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20화 (120/318)

0120 / 0318 ----------------------------------------------

Part 8. jealousy · forlornness

허접작가 Scribbler입니다.

"…"의 사용이 너무 많다고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셔서 "…"의 사용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그것이 잘 될런지 모르겠지만은..)

===============================================

새벽. 기말고사가 2주정도 남았지만 그래도 나는 미연시만 주구장창하고 있었다. 2D의 미소녀들은 변함없이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고 그리고 호감도 상승했다 싶으면 바로 옷을 벗고 주인공과 H신을 즐긴다.

그리고 뻔하디 뻔한 대사. "좋아해"라는 고백신이라던가 "살살 해줘" 라든가 "와줘"라든가 "하아앙~"이런 신음소리라든가. 이럴 때 미연시에서 음성시스템이 있었다면 분명 남자들은 더 오덕하게 되고 더 확실히 즐길 수 있었을텐데..

그런 바램을 가지고 있어도 '이 정도도 어디야'하고 만족하면서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왼쪽마우스를 누른다. 어쨋든 '집에서의 나'는 히로인들을 공략하는 재미에 빠져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리만족'일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절대로 되지않는 그러한 연애. 주인공을 좋아하는 히로인들. 게임을 할 때마다 나도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어 그들을 실제로 사랑한다던가 그 정도로 빠져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연시를 하면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욕망. 하지만 나라는 놈은 절대로 그러지 못한다는 절망.

누가 이런 어두침침한 인간을 좋아해준단 말인가. 그렇다고해서 내가 여자들에게 다가가서 작업을 거는 그런 대담한 놈도 아니고..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셀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적어 어떻게 대화해야 되는 지 조차도 모르는 놈인데..

요새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늘어서 다행이긴 하였지만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의 폭은 늘릴 수 없었다. 이래뵈도 나는 '왕따'란 굴레에 사로잡힌 혼자였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고는 다시 선택지가 나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루트를 기억해둔다. 나에게 공략집도 필요없다. 그저 노가다였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간이라는 놈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미연시공략하다 지쳤다싶으면 인터넷에서 새로이 나온 미연시가 뭐가 나왔는지 하고 검색, 일본사이트까지 뒤져서 직접 원문을 보고 해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JLPT(일본어 능력시험)이나 볼까..하고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냥 문법이랑 청해 등 어느정도 공부하면 성적이 나올 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민정이의 말대로 나는 '오타쿠'다. 확실한 '오타쿠'다.

'비상구', '도피처'

나에게 있어 '미연시'는 이러한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저 헛된 세계에서 노닐고 있는 어느 미쳐버린 정신병자.

그것이 내 스스로 정의하는 '박정우'라는 존재였다.

"오타쿠"

"엉?"

아까 전에 문을 쾅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던 민정이가 노크도 없이 내 방의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게…"

"나한테 무슨 할말 이라도 있어?"

"아까전엔…미안…"

"뭐가?"

"내가 멋대로 성질 부려서…"

"뭐야. 그런 걸로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거야?"

"그래도…에잇!"

"?"

"오타쿠. 이걸로 사과한 거다? 진짜로 사과한거다?"

그러고서 내 방문을 다시 닫아버리고 나가버리는 민정이. 뭐야 저 녀석...

"진정으로 사과해야 될 것은 나인데…말이지"

그녀에게는 항상 못난 오빠였고 그래서 나에 대해서 싫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막내'다. 그리고 나는 하나 뿐인 '오빠'다. 그런데 이 모양 이 꼴이니 싫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모 없이 넷 밖에 안 남은 우리 남매 중에 남자는 나 혼자 뿐이다.

더욱이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현누나는 미국으로 유학가서 우리를 맡을 수도 없다. 지현누나는 수능생이라 민정이를 챙길 여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그러한 것도 해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안함에. 그녀가 항상 나를 구박해도 나는 묵묵히 그녀의 쓴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녀가 나를 때려도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을지언정 절대로 그녀에게 분노해야하지 말아야했다.

어디까지나 나는 무능한 오빠였기에 '오빠'라는 소리조차도 들을 가치도 없을 지도 몰랐다. 민정이가 '오타쿠'라고 나를 부르고 비아냥거려도..그것은 당연한 일.

그러면 그녀를 지금부터라도 챙겨주면 될 것이지하고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두려움'이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예전의 지현누나와의 관계라고 보면 된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쌀쌀맞다. 대화는 어느정도 지현누나보다 많이 했었지만..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그녀를 챙겨준다고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녀는 되려 나에게 '내버려두라'고 성질을 부릴 거다.

