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77화 (177/318)

0177 / 0318 ----------------------------------------------

Part 11. Sad Confession

================================================

서현누나는 아무것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어찌되었든 화제를 돌리려고 빙긋 웃으며자신이 새로 사왔다는 옷을 가지고 나왔다.

"어때~이뻐?"

"응…이뻐"

"헤헷~"

서현누나가 어떤 옷을 입어도 이쁜 건 만고의 진리이자 사실이었다.

"정우있는 앞에서 입어볼까?"

"…마음대로"

사실 보고 싶기는 하다. 서현누나의 옷을 입은 모습을 말이지..

"부우!! 정우는 내가 입는 거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또 삐졌다. 이 누님...이거 어쩐다냐...

"칫! 정우는 바보! 멍텅구리!"

"…에휴…"

"해삼!멍게!말미잘!바보오타쿠!"

마지막의 바보오타쿠는 뭐지...그런데 꺼흑..서현누나마저 나를 바보오타쿠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충격적이다.

"앞으로 정우 있는 앞에서 새로 산 옷 보여주지 않을 거야! 흥!"

"…미안해 서현누나"

"흥이다~!"

"죄송합니다 서현누님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서현누나는 한번 삐지면 오래갈 것만 같은 왠지모를 불안감에서였다.

"내가 옷 입는 거 보고 싶은거야?"

"넵…절대로 보고 싶습니다…"

"정말루?"

"넵…정말이구말구요"

"히힛~♡ 내가 특별히 정.우.만.을위해서 보여줄게! 잠시만 기다려!"

서현누나는 금방 화가 풀린 듯 헤헷하고 귀여운 미소를 짓고 옷을 갈아입으러 잠깐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보니 이건 대체 뭔 짓거리야..무슨 패션쇼도 아니고...

"…에휴"

한숨은. 늘어만 간다.

"짠! 어때?"

멍하다. 어째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었다가 화사한 원피스를 보니 이건 당연히 엄지손가락을 척하니 들고 'good!!!'이라고 얘기해야할 판이었다. 지현누나가 흰색 원피스를 입고있는 것은 본 적이 있어도 서현누나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은 처음보는 일이었다.

지현누나와는 다르게..뭔가 어른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고 해야할까..? 지현누나는 소녀의분위기가 났었지만은...

빙그르르 한 바퀴 회전을 하며 포즈를 잡고 있는 서현누나. 모델을 해도 되겠구만...

"부우!! 감상평은 어떠냐구!!"

"…최고다"

"우웅?"

말 그대로 최고다. very good. best. excellent!! 영어가 후달리는지라 그 이상의 감탄사를넣을 수는 없었지만 한 마디로 최고였다. 진짜 미국유학생활때 서현누나를 찼다던 그 남자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순간이었다.

"최고야 서현누나"

"꺄아~♡"

그러자마자 나한테 와락 안겨드는 서현누나. 그녀에게서 몹시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를 뿌렸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정우야"

"응?"

"너는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 있어주면 돼"

"…??"

"그냥…지금 있는 그대로…영원히…"

그녀는 자꾸 나에게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서현누나는 뭔가 내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데...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나와 관련된 일임을 눈치가 둔한 나도 알 지경이었다.

'누나는…나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알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내가 기억못하는 일은 그녀가 알고 있다.

"서현누나"

"웅?"

'혹시 내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라고 얘기하려다가 참았다. 내가 그런 얘기를 꺼낸순간에 그녀의 안색은 어두워질 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그런 어두운 모습의 서현누나를 보기 싫었다.

지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는 서현누나가 좋았다.

"아니…그냥 이뻐서"

"에…?"

"이쁘다고해야할까 귀엽다고해야할까 어찌되었든…뭔가 이쁘다고 생각했어"

"…"

그녀가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그런 건가..?

"정말…이뻐?"

"응"

"정우가 반할만큼…이뻐?"

"…응"

"…"

내가 만약 가족이 아니고 남이었다면 당장에라도 반했다. 뭐..남이었다해서 '저랑 사귀어주세요!'라는 용기의 고백은 못할 뿐더러 이런 나같은 놈은 서현누나와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런 초폐인오타쿠한테 여자친구란 하늘에 별 따기이니까 말이지..누가 좋아해주겠냐고..나는 게다가 왕따이고..주위엔 아무도 없고..성격도 또라이고..에휴..가면 갈수록 침울해지고 우울해진다. 혈기왕성한 18세. 나도 옆구리가 시려울 때가 많다.

초등학교 때, 회색빛 눈을 얻은 이후부터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주는 여자애는 정말로 없었다. 내가 준비물을 빼먹어서 옆자리에 있는 여자짝꿍한테..'저기..색종이 좀..'하고 조심조심 얘기를 꺼내도..

'꺄악!!'하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말이야..옆자리인데도 책상이 붙은 경우가 전혀 없었다. 내가 두려워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지.

게다가 그 때에는 아이들에게 단체구타를 맞은 적이 많았다. 학교 으스스한 곳에 끌려가서 마음에 들지않는단 이유로 처맞고나서 교실로 돌아오면 남자애들은 물론이고 여자애들까지 경멸어린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첫사랑이 고등학교 1학년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때까지 여자애들도 전부 다 나를 싫어한다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변명한다. 이런 인생암울한 놈에게 좋아해주는 여자아이들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 1때 들어와서야 정시하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었지..그 전에는 내가 말을 걸려고 해도 '미안!'이라고 도망치는 것이 다반사이고 어떤 경우에는 '꺼져!'라는 소리까지들었다.

