'. '현재에 안주하는 자'. '미래만을 바라보는 자'.
'현재에 안주하는 자'는 가장 현실적이고.
'미래만을 바라보는 자'는 가장 몽상적이고.
'과거에 집착하는 자'는...가장 어리석다.
나는 '과거에 집착하는 자'였다.
그래서 난 어리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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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추웠고 학교 등교하는 길에는 이제 낙엽이 떨어져내려가고 있었다. 완연한 가을이라고 보기에는 바람은 너무 차가웠다. 11월 초인데 이상기온 탓인지 유난히도 올해는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
"춥다…"
지현누나도 나와 함께 걸어가면서 추운날씨때문에 몸을 움츠린다. 현재 나와 지현누나는춘추복만 입은 상태. 이렇게까지 날씨가 추워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낮이라면 괜찮지 모르겠지만 현재에는 춘추복으로도 무리였다. 동복을 입어도 꽤나 추울 것 같았다.
낙엽이 진 길. 날씨는 쌀쌀.
외로움과 우울함에 싸여진 이 풍경. 마치 내 마음을 대신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온기가 전해져왔다.
"지현누나?"
지현누나가 내 손을 잡고 있었기때문이었다.
"이러면 따뜻해져"
그녀는 나와의 거리를 좁히며 나의 몸과 자신의 몸을 붙여왔다. 이러면 연인같다. 나야 지현누나같은 엄청난 미인이 여자친구였다면 땡큐였지만 내 처지에 그러한 것을 바라기에는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더 꽈악하니 잡는다. 학교가는 길에 한국고에 다니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는 우리들을 쳐다보는 데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 사실 이러면 오해만 받는 것이 쉽상일텐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이것을 전혀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해?"
"뭐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하였다. 이상한 시선을 받으면 자연스레 몸이 반응하는 것은당연하였고 그리고 난 지현누나가 나 때문에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을 원치않았다.
"이렇게…손 잡는 거"
"…"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그렇지만 우린 '남매'니까…괜찮아"
"지현누나"
사실 나 자신도 이상해지긴 했다. 이렇게 지현누나와 손 잡는거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도내가 떠날 날이 머지않음에서였을까. 왠지모르게 거부감이 일어났다. 자꾸만 미망이 생겨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녀는..알고 있을까? 이 '손 잡는 행동'만을 해도 씁쓸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난…"
그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내 앞에 와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지현누나의 크나큰 눈망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시선조차도 부담스러웠다.
간절해하면서도..기뻐하는 그녀의 눈빛을 보아도 난 '죄악감'을 느낀다.
이제는 '기피'였다. 어떤 것을 보아도 피해버리고 싶었다.
'정을 주지 말자'는 생각에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쉽사리 무너져버려서 이번엔 '쳐다보지도말자'는 주의였다.
그렇지만 난 약한 존재였다. 의지력따위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었다.
"정우"
"…응?"
"얼른 가자"
환하게 그녀가 나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과거엔 그녀의 미소를 보면 난 '빛'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눈부시고 환해서 나 자신도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손을 내밀어도 이 빛은 가질 수 없었다. 닿을 듯 말 듯하면서도 결코 닿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절망해버려서 난..'도망쳤다'. 스스로 어둠이라 자책하고 자기 자신을 나락의 구렁텅이에 몰아세우면서.
피하고 싶지만 바라보고 싶다.
가지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갖고 싶다.
모순적인 마음이 뒤엉켜서.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난 떠나야하는 자. 그러기에 갖질 못하고 애초에 그러한 꿈꿀 수도 없었다.
난 '그림자'였고. '어둠'이니까.
'빛'의 뒤에 항상 존재한다. 동전의 양면을 보듯. 지현누나를 비롯한 자매들이 '빛'이었다면 난 그들의 뒤에 존재하는 자였다.
"무슨 생각해?"
"어…어…?"
"정우…내 말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하는 거야?"
"으…응"
"그럼 얼른가자 정우. 학교 늦겠다"
요새 지현누나가 밝다. 조용하고 어찌보면 '차갑다'는 인상을 받는 그녀였는데 그녀에게변화란 것이 찾아온 듯 싶었다. 민정이와 서현누나보다는 아니지만 예전보다 확실하게 밝아졌다. 다행이었다. 지현누나가 조금은 바뀐 것 같아서.
내가 없어져도. 그 웃음은 변치 않기를...
나는 학교 가는 길 내내 바라고 있었다.
"정우 조금 있다가 봐"
"…어?"
그녀는 살짝 미소짓고는 도도도 자신의 교실로 가기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그러한 그녀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가 피식 웃고는 나 역시 교실에 들어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앉은 창가쪽 맨 뒷자리.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가 이틀전 다시 자리바꾸기를 해서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내 옆자리는...비어있었다.
