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76화 (176/318)

0176 / 0318 ----------------------------------------------

Part 11. Sad Confession

=================================================

터덜터덜 집에 들어왔다. 요새 밤 늦게 집에 들어온다며 민정이의 구박이 잦아졌다. 이 녀석..내가 늦게 들어오니까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서현누나는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온 후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제 10월인가...2학년도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고 무엇보다 지현누나의 수능이 1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잘 봐야 할텐데...뭐 지현누나야 전교권 성적이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겠지...

"정우야~"

서현누나는 지친 표정에도 방실방실 웃으며 내 방에 들어왔다.

"왜 서현누나?"

"놀아줘~"

"…엉?"

"민정이는 tv보느라 안 놀아준단 말이야!"

볼을 부풀리면서 민정이에게 툴툴대는 서현누나였다. 서현누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이후부터 그녀를 오랜만에 보는 듯 하였다.

"아하하…"

서현누나는 정말 귀엽기 그지 없다. 옛날에는 엄마같은 느낌이 많았었는데..서현누나의 나이는 거꾸로 먹는 것인지...

"우웅~~놀아줘~"

내 팔짱을 끼며 놀아달라고 칭얼거리는 서현누나를 보면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는 잘 하고 왔어?"

"낚였어!!!"

"하아?"

"시급이 13000원이라고 거짓말했어!!!"

"…그 13000원은 뭔데?"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정식고용직원이래!"

하아..어쩐지 시급이 너무 높다했다. 아무리 시급이 높아도 이건 파격대우가 아닌가해서 의문점이 들었었는데...역시나...

"누나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아니고?"

"우우웅…"

뭐냐 이거..설마 인터넷에서 봤을 때 대충봤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시급이 얼마인데?"

"…7000원"

에고고...

"일은 편해?"

"맨날 서서 일하느라 다리가 아프긴하지만…괜찮아"

"무슨 일 하는데?"

"그냥…손님계산해주고…청소하고…"

"커피알바라면서? 커피는 안 만들어?"

"거기에 따로 바리스타가 있어서 그런 건 필요없대…하지만!!"

"…하지만?"

"맨날 손님이나 같이 일하는 알바생이 나한테 전화번호있어요?라고 추근거려서 불편해"

"…누나가 이쁘니까 그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서 사장님이 너 덕분에 매상이 올라간다고…막 오래하라고…"

"그럼 보너스같은 건 줘야되는 거 아니야?"

"시급을 올려준다고는 하지만…"

"후우…"

이건 내가 뭐라 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뭐라 조언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우야"

"응"

"놀아줘"

"누나 힘들지 않아?"

"심심하단 말야!!"

'지친 거랑 심심한 거랑 별개입니까…'

"에휴…"

"부우!! 정우도 안 놀아준다 이거지!!!"

서현누나는 토라진 표정으로 삐진 듯 고개를 홱하니 돌려버렸다.

'이거 어쩐다냐…'

사실 내 기분은 그리 좋지 못한 상태였다. 우울하다고 해야할까...윤혜연. 그녀를 기억하고 떠나보내면서 마음은 조금 심란했었다.

'그래…기분전환이라도 해두자…'

자꾸 떠나보낸 사람을 기억하면 안되지..나는 잘 가라고 그녀에게 얘기했으니까. 다시 나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잊지 말자고 마음 속의 다짐을 해두었다. 나마저도 그녀를 잊어버린다면 안된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를 기억해야한다. 어렸을 적의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한다. 오로지 나만이 그들을 기억해줄 수 있기에. 잊혀진 자의 기억들을 짊어지고 살아가야하기에. 내가 회색빛 눈을 얻게되면서 저절로 생겨난 일종의

'과업'이자 '책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현누나"

"왜!"

하아..일단은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어떻게 놀래?"

"…놀아줄거야?"

"응"

"헤헷~"

바로 기분 좋아진 서현누나. 뭔가 단순하다...

"정말 놀아주는 거지?"

"그렇다니까. 뭐하고 놀건데?"

"우웅…"

그냥 무턱대고 놀아달라고 했습니까요..

"…보드게임!"

"엥…?"

"우리 집의 보드게임 있지 않아?"

"보드게임이라…우리집에 뭐가 있는데?"

"우웅…"

애초에 우리 집에 보드게임이라는 것이 있었나..?

"…일단 있는지 찾아볼까?"

"웅!"

에휴...서현누나의 이러한 행동은 귀엽기는 하지만 때로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현누나의 행동에 나는 삐질삐질 식은 땀만 흘릴 뿐이었다.

"어디부터 찾을까~아!!"

"…왜?"

"내 방에 있지 않을까?"

"누나 방에…?"

"옛날에 나랑 정우랑 자주 보드게임 했었잖아!"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회색빛 눈'을 얻기 이전의 기억들은 거의 말소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너무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까먹은 것치고는 생각조차 나지않았다. 생각나는 거라면..

어라...뭐가 있었지...?

"남아있으려나…거의 방을 건드리지도 않았으니 남아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어서 찾자!"

