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112화 (11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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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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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본격적인 수련회 활동의 시작이었다. 아침체조를 한 뒤에 아침식사. 그리고 뭐한다고 했지..? 에라 모르겠다..그냥..아무거나 하겠지..

"변태오타쿠"

아침식사가 끝나고 숙소에서 그녀가 참 징하게 오래 갈 것만 같은 나에 대한 호칭을 말하며 아이스크림 하나 할짝 거리고 돌아왔다.

"…왔냐"

"…헤에…"

"또 왜 그래?"

"오타쿠 다시 봤어"

"뭐가?"

"그 세명. 기절시킨 다음에 복도에다가 내다버렸잖아"

"그게 뭐가 다시 봤다는 소리인지…"

"오타쿠 실력 좋잖아. 아무도 모르게 우리가 자는 동안 '기절'시켜버렸으니…"

"…하아…"

"진짜로 내 보디가드 쓰면 되겠다"

"…보수는?"

"물론 무보수!!"

"할 리가 있겠냐!!!"

"에이~ '친구'사이에~"

"왠지 계속 네가 나에게 그 친구사이를 우려먹을 것만 같습니다만?"

"…칫 들켰나…"

"그걸 진짜로 수긍하냐!"

"왜 그렇게 성질이야 성질은"

"에휴…"

"그 세명도 모르는 것 같더라. 누가 그랬는지…아마 내가 했다고 했으니…믿어주겠지"

"…"

"그건 그렇고…"

"…?"

"아니다. 그 애들한테 '직접'들으면 되겠지"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왔네"

"세희…우리 버리고 먼저 가 버리면 어떡해?"

"미안. 밥을 일찍 받아서…"

"하여튼 남자애들이란…어…?"

"박정우 있었네"

"…세희랑 같이 먹은 거야?"

"아니. 나야 혼자 먹지"

"…"

"저기…박정우"

"왜 그래?"

"어제는…고마웠어…"

"뭐가?"

"그러니까…그거…네가 한 거잖아…"

"기절시킨 거?"

"응…우리들을 지켜주었잖아…"

"나야 뭐…여기에 묵고 있으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박정우"

"…응?"

"솔직히 세희가 너를 이 곳에 데리고 오자고 했을 때, 정말로 놀랬어"

"…당연히 그러겠지"

"우리들 모두 처음에는 반대했었고…세희가 아무리 착하다고는 하지만…"

이봐요 연세희양..아직도 이미지가 '착하다'로 굳어져있는거야..?

"…나라도 반대했을 거야"

"…하지만 세희가…"

"…친구라고…우리들에게…간곡하게…"

"…!!"

"그리고 우리들은…네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문화제 연극 때에도그냥 하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 묵묵히 역할 수행했고…평소에도…"

"…"

"그래서…"

'직접'들으라고 한 얘기가 이 얘기였나..? 이 방에 묵고 있는 여자애들이 나에게 감사와 사과를 하는 거..?

"…"

"다시 한 번 말할게. 고마워"

"…나야말로 받아줘서 고맙다"

전혀 관계개선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같은 반 여자애들과의 관계에 조금 '변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둘째 날의 오전과 오후는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파이프라인이나 단체줄넘기와 같은 협동활동 등 수련회에서 무조건 하는 그러한 활동들은 나 역시 참가해서 수행해나갔다. 여태껏 보이지 않던 내가 갑자기 와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차라리 계속 없으면 좋을 것이지 여기까지 와서…'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할 지라도..

나는 묵묵히 그러한 시선들을 받아들이고 활동에 임하였다(물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니까..어제 도착한 이후 시하를 보지 못했었다. 그녀도 자신들의 반에서 활동하느라 전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건 지극히 다행인 일이었다.

그녀도..'나'라는 존재 한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헤어진 여자친구에서 그냥 친구가 되어버린 그녀를 보면서..나는 그 동안 짊어져야했던 '그녀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놓을 수 있었다.(어찌보면 나는 무책임한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책임져야 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겨버렸으니..)

점심식사 때 우연히 그녀와 한 번 마주쳤었다. '정우군!'하면서 밝게 인사. 그러고나서 나와 대화를 하려는데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불러서 '미안! 나중에 얘기할게!그때 봐!'하며 아무런 미련없이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좋은현상이었다. 이렇게나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변태오타쿠"

"…앙?"

"뭘 그리 멍하니 있어? 돌아가자"

"…아"

그리고 이렇게나..나를 '친구'라고 여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제 뭐하지?"

"장기자랑일 걸?"

"진짜?"

"장기자랑이라…"

"세희야. 너도 나갈 거야?"

"아마도?"

"확실하게 말해. 나갈 거지?"

"그게 그러니까…애들이 반드시 나와달라고 부탁해서…"

"무엇보다 네 뜻이 중요하잖아. 너는 어떻게 하려고?"

