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72화 (172/318)

0172 / 0318 ----------------------------------------------

Part 10. Longing

------------------------------------------------------

믿지 말았어야 했어.

날 웃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들을 믿지 않았으면...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텐데..

이렇게까지...미워하고...

그리워하지 않았을텐데...

------------------------------------------------------

♬~♩~♩~♬

새벽내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조용하고 몽환적인 음악을 듣다보니 자연스레 꾸벅꾸벅 고개가 숙여져 당장에라도 침대에 누워서 잘 기세였지만 그렇다고 잘 수는 없었다.

꾸벅..꾸벅..

졸음을 견디려고해도 헤드뱅잉을 하고 하품도 길게 늘어트리며 눈을 비빈다.

"그냥 자 버릴까…"

그러기에는 두려웠다. 밤마다 나오는 악몽이. 땀이 비오듯 쏟아질만큼 너무나도 생생했던 그 악몽이 너무도 두려웠다.

"벌써 이런 시간…"

새벽 2시. 깜깜하기 그지없는 밤. 창문은 거센 비에 물기가 촉촉히 있었고 구름이 달을 가려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딸칵.

그 때 현관문이 열렸다. 지현누나가 학교에서 공부하였다가 돌아온 것같았다. 보통 학교에서는 11시나 12시까지 하지만 누나는 그거를 다 하고 사설독서실에서 가서 더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수능을 하는 11월까지 앞으로 2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 지현누나는 여전히 힘든싸움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준 도시락 먹었으려나...

똑똑.

"지현누나? 들어와"

"정우"

기나긴 검정색 생머리의 교복을 입은 그녀. 피곤해보이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잘 갔다왔어?"

"응…"

"저녁은 잘 먹었고?"

"응…잘 먹었어…고마워 정우"

다행히도 선생이 그녀에게 도시락과 우산을 전해준 것 같았다.

"잘 먹었으면 다행이야…"

"정우"

"응"

"잠깐 옷좀 갈아입고…"

"알았어"

"하암~"

하품은 끊임없이 나왔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놈이 하품을 길게 늘어트리면 무슨 귀신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 같다며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대낮에 공포영화를 찍는 것 같다고..특히나 마음 약한 여자애들이 말이지...

"정우"

옷을 다 갈아입은 모양인지 그녀가 다시 내 방에 들어왔다. 분홍색의 파자마. 크으..남자들이 보면 절로 눈호강한다는 그런 여신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여기에서…자도 돼?"

"또?"

"응…"

이제는 여기가 다른 가족의 침실인 모양이다. 내가 잠을 안 자니 침대는 서현누나나 지현누나가 차지하여 잠을 잔다. 에고..내가 다시 방을 옮겨야지 원...

"여기가 편하면 자"

"그럼…정우도 같이 자자"

"엥…?"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여...같이 자자니..? 재워달라는 게 아니라 이번엔 같이..자자고?

"응…앞으로도 정우랑…계속 잘 거야…"

허허...이건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신의 농간도 아니고...어떻게 다 큰 남매끼리 같이 자자는 거야? 이러면 무슨 부부같잖아..지현누나가 아내라면 아주 행복한 상황이겠지만..이건 뭐...

그런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누나가 부담스러웠다. 정확하게 얘기해서 내가 누나에게 켕기는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꿈에서 지현누나와 키스를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꿈이라고는 해도..나는 그녀을 품에 꽉 껴안고..키스하고...우리가 남매라는 죄책감도 없이..그녀를 한 사람의 여자로써 봐 버렸다.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욕망을 품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한 야구장에서의 키스가...계속 내 머릿 속에 남았던 탓에 그런 꿈도 꾸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벤트'라고 수 없이 자위를 해보아도. 지우려고 노력해봐도 되지를 않았다.

시하처럼 짧게 키스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 때 만큼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과 순간의 달콤함과 황홀함에 빠져버린 나였다.

'금단의 마약'과도 같이.

하아..나 대체 왜 이러냐...내가 지현누나를 '이성'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지현누나는 사랑하는 사람있다는데 이런 헛된 생각 가지고 있으면 말이 안 되지. 안 되는 거야 박정우.

잊어버리는 거다. '친누나와 키스를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거다.

그렇다고 잊혀지는 것도 아니었고. 낙인처럼 더 깊숙이 생각 나 버린다.

"혼자선 잘 못자는 거야…?"

지현누나는 수능 스트레스때문에 잠을 잘 못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와 같이자려고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아랫침대쓰고 있는 민정이와 같이 자면 되겠지만 민정이와는 관계가 급어색해져서 얘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응…잠이 잘 안와…"

"서현누나랑 같이 자자고 하면 되잖아"

"서현언니는…안돼"

"안되다니…?"

"…그런 게 있어"

대체 무슨 이유다냐..같은 여자끼리 자면 편하지 않나..?

"그리고 정우가 같이 있으면 잠이 잘 오는 걸…"

나랑 같이 있으면 잠이 잘 온다고..? 이런 귀신같은 놈이 함께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내가 그럼 계속 재워주면 돼?"

설마 자장가를 매일 불러달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러면?"

"…같이 누워서 자는 거야"

나를 확실히 믿는다는 듯이 얘기하는 지현누나.

"나 잠 안자는 거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러는 거야?"

