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13화 (11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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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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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집합!"

복도에서 교관의 집합 외침이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여자애들 모두 복도 앞에 정렬.

"드디어 장기자랑이야…"

"너는 뭐 준비했어?"

"나야…"

남자애들과는 다르게 여자애들은 뭔가 준비를 해왔다는 듯 자신이 준비한 것들에 대해서 살짝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있었다.

"세희야 나올거지?"

"봐서. 정우야?"

"…?"

"조금 있다가 우리 쪽으로 와"

"…어"

세희와 같은 방 클래스메이트들도 복도로 나갔다. 나는 이불장에 숨어서 여자애들이 모두빠져나가거든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동!'소리와 함께 여자아이들의 수다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나는 더 기다리고 있다가 슬금슬금 이불장 밖으로 나온 다음에 복도에 누가 있는지 눈치를 살피고 예상대로 아무도 없자 계단을 내려갔다.

대강당에 들어서자 교관이 무대 앞에서 '박수!'하면서 손뼉을 치고 있었고 그에 따라서 학생들 모두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지금부터 한국고등학교 장기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함성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어디있다냐..나는 같은 반 아이들이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뒤에서는 학급 선생들이 장기자랑을 구경하기 위해서 의자에 앉아있으면서 늦게 들어온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반 아이들이 있는 곳을 찾았다.

"여기야!"

그녀가 나를 발견한 듯 손을 흔들며 반기고(?)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 인근에 2-c 남자아이들이 있는 줄 맨 뒷쪽에 앉았다.

"시체. 너 왜 이렇게 늦냐?"

"화장실"

"…그러냐?"

"잠신. 혹시 장기자랑 나가?"

"내가 할 리가…"

"하긴. 잠신이 할 리가 없지…"

"그러고보니 세희 무대에 나가려나?"

"당연히 나가야지않겠어? 아이돌인데?"

"보고싶다…세희의 라이브공연!"

"노래 엄청 잘 부르잖아"

"그러니까 보고 싶다는 거 잖냐. 여태까지 수련회 장기자랑하면 딱히 재밌어하지는 않았었는데 이번엔 완전 기대된다"

"…"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반 아이들역시 그녀가 무대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 두런두런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 본인 역시 나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갈등하고 있었고..그런데 아마도 나갈 거다. 그녀는. 학생들이 절대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을테니까.

"그럼! 첫 테이프를 끊을 공연은…2-B반의…"

2-B반 줄에서 있던 남자애들 4명이 일어서서 무대위로 올랐다. 그리고 시작된 그 4명이서함께 발라드를 부름으로써 장기자랑은 시작되었다.

노래나 혹은 춤으로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거나 아니면 내려앉게 만든다.

춤을 잘 추거나 고음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소리를 지를 때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좁디 좁은 대강당을 꽉 채웠다.

"우리 반 중에서 '내가 제일 잘생겼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지금 무대 위로 나와주세요!!!"

"와아!!"

"야 네가 나가라"

"내가 왜 나가 네가 나가"

"아니 너 잘 생겼잖아. 네가 나가"

"내가 왜 나가냐니까?"

"훗. 그럼 내가 나가볼까?"

"너는 꺼져!!"

"아니 왜? 사실이잖아?"

어떤 반은 나가라고 옥신각신 떠넘기고 있었고 어떤 반은 자기가 잘 생겼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스스로 무대 위로 올라갈 때마다 '오오~'하며 남자아이들은 물론이고 여자아이들도 합세해서 함성을 질렀다.

에고..시끄러워라..

그 와중에도 지루해서 서로의 다리를 베개삼으며 단체로 취침하거나 여자아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수다를 떠는 등 군데군데서 이러한 움직임도 보였다.

"정우군~"

내 옆에는 어느샌가 정시하가 앉아서 쿡쿡 내 어깨를 건드렸다.

"…너는 왜 왔냐?"

"정우군 심심해할까봐 왔지~"

"…전혀"

"혹시 졸려?"

"졸리지만 잘 수가 없어"

"무릎베개 해 줄게"

"그냥 구경이나 하련다…"

"내가 와도 관심없는 거야…?"

"친구들끼리 놀고 있는 줄 알았지. 수다를 떨든, 구경을 하든"

"그럼 얘기나 하자!"

"어이어이…"

"연세희"

"…세희는 왜?"

"세희가…신경쓰여?"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친한 거야?"

"'친구'니까 그렇겠지"

"친구?"

"아. 친구"

"남녀간에도…'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친한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여자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아무래도 신경쓰여"

"뭐가?"

"정우군이랑 연세희랑…"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냐"

"…그러면…나는…? 정우군한테 나도…친구야?"

