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21화 (1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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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8. jealousy · forlor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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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부글부글....

가스레인지에 데우고 있던 닭볶음탕이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끓는다. 서둘러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나는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같은 반찬들을 꺼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해놓으면 아침식사 준비가 완료된다.

나는 냄비에서 일정량 그릇에 담고 밥통을 열어 밥주걱으로 밥그릇에 눌러담았다. 내가 먹을 것들을 쟁반에 모두 올려놓아 방으로 가서 먹으려고 했다.

"오타쿠"

주말 아침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민정이가 일찍 일어났다.

"일어났냐"

"오타쿠가 다 해놓은 거야?"

"그럼 누가 하겠어?"

"…"

"식탁에 가서 먹어. 나는 방에 가서 먹을테니까"

그녀는 내 손에 들려져있던 반찬과 밥을 올려놓은 쟁반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리 내"

"왜?"

"같이 먹어"

"네가 싫어하잖아"

"…이젠 아니야"

"그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다"

"그냥 같이 먹어. 괜찮으니까"

"…너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니까 같이 먹자고!"

에구구..저 성질머리 하고는...

"…"

나는 쟁반에 올려놓았던 것들을 다시 식탁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그제야 만족한 듯 자신도 의자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어 먹고 있었다.

"뭐해. 오타쿠. 밥 안 먹고"

"…"

"내 얼굴에…뭐 묻었어?"

"아니"

"그런데…왜 그렇게 빤히…"

"그건 그렇고 지현누나는?"

"…언니는 왜?"

"지현누나 안 일어났어?"

"알아서 일어나겠지"

"지현누나 좀 깨워"

"왜?"

"다 식잖아. 원래는 지현누나가 먼저 일어날까봐 만든건데"

"…"

"지현누나는 너 분명히 깨울 거고 그래서 두 명이 먹을 것 올려놓았는데…"

"언니는 피곤해보여서 내가 안 깨운거야"

"그러냐?"

"오타쿠는 항상…지현언니.지현언니…"

"뭐?"

"오타쿠따위…"

"어째 너 화난 것 같다?"

"알 게 뭐야. 오타쿠따위"

"???"

"…잘 먹었어"

"다 안 먹어?"

"갑자기 밥맛 떨어졌어. 다시 잘래"

"…그러냐…"

그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민정이는 나랑 같이 밥 먹는 게 영 적응이 안되고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 만큼. 내가 그녀에게 쓰레기이고 싫은 존재라는 얘기가 되겠지…"

민정이와 도무지 관계개선은 안될 것 같다.

"스쿼시나 가서 실컷 후려야지…"

스쿼시를 하는 시간은 저녁. 그 남은시간은 텅텅 빈다. 할 짓은 미연시 밖에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미연시가 할 게 없었다. 문화제 이후에 으하하하!!! 하며 꿍쳐두었던 미연시들을 죄다 공략해버렸기 때문이다. 어제했던 미연시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고..게다가 일요일이라는 시간도 남아있었다.

맞다. 시험 2주 남았었지..에휴..슬슬 준비해야겠네..

톡톡.

한창의 상념에 빠져있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정우"

"지현누나?"

"응"

"잘 잤어?"

"나름대로"

"여기와서 밥 먹어"

"정우는 먹었어?"

"뭐. 대충은"

"민정이는…?"

"밥 먹다가 밥맛없어졌다고 다시 들어가서 자던데?"

"…"

"표정이 왜 그래?"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뭔가 일순간에 표정이 어두웠었는데..기분 탓인가..? 아마 요새 민정이가 우울모드를 타고 있다보니까 언니로써도 걱정되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겠지..가뜩이나 부모도 없고..

"정우. 왜 그래?"

"아니 그냥. 누나가 민정이를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래 보여?"

"어"

"아무래도…막내니까…"

"그래도 민정이는 지현누나 말 잘 따르잖아?"

"그런 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민정이도 나름대로 혼자서 해보려 열심히 노력해"

혼자서 노력을? 저 녀석은 맨날 탱자탱자 친구들과 노는 것 밖에...

"누나가 그렇다면야"

"정우"

"어?"

"…부모님 산소 가보지 않을래?"

"…"

"오늘. 부모님 기일이야"

"그랬었나…"

어제 민정이가 갑자기 부모님에 대해 얘기한 것도 그 이유에서...

"사실 친구가 같이 공부하자고 했었는데.. 모두 거절했어. 오늘 부모님 기일이라 성묘가야 한다고"

"민정이랑 갔다와"

"정우는?"

"나는 별로…"

"…"

"가봤자. 왠지 부모님에게 미움받을 것만 같거든"

"왜?"

"나는 8년 전. 장례식장에서도 절 한번 조차도 하지 않았으니까"

"…"

"그래서 가고 싶지 않아. 부모님도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 같고."

"아직…미워하고 있는 거지?"

"글쎄…"

'나는 부모님에게 다가갈 가치조차 없으니까'

뒤의 말은 생략했다.

"정우"

"응?"

"부모님에 대해…그만 원망했음 좋겠어…"

"원망이라…이미 죽은사람한테 원망은 뭘 하겠어…"

그러면서도 내 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직도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

그녀는 의자에 일어나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

"슬퍼보여"

"…"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한 없이 슬퍼보여서…"

그녀는 알고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

"미안해"

"…"

"미안해"

"…"

"미안해"

"…"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 알고 있다. '미안해'를 세 번만 말했어도..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줄곧 나를 냉정히 대해왔었으니까..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던 것..

그녀의 품은 따뜻하다. 가슴에 안겨서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뭉클한 느낌이 전해졌다.가슴이 꽉 막혀서..그녀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마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엄마'의 품과 같아서..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알지 못했었다.

민정이가 거실에서 내가 지현누나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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