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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Hypocri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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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후루룩 먹다보니 끼이익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 시간대 쯤에는 분명히 민정이였을 것이다. 지현누나는 수능공부하느라 늦게 들어오니 민정이일 거다.
그런데 교복차림의 기나긴 검정색 머리의 소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지현누나가 일찍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나는 이상하게도 바로 안녕이라는 인사를 하지 않고 조금 침묵한 뒤에야 인사를 했다. 아마 그녀에게도 소식은 전해졌을 것이다. 자기동생이 같은 반 여자아이의 매니저한테 두들겨 맞은 사실을. 그것때문에 뜸을 들였다.
아아..또 누나한테 못볼 꼴 보이고 말았네..나..
그녀는 나를 보고 있다가 아무런 반응 없이 자기 방으로 묵묵히 들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구급상자를 갖고오며 방으로 나왔다. 구급상자는 왜 갖고오는 거지?
"소파에 앉아"
그녀 말 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그녀가 앉더니 구급상자에 있는 연고와 밴드를 꺼내고 그 연고를 살짝 손에 발라서 내 턱을 문질렀다. 그 다음에 밴드를 연고를 바른 부근에 붙였다. 매니저한테 턱을 발로 차여서 상처가 생긴 듯 싶었다. 나야 양호실도 가지도 않았고 통증도 없었으니 내 턱에 상처가 있는 줄도 몰랐다.
"…들었어…오늘 맞은 일"
"…"
"왜 맞았어?"
"그러게…나도 왜 맞았는지 모르겠다…"
"말해"
"…뭐를?"
"뭣 때문에 너가 맞았는지"
"…그냥…별 거 아냐"
"상처…꽤나 심해…"
"통증도 없었는걸 뭐…"
"…계속…"
"…?"
"…계속… 나한테 숨길거야?"
"알고…있어…?"
"…그래"
"…"
"연세희…라는 아이때문이지?"
"…어"
"…그 아이…연예인이고…"
"…어"
"혹시…그 아이…좋아해?"
"아니"
"그러면…?"
나는 이래저래 변명만 하게 생겼다. 정시하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사실대로 연세희의 안에 '검은 뱀'이 있어서 그녀를 죽게 만들지 모른다고 얘기한다면 절대로 믿어줄 리도 없었고..이거..어쩐다..? 정시하때처럼 마땅히 변명거리가 생각나지가 않네..누나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빠져나가게 용납 할 것 같지도 않고..에휴..
"…응? 얘기해"
"…친구야"
"친…구…?"
"…어"
"…그래서?"
"친구라서 그랬어"
"친구인데…왜 매니저한테 맞아?"
"매니저는 나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있다니?"
"내가 왕따라는 거"
"…"
"게다가 남자이기도 했고. 연세희랑 가까이 붙어있는 것이 고까웠나봐. 그래서 맞은 것 같아"
"…나는…너가 상처 받는 거 싫어…"
"…?"
"어렷을 때부터 애들한테 맞았고…계속 맞고 다녔잖아…그래서 상처가…그리고…거짓말이잖아…"
"…?"
"시하도 그렇고…세희도 그렇고…모두 친구 아니잖아…"
"…"
"알고 있어…너가 학교에서는 줄곧 외톨이로 지내고 있다는 거…그래서 그걸 숨기려고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
"대체 뭘 숨기고 있는거야?"
"…"
"아직…나한테 감정이 남아있는거 알아…그래서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 것도 이해가 돼…하지만…조금은…"
"…?"
"나한테 조금은…마음을 열어주면 안돼?"
"…"
"나…참 나쁜 사람이지? 마음을 열어달라니…10년동안 상처나 주고…정작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그래도…그래도…너에 대해 알고싶어…"
"…"
"질투…일까?"
"…뭐?"
"으응…시하도 세희도 모두 이뻐서…그 두 사람이 정우 곁에 있으니…"
"…누나가 제일 예뻐"
"…내가?"
"…어…내가 본 사람 중에서…제일…"
나도 모르게 낯 간지러운 말을 해버렸다. 머리를 긁적거리고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부끄..러운건가?
"내가 얘기했잖아? 누나는 이쁘다고 …"
"…"
"…세희는…"
"…?"
"세희는…스쿼시에서 만났어"
"…같이 운동하는 거야?"
"뭐…그런 셈이지…만난 지도 별로 안되었고…솔직히 나는 걔가 연예인인지도 몰랐어…그런데 스쿼시에서 같이 운동하고 이번에 우리 반에 들어오고…"
"그렇구나…"
"사실 걔가 요즘 힘들어했어"
"힘들어…하다니?"
"가수 활동도 쉬고 있는데…변함없이 스케줄은 꽉꽉 차 있고…"
"그렇겠지…유명한 사람이니까…"
"스쿼시치면서 알고지내다보니까 나에게 힘들다는 말들을 하곤 했어. 그래서 그런 말들을 나에게 털어놓다보니까 자연스레 가까이 있는 거고… 그런 광경을 나에 대해 알고 있던 매니저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도 없어서…그렇게 된 거야"
"…"
"하지만 이제는…더 이상 걔와 얘기 하지 못해"
"…왜?"
"매니저가 막아버렸거든. 얘기도 하지 못하게. 그래서 그녀를 볼 기회도 없을거야. 학교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걔는 수업하다가도 스케줄때문에 조퇴해버리니까…"
'그러니까..나는 그녀가 죽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 밖에 없어..'
뒤의 말은 내뱉지 않았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더구나 믿어도 대체 왜 죽는 것인지 알지도 못할 테니까..오직 나만이 알고있었다.그녀에게 '구원'이니 '희망'이니 거창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한 '도움'도 해줄 수 없다. 알고 있으면서도..그래서 그녀가 더더욱이 알지 못하게 해야했다. 나의 '숨겨진 면'을 본다면..그녀가 안다면..그녀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숨겨진 세계에 사람이 가진 감정의 상처를. 이 외로움과 슬픔을.
그리고..그들의 존재가 비참하게 사라지는 것을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과 허무함을..
이것은 오직 나만이 짊어져야했다. 회색의 눈으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내가..모든 것을 짊어져야 했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랬었구나"
"…응"
"이제…얘기할 사람이 없으니까 외로워지겠네…"
"그렇게 외롭진 않아. 걔는 바쁜 사람이었고…"
"…외로워보여"
"…그럴 지도…"
"차라리…내가 동급생이었다면…"
"누나가 신경 쓸 필요없어. 누나도 수능준비하느라 바쁜 사람이고…나는 뭐…어차피 왕따여서 말 별로 안해도 잘 지냈으니까…"
꼬옥
"…!!!"
어느샌가 그녀가 나를 안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
"힘들다면…힘들다고 얘기해…외롭다면…외롭다고 얘기해…내가 있으니까…"
"…고마워"
"그래도…너한테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
"이번에는 너가 다가가는 것이 어때?"
"…?"
"얘기하지 못한다면서…? 하지만 매니저가 막고 있어도…다가가서 걔와 얘기를 했으면 해…나는…'친구'역할은 해주지 못하니까…조금은 너가 용기를 내서…스쿼시도 같이 치고 학교에서도 걔와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도와줘…친구라면…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지 모르겠지만은…먼저 다가가서 얘기도 해보고…너가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으면 해…"
"…"
그렇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노력도 하지않고 포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모른다. 남남인 그 녀석과 연결고리도 끊어진 상태였고 방해도 많았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나는 그 녀석의 옆에라도 있어야 한다. 그 녀석이 사라지더라도…'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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