나는 왠지 과거의 기억들을 자꾸만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에는 줄곧 혼자였었던 기억들 말고는 행복한 기억들이 사라져가는 것 같은 알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분명히..가족들과 행복하게 보냈던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생각이 나지 않아...

"정우 뭐해?"

"으…응. 어서 찾아야지"

일단은 서현누나 방에 가서 보드게임이나 찾아보아야겠다.

서현누나의 방에서 여기저기 구석구석 뒤지지만 찾지 못하였다. 게다가 찾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한 것 같기도하고..

"히잉…분명히 있었는데…"

뒤져봐도 없자 서현누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럼 다른 거 하고 놀면 되지"

그런데 누나가 분명히 토익준비를 한다고 했었는데 토익준비 안 하나...?

"우웅…"

다시 고민에 빠진 서현누나.

"그냥…얘기나 할까?"

나는 툭하니 내뱉었다. 서현누나는 마땅히 어울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해하는 것 같으니까 말동무라도 되어준다면 괜찮겠지 싶어서 말했다.

"응! 정우랑 얘기하고 싶은 거 산더미처럼 많아!"

서현누나는 언제 실망했냐는 듯 바로 말을 바꿔버렸다.

"…그래?"

그렇다면 나야 다행이다.

"그럼 정우네방에서 얘기나 하자!!"

그런데..뭔가 불안하다. 서현누나가 나한테 짓궃은 말만 할 것 같다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에이 아니겠지..서현누나는 그런 짓궃은 사람이 아니고 착한 사람이니까...

"정우 첫사랑 얘기 좀 해줘!"

그 말 당장 수정한다. 서현누나는 내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앉자마자 바로 이 질문을 해주셨다. 저번에도 서현누나가 내 첫사랑을 궁금해하는 눈치였는데..나는 서현누나와 비슷하다고 얘기하면서 말하지 않았었다. 서현누나와 마찬가지로 아픈 기억이기 때문에...

"…얘기했었잖아. 꽤나 아픈 기억이라고"

"그래도…듣고 싶어"

"…"

"다름아닌 정우 첫사랑 얘기인걸. 듣고싶어"

"후…"

서현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 첫사랑얘기가 뭐가 궁금하다고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그렇다고 얘기해주기에는 너무나도 그럣다. 첫사랑얘기를 하면서 '그 사건'얘기를 해야하는데..그것마저도 얘기한다면 그녀가 충격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 얘기해주지 않는다고 내뺄수도 없고..어쩔 수 없다. 그냥 최대한 숨기면서 얘기하는 수 밖에...

"서현누나"

"웅?"

"정말…듣고싶은 거야?"

"…응. 전에는 그냥 나랑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하니까 그런가보다 했었는데…왠지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더 궁금해져서. 게다가…나랑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하니까…"

"그렇군…"

"그냥 얘기하면서 털어내라구!"

"알았어. 그러면 맨 먼저…"

"첫사랑 이름이 뭐야?"

"…정시하"

"시하? 이름이 조금 특이하네. 이뻤어?"

"…응. 이뻤어"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 제일 이뻤어?"

"그건 아니야. 그냥 단순히 외모로만 보자면 지현누나나 누나가 더 예뻐"

"후응…"

"그냥 고등학교 1학년때 일이야…"

"첫사랑이 작년이라고?"

"응"

"정말루?"

"그렇다니까"

"나 아니었어?"

"…그건 무슨 소리야?"

"맨날 나한테 '서현누나 사랑해!'라고 말한 게 누군데?"

"…?"

"히잉…기억못하나보구나…"

"…내가 그랬어?"

"응!"

"…아하하…"

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 정우가 얼마나 귀여웠는데…맨날 졸졸 나 따라오면서 놀아달라구…"

"…내가 정말로 그랬다고?"

"응! 언제는 '나중에 커서 서현누나랑 결혼할 거야!'라고 얘기했었지 아마?"

"푸웁!!!"

나...어렸을 적에 대체 뭐였지..?

"히잉…그 때 정우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데…"

사랑스러웠다고? 내가..? 이런 초폐인오타쿠가..?

"아하하…서현누나는 가족이니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무마를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어렸을 때 서현누나한테 그랬다고? 서현누나를 좋아했었던 기억은 나긴 하지만...내가 그런 말까지 얘기한 기억은 없었다.

"정우야"

"응"

"과거의 기억…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거의 없어"

"…"

서현누나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이었다.

"정우야"

"왜?"

"…스스로를 용서해야해"

"…?"

내 자신을...스스로 용서해야한다고...?

"그래…너는…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니...?

"미안 정우야. 내가 딴 소리를 많이 했지?"

"…???"

"아 맞다! 정우야 내가 새로 옷 산게 있는데 한번 볼래…?"

누나는 왜 갑자기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 거지...? 혹시 내 과거의 기억에 대해 뭐라도 아는 것이 있나..?

대체...서현누나는 왜...

=====================================================

조회수도 30만이 머지 않았군요..정말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30만 돌파했을 때에는...정말로 4연참...할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