"…어"

"그럼 누구랑 더 친해? 연세희? 아니면 나?"

"뭘 그리 캐묻냐…"

"샘이 나서"

"응?"

"정우군이랑 연세희랑 같은 반이잖아. 그게 샘이 나"

"…"

"나는…언제든지 너한테 고백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

"아직은…아직은 정우군이 나에 대해서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으니까"

"…"

"그러니…"

'질투'인가..만약에 세희와 내가 사귄다고 했을 때 그녀가 어떻게 반응을 할 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사귄다고 하면..분명히..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때문에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내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세희도 마찬가지. 그녀를 좋아하지만 그녀를 '이성으로써' 좋아하지 않는다.

왕따였음에도..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친한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에서 벗어나..나는 그 두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어디까지나 지켜보고 있는 '친구'의 입장에서..

"벌써 마지막 순서네요…"

학생들의 공연도. 교관들의 공연도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연세희!"

"연세희!"

그녀. 연세희의 무대만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나가지 않으려고 손사래를 치고 있었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강제로 일으켜세워서 떠밀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시하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아이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연세희의 무대인가 싶어서…"

"싫어?"

"당연히 싫어!"

"…"

"…첫 만남부터 이상했어. 저 애. 연예인이랍시고 정우군한테 맨날 붙어있잖아…"

"…에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도 전혀 이해가 안 가고!"

"…"

"어쨋든! 싫어!"

"…애들은 전혀 싫지 않은 분위기인데?"

"좋아하라고 그래! 정우군도 설마 연세희가 무대에 나서는 게 좋은거야?"

그녀의 주위에서 심상치않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말 잘못했다가는 예전처럼 칼을 꺼내서 날 죽이려고 할 지도..

"…그저 그래"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사실 그녀가 무대에 나서서 공연을 하는 것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옆에서 활활 불타고 있는 그녀가 있었으니..

"그렇구나! '친구'인 정우군은 연세희가 그저 그런 거구나!"

웃고 있다. 확실히 기분이 풀린 듯 헤헤 웃으며 나를 껴안고 있었다. 젠장..나를 갑자기 껴안으니까 주변 애들이 전부 다 죽일 듯이 노려보잖아..

"…커플질을 수련회가서도 하냐?"

"그러니까 말이야…박정우주제에…"

"예쁜 여자친구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죽일 놈"

"사람 염장지르는 것도 아니고…"

역시..좋게 볼 리가 없지..심지어 뒤에는 선생들이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러한 광경을보면 절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지..선생들도 '저 녀석들 뭐하는 놈들이야?'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정시하?"

"웅~♥ 왜 정우군?"

"…사람들 다 보니까 좀 떨어지지?"

"싫어~"

"어린아이같이 왜 그래?"

"좀만 더~"

"후…"

그저. 한숨 밖에 안나온다.

"연세희!"

"연세희!"

무대에 안 나왔나..저 녀석? 반 아이들한테 붙잡혀서 떠밀려진지가 언제인데 실랑이를 아직까지도 벌이고 있었다.

"이런이런…나오기 싫어하는 가 본데요?"

"우우~~"

야유소리도 들려왔다.

"세희양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조금 더 응원의 박수를 부~탁해요!!"

"연세희!"

"연세희!"

더 시끄러운 함성이 그녀를 무대위로 나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느릿느릿 무대 위로 올라섰다.

"결국에 할 거면서 거부하는 척 하기는…"

옆에 있던 시하가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를 던졌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와아!!"

공연 전에 마이크를 잡고 그녀가 무대인사를 간단히 하자, 남자들의 열광은 극에 달했다.

"혹시 노래 준비 되었나요…?"

"잠시…OK OK"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Beautiful'입니다"

멜로디가 울려퍼졌다. 그녀 자신의 노래를 할 줄 알았는데 팝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마이크의 상태, 멜로디가 좋은 소리로 울려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단 한번 들어봤던 그녀의 가창력으로 모든 것이 소화가 되었다.

밝고도 청아한 목소리가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모두 조용하게 그녀의 노래를 음미한다.

"So consumed in all your doom…Trying hard to fill the emptiness…The piece is gone and the puzzle undone…The way it is…You are Beautiful…"

노래 호소력은 시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노래가 끝났다. 전체가 열광하고 있다. 역시 연세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완벽한 무대였다.

"앵콜!"

전체의 앵콜도 쇄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안하겠다고 빠지려고했지만 연예인이다보니 이러한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그녀 자신의 노래. 밝은 분위기로 시작되는 곡은 끝까지 그녀의 이미지에 맞게 밝게 끝을 맺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귀여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공연하는 것을 보았다.

"저 녀석은…역시 무대체질이구만…"

마녀는 무대에서 그렇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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