지금은 행복한 거지 뭐...그나마 지금에 들어와서야 여자애들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랑은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 망정이지..

그런데..누나의 얼굴이 유난히 빨갛다. 뭐지..

"…왜 그래?"

"으…우…웅…"

뭐지 이건...

"서현누나?"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면 상당히 의심이 가는 데요..내가 그런 얘기를 하니까 창피한 건가..? 뭐 하기야 나 같은 놈이 반해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나는 최저중의 최저인데. 아니 애초에 친동생이잖아.

"…??"

"하하…아하하…"

"대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래?"

"으응…그렇지…"

누나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다.

그 이후에 서현누나와는 즐겁게 대화를 하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왔었냐라고 이 누나한테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라며 나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얘기해주었다.

나한테 있었던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미연시에 빠져사는 오타쿠짓을 하는 초절정덕후인 나의 이야기밖에 더 없지 뭐..

"그러니까…미연시 있잖아…"

"응"

"정말로…재밌어?"

"응. 당연하지"

요새 미연시를 안 하다보니 금단증상까지 생겨났다. 머릿 속에서 자꾸 뭉게뭉게 히로인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나한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서 와요~'라고 얘기하는 것같았다.

완전 정신병자다. 이만하면 정신병 저리가라다.

"…정우야"

"응?"

"정우의 삶을 바꿔야 되겠어"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요..내 삶을 바꿔야 된다니...

"옛날의 정우는 이러지 않았다구!!"

대체 옛날의 나는 어땠는데요..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구만...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가 안되는데요...

뭔가 크나큰 결의를 다지는 서현누나.

"지금부터 박정우라는 인간을 개조하겠어!"

"…하아?"

내가 로봇도 아니고..게다가 개조라고...? 그리고 서현누나는 무슨 수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선동자들이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 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섰다.

"이름하여 '박정우인간개조계획'!!!"

벌써 이름까지 정해뒀습니까요..무슨 게놈프로젝트와 같은 크나큰 프로젝트인양..

"흐아…"

어찌되었든 이것때문에 내가 피곤해질 것 같기만 하다.

'대체 몇 시간째냐…벌써 밤 12시야…'

서현누나는 침대위에 날 앉혀놓더니 서현누나의 고유스킬인 '훈육모드'를 실행하였다. 이스킬의 위력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인지라 '괜찮아'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도 그녀는 전혀듣지않고 나를 몰아붙였다.

"미연시가 아무리 좋다고해도!! 밖으로 안 나간다는게 말이 되는거야!!!"

"그게 아니라…"

"태양빛을 쬐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도 광합성을 해야한다구!!!"

식물이야..? 식물인 거야..?

"비타민D! 이게 성장기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나는 성장기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만...?

"어찌되었든! 미리 경고했다시피 미연시는 일절 금지야 알았어!!!"

"넵…"

히로인들이여..나는 아무래도 너희들한테 돌아가지 못할 것 같구나...끄흑..!

"그런데 있지…"

"…응?"

"미연시가 어떤 게임이길래 정우가 이렇게 흠뻑 빠진 거야?"

나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졌다. 내가 미연시에 대해서 아무리 포장을 하고 포장을해도 19금게임이라는 것이다.

"하하 그게…"

"무슨 게임인데 그래~? 웅~?"

"…아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넘어가려고하지만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아 맞다! 나 곧있으면 중간고사기간이고 이만 누나도 피곤한데…"

"부우~"

볼 부풀리고 도망치려는 나를 가로막고 있는 서현누나.

"말하기전에 못 가!"

젠장...

"그러니까 결국에는…19금이라는 거지…?"

"아하하…19금 아니야…"

"딱 얘기하는 거 봐서는 19금같은데…?"

이럴 때 나에게 말주변이 없다는 것을 저주했다. 애써 둘러대고 둘러대고 포장하고 포장해도 서현누나가 그걸 눈치채고는 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탓에 19금게임이라는 것이 걸려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뭐라고해야할까…공략하는 거야!"

"공략…? 뭘 공략하는 건데…?"

"그러니까 RPG게임의 보스같은 거 있지…? 그런 것처럼 공략하는 거야!"

"그러니까 뭘 공략하는 건데~?"

"…끙…"

여자들이라고 하면 100%실망한다...그렇다고 여기서 빠져나갈 틈도 없고..dead end인가이거...

"…히로인"

"히로인? 여자주인공?"

"…그런 게 있어"

"뭔데? 대체 뭔데~?"

'끄아아!!!'

"그냥! 연애시뮬레이션게임이야!!!!!!"

아...

이거 뭐다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니 이게 미연시의 본질이긴한데..

내가 왜 이걸 얘기한 거지..?

"연애…?"

결국 내 무덤을 팠구만..에휴...

"그냥. 스토리있고. 여자들이랑 연애하는 거"

자기 입으로 술술 불어버린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기 정말 껄끄럽다. 뭔가 야동이나 야한 것들을 보다가 걸린 느낌같다(한 번도 걸린 적은 없었지만) 아...야한 거 맞지...

"후응…여자애랑 연애하는 거라…"

"…"

넵..저는 18세 옆구리 시려운 솔로입니다요...끄흑..

"정우야"

"…넵"

"그 동안 많이 외로웠어?"

"…"

서현누나의 모습을 보자니 천상에 내려온 자애로운 천사같다.

"…정우야"

"응?"

"…너를 바꿔줄게"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