'연세희'. 그녀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 책상들의 주인은 모두 하나씩 정해있었는데 나의 옆에 있던 이 책상만큼은 주인을 찾지 못하였다.
'…연세희'
나의 친구이자. 나에게 사랑을 준 그녀. 나를 좋아해준 그녀.
내가 어리석은 탓에...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떠나보내야했던 그녀.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했다고 자위를 하면서도...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넘기려고 해도 도무지 넘겨지지 않는다.
내가 어리석었기에...이러한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과거'를 후회하고. '이별'을 후회하고.
생각을 하면 할 수록...과거로 인한 나 자신의 자괴감은 미친 듯이 닥쳐왔다.
'어차피 난 이런 놈이야…'라고 합리화를 해보아도..애써 웃어보아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수마가 밀려왔다. 책상에 서서히 엎드리면서. 나는 또다시 수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회색의 먹구름이 낀 하늘. 그 하늘에서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도 아니었고.그렇지만 한 없이 우울하게 보이기만 한 세계.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황무지만이 보일 뿐.
이 곳은 대체 어디일까.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 곳이 대체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
길을 걷다보면 유난히도 눈에 익은 썩어버린 고목이 있다. 나뭇가지조차도 별로 없는 이 나무가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전부였다.
"안녕"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또 만났네"
"…너는…"
보이지않는다.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틀림없이 들려오는데...
"대체 언제쯤 되어야 너랑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대체 무슨…"
"아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지도"
세계가 흐릿해진다. 항상 이렇게 똑같이 끝을 맺는다.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조금있다가 봐. 네가 이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뭐…?"
"안녕. 또…"
"…끄응…"
고개를 들어보았다. 보이는 것은 황무지가 아닌 황량한 교실이었다.
"얼래…?"
왜 애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냐...나는 위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5시 10분…?"
4시를 넘었다면 분명히 7교시가 끝났을 텐데 설마...나...
"학교에 있는 내내…계속 잔 거?"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정확하게 10초가 걸렸다.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수업시간을 풀로 잔 적은 많이 있었지만 요새 그러지는 않았었는데..
"…"
나는 빈 교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이다 이렇게 혼자서 빈 교실에 있는 거.
적막하고. 조용해서..그래서 외로운 이 교실.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채워지면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밝던 이 곳이 이렇게나 고독했다.
이제는 이 교실에 있는 시간도..얼마 없는데...
"아직도 애들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내가 이름을 제대로 외운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안경을 쓴 반장도.운동을 잘하는 부반장의 이름도.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여자학생들의 이름도. 나를 항상 시체라 불러주던 아이의 이름도 난 알지 못한다.
"역시…무관심이려나…"
그래. '무관심'이다. 내가 '사람'에 대해서 알고자 했으나 그것은 전부 다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작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여느 때처럼..과거와 똑같이 행동한 것이다.
사람들을 그저 '스처지나가는 인연'으로 바라보고. 그 인연을 잡으려 하질 않는다.
"결국 '변화'한 것은 전혀 없었어…"
나도 '변화'해야 된다고 많이 생각해왔었는데..결국에는...
"똑같네"
멈춰져있다.
항상 사람들의 시계는 째깍째깍 돌아가는데..나 혼자 초침이 멈춰져있다.
그 초침조차 멈춰버린 이 정지된 세계에서 외로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후후…"
자조적인 웃음. 이것은 명백한 나 자신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
시계는 멈춰있다.
초침마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움직이려하질 않는다.
차창너머로 보이는 이 저물어가는 해는 나를 의미하는 것일까.
황혼이 더욱 붉게 빛나보였다. 마치...'마지막'을 고하는 듯이 빛나는 이 여명이...
유난히..슬프게만 보였다.
"가자"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복도도 창문도 온통 붉게 물들인 이 학교 건물을 빠져나간다.
"으 추워라…"
아침과 밤에는 이렇게 추운 것인가...어서 집에 돌아가야겠다.
학교교문을 나서려하는데 교문 근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얼래…?"
"…정우"
"지현누나가 어째서…"
"늦었잖아"
그녀는 삐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누나 먼저 가면 될 것 가지고…"
"같이가고 싶었으니까…"
"…지현누나…"
"등하교 같이 하고 싶었으니까"
"…"
"나랑 함께 가기 싫어?"
"그건 아니지만…"
"만약에 네가 더 늦었다고 할 지라도…나는 얼마든지 2시간 3시간…그 이상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까…"
"…"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정우랑 함께라면"
황혼을 등지며 그녀가 웃는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아름답고..아름다웠다. 마치 뭐라 말할 수가 없는..그런 아름다움.
그렇게 우리는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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