"…나가야 되겠지? 나는 사람들 앞에 서야 되는 '연예인'이니까"

"역시 세희! 프로정신도 투철해…"

"애들도 많이 나갈 것 같아. 남자애들도 네가 나오는 거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고"

둘째 날 밤에 하는 활동은 다름아닌 '장기자랑'. 수련회의 필수코스 중에 필수코스였다. 애들이 지루하고 지루한 그러한 것이라고 비아냥거려도..아무리 관심없다고 빠지려고 해도..정작 장가자랑을 하고 있을 때 열심히 참여한다. 학생들이 박수를 치고..그리고 애들이 하는 걸 구경하면서 즐기는..

여태까지 수련회를 한 번도 안 와서 막연한 상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정우야"

"…?"

역시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변태오타쿠'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젠장..

"너도 나가보지 그래?"

"…뭐라고?"

"나가봐. 그러면 애들이랑 더 많이 '소통'할 지도 모르잖아?"

"…별로"

"나랑 같이하는 거…싫은 거야?"

"…!!!"

"세희야 그게 무슨…"

"그러니까…여태껏 꽁꽁 감춰왔던 정우의 숨겨진 매력이라던가…예를 들면…무대에서 얼굴공개?"

"…!!!"

"얼굴공개라니…화상이 있으니까 공개를 하지 않았던 거잖아?"

"…나는 봤는 걸. 정우의 얼굴"

"…화상이 있어서…얼굴이 조금…"

"그래도 봤어. 하지만 그건…'거짓말'이야"

"…에?"

"거짓말?"

"화상이 있다는 게…거짓말?"

"…"

"화상있는 것은 거짓말이야. 감추려고 하는 '사정'은 있지만…"

"박정우 그게 사실이야?"

"…"

"얘기해"

"…어"

"사람들한테는 보여지기 싫고…?"

"…어"

"…이건 어때?"

"응?"

"'우리들'한테만 얼굴을 보여주는 거야. 나 사실 궁금했거든..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지..뭐 얼굴이 궁금하기도 했었고. 우리 학교중에서 '유일하게' 얼굴이 알려지지않은 학생이니까"

"세희는 어떻다고 생각해?"

"그 정도야…정우야?"

"…?"

"얼굴 보여줘"

"…싫어"

"지금 싫다고 하는 거야?"

"…어"

"지금 싫다고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박정우?"

"…?"

"네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 봐"

"…!!!!"

"수련회가 끝나고…어떠한 남자아이가 우리 방에 숨어들어왔다고 애들 모두에게 말해버리면…"

"…협박이냐?"

"…글쎄?"

"내 얼굴이 뭐가 그리 궁금하다고…보기 싫은 얼굴인데…"

"우리는 안 그럴 수도 있잖아?"

"보여줘!"

"…안 그러면 콱 나랑 같이 무대에 나서게 만들어버린다?"

"…젠장…잠깐 뿐이다?"

"응!"

어째 여기에 있는 여자애들 전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냐..그리도 궁금했었나..

나는 머리를 천천히 걷어올렸다. '회색 눈'을 본다면..이 녀석들도 기겁하고 나를..

'이방인'취급하겠지..

절대로 보여주기 싫었지만..어쩔 수 없다.

가려졌던 시야가 트여진다. 그리고 회색빛 눈과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드러났다.

"…!!"

여자애들 모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것도 잠시. 나는 재빨리 머리를 만져서 얼굴을 가렸다.

"…보기 싫지?"

"…헤에…"

모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은 즉각 나왔다.

"정우 얼굴이 이랬었구나…"

"…왜 숨긴거야? '눈' 때문에 그런 거야?"

"…"

"'눈' 때문에…계속 차별을 받아왔어 정우는…"

"…정말?"

"눈이 그러니까…사람들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거야…"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인가…"

"불쌍해…"

"렌즈로 가리면 되잖아?"

"'거울'을 보면 원래대로 돌아와"

"…진짜? 거울을 보면 원래 '회색'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래"

"…박정우…"

"…왜?"

"우리는 그러한 것도 모르고…추한 얼굴이라서…가렸다고…"

"…"

"두려웠던 거겠지? 자신이 계속 그 눈때문에 '소외'를 받을까봐…"

"…"

"너는…그래서…"

"…"

"정우야"

"…?"

"우리들은 그러지 않으니까 안심해"

"…"

"차별하지 않아. 보여줘도…아무렇지 않아하잖아?"

"그게 뭐가 그리 거창한 것이라고 여태까지 가리고 다녔어? 불편하게…"

"…"

"그러면 우리들이 유일하게 정우의 '비밀'을 안 거네?"

"…"

고마웠다.

그들은..처음에는 싫어했을 지 몰라도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굴러들어온 '불청객'이라 했을 지라도..회색의 눈을 가졌을지라도..

어렸을 적에 겪었던 '소외'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나는 진정으로..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는 자그마한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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