가족구성원 사이의 '단절된 벽'은 무너뜨리기 힘들다. 지현누나와 화해를 했을 때에도 정말로 힘들었다. 그리고 그 벽을 무너뜨리는데 시간이 많이 소모가 된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만큼.

그리고 그녀는 '사춘기'였다. 한창 민감하고 예민해질 시기. 더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냥 이렇게 한탄하고 있어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멋대로 지껄이는 헛소리였고 하찮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 뿐이지만.

"하아…"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게 어디야..하고 그대로 만족한다.

그저 '자기합리화'할 뿐이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인터넷을 하고 있다보니 벌써 컴퓨터시계는 새벽 1시 20분이었다.인터넷이라는 건 확실히 '킬링타임'으로 손색이 없다.

"지현누나?"

민정이는 이미 자고있겠지라는 생각에 독서실에서 돌아온 지현누나라고 판단했다.

"정우. 방에 있어?"

예상대로 노크를 한 사람은 지현누나.

"들어와"

나는 항상 불을 끄고 컴퓨터를 했기때문에 불을 킨 뒤에 그녀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꼭 용건이 있어야 되는 거야?"

"아니. 딱히 나를 부를 일도 없고…"

"그냥 와본 것 뿐이야"

"누나도 공부하느라 피곤한데 자야지?"

"독서실에서 조금 잤어"

"그럼 무슨 할말이 있어서?"

"…같이"

"같이?"

"…같이…공부하지 않을래?"

"같이 공부하다니?"

"너도 곧 있으면 기말고사고 하니까…똑같은 시기에 보기도 하고…"

"상관은 없지만…내가 있으면 방해만 될 텐데?"

"아니. 독서실에 같이 가자구…"

"독서실에?"

"응…독서실은 칸막이도 있고 하니까…서로한테 방해는 되지 않을 거고…"

"흐음"

"그러니까 같이 공부하면…좋지 않을까 해서…"

"누나가 괜찮다면"

"정말?"

"나야 집에서 공부하든 독서실에서 공부하든 별 상관은 없으니까"

"그럼 월요일부터 같이…"

"그러지 뭐"

"고마워…같이 가줘서"

"딱히 누나가 고마워 할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누나 말대로 곧 있음 시험이고"

"그럼…잘 자"

"나 잠 못자는 거 알고있잖아"

"…미안. 그냥 인사하다가 나도 모르게"

"괜찮아. 순간적으로 까먹을 수도 있지"

그녀는 말 없이 일어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끼익하고 방문을 닫았다.

지현누나와 독서실에서 공부라..누나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데. 나도..뭐..나름대로 기쁘다. 그만큼 지현누나와 친해졌다는 증거가 또 하나 증명되는 셈이 된 것이다.

민정이와도 이렇게 말을 터놓고 했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타쿠"

내 방문 뒤에서는 쭈뼛쭈뼛 민정이가 서 있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 자고 있지 않았는데?"

"왠일이냐? 평소에 이런 늦은시간에는 자는데"

"오타쿠가 언제부터 내 수면시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렇긴 하지"

"오타쿠"

"엉?"

"지현언니랑…무슨 얘기 나눈거야?"

"얘기는 무슨…"

"무슨 얘기했어?"

이 녀석은 왜 캐묻고있는 거지..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자는데?"

"오타쿠랑 언니가 같이?"

"어"

"왜? 어째서 언니가 오타쿠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야 알 리가 있겠냐? 그냥 기말고사도 머지 않았고 누나랑 보는 시기도 똑같으니까 그 동안 같이 공부하자고 그러는 거겠지. 누나는 예전부터 유독 내 성적가지고 많이 뭐라 말했었으니까"

"…"

"왜 그래?"

"겨우 그런 말만 나누었던 거야?"

"어"

"정말로?"

"그렇다니까. 너 대체 왜 그러는건데?"

"오타쿠야말로"

"오타쿠야말로…지현언니랑…"

"지현누나는 또 왜?"

"…오타쿠는…"

"뭐?"

"지현언니랑…"

"뭔데 우물쭈물 거려?"

"바보…"

"?"

"오타쿠는 바보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바보! 멍청이! 폐인! 불면증! 미연시에 빠져사는 찌질이 오타쿠!!!"

쾅!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녀는 또 쾅하고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이것이 어젯 밤과 오늘 새벽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