"내가 여태까지 재워달라고 했었지만…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가 안돼?"

"정우"

"응"

"전에 얘기한 적이 있었지? 자신도 변화를 해야한다고"

"변화…?"

"그래서 잠을 자지 않았어?"

뭐지...뭐지 이건..?

내가..그런 얘기를 '현실에서' 지현누나에게 한 적이 있었나...?

무언가..내가 확실히 착각한 것이 있어...

뭐지...대체 뭐지..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지..?

그리고 이건...

내가 지현누나에게...'꿈에서' 얘기한 것인데.....

"…기억이…안 나는 구나…"

"…?"

"정우"

"어…"

"여기서 잘 테니까 정우도 같이…"

그녀는 자신의 베개를 들고와서 침대에 눕고 이불을 덮었다. 결국에는 함께 자야하는 것 같았다. 지현누나도 한 고집 한다니까..? 그런 초롱초롱한 표정으로 부탁을 하면 내가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그녀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자 어쩔 수 없이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침대에서는 도저히 함께 잘 수 없어서 침대대신 조그만 소파에 몸을 눕혔다.

"정우…"

"나는 여기서 잘게"

"여기로 와…"

"같이 자면 누나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난 괜찮으니까. 같이 자자…"

이러다가는 지현누나도 나도 실랑이를 벌이느라 날밤을 샐 것 같았다. 지현누나는 내가 옆에 있어야 안심을 하고 자는 것 같으니..결국 이것마저도 항복해버리고 나도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이대로 뜬 눈으로 지새워야하나…?'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누운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

그리고 문제는 지현누나가 내가 눕자마자 꼬옥하니 껴안아버렸다는 거지..

"따뜻해…"

비가 와서 몸이 추워진건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녀가 내 몸을 완전히 감싸안아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의 숨소리도 들릴만큼 너무나도 가까이 우리는 맞닿아있었다.

"정우…"

"…응"

"정우 품…너무 따뜻하다…"

"…지현…누나?"

"잘 자…정우"

"…누나도 잘 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짓고 스르르 다시 눈이 감겼다.

그녀의 얼굴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지척에서 보이는 그녀의 잠자는 모습은 언제보아도 정말로 예쁘다.

"…후…어쩔 수 없나…"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머릿결도 부드러워서 쓰다듬는 감촉도 좋아서 자꾸만 쓰다듬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더 껴안으려고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서 기분이 이상야릇해지긴 하였지만...

이렇게라도 그녀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잠시라도 그녀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다. 잠깐의 시간을 통해..다시 그녀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재충전을 할 수 있게 된다면..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그녀가 진실로 행복해지기를 바라고있기에'

삐르르릉...삐르르릉...

새벽 6시를 알리는 알림음은 어김없이 들려온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둡기만 한 방.

새벽내내 그녀가 나를 껴안은 채로 보넀다.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껴안은 것을 풀어줄줄 알았지만 그녀는 이 상태 그대로 유지를 한 것이다.

몸도 그녀가 껴안는 바람에 묶여버린 상태. 그래도 그녀를 깨워야만 했다.

"지현누나"

"…우응…"

"지현누나"

"…정우…?"

"6시야. 일어나야지"

"이대로 있자…"

"누나도 바쁘잖아. 어서 학교 가야지"

"이대로…조금만 더…"

뭉기적뭉기적하면서 더 나를 껴안는 지현누나. 이거 어쩐다냐...

"일어나 지현누나"

"…싫어…좀 더 잘 거야…"

평상시에는 이렇게 떼를 쓰는 지현누나도 아니었는데..왜 잠에서 일어날 때만 되면 어린아이처럼 구는 거지...? 어찌되었든 지현누나가 이러는 것은 그녀가 여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

"…하아…"

오늘도 나는 지각을 해야 될 것 같다.

지현누나의 어리광덕분에 우리는 확실히 늦었다. 7시쯤이 되어서야 껴안고 있는 것을 풀어버리고 일어나는 그녀. 그녀의 등교시간이야 수능생이라서 어느 정도 늦어도 괜찮긴 하지만은..나는 40분까지란 말이다!!!

"아침밥 먹을 시간도 없겠다…"

아침밥도 먹을 시간도 없이 허둥지둥 등교를 하였다.

"지현누나 미안! 나 먼저 갈게!"

"우응…"

여전히 비몽사몽인 그녀. 그런 표정을 보면서 순간 '귀엽다!'라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을까.

재빨리 머리를 감고 샤워를 대충 한 뒤에 머리가 채 마르지 않은 상태로 교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또 지하철을 타야되네..지하철로 금방 학교는 가겠지만...

학교에서 교실까지 거리가 조금 있다는 게 문제지...

"하아…결국엔 늦겠구만…"

뛰어서라도 가려고했었지만은 안될 것 같아서 그냥 느릿느릿 걸어서 교문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라면 선생은 분명히 나를 차갑게 노려보면서 '들어가'라고 할 것이고..아이들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겠지.

드르륵...

"죄송합니다…"

시계를 보니 7시 50분. 10분 지각이었다.

"…들어가 앉아"

예상과는 다르게 무표정으로 이젠 아무렇지 않은 듯 들어가 앉으라고 말하는 담임선생이었다.

"예…"

'저 선생의 시간도…이제는…'

얼마남지 않았어...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