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 / 0318 ----------------------------------------------
Part 4. Hypocrisy
==============================================
새벽을 두루뭉술하게 보내고 난 일요일 아침, 나는 밀린 빨랫감을 세탁하고 있었다.
지현누나는 얼마 남지 않은 수능에 대한 총 정리의 일환으로 학원에 가 있었고 민정이는 주말마다 친구들이랑 어디 맨날 놀러다니니 주말의 아침에는 나 혼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건조대에 모두 올려놓고 청소기로 집 안을 구석구석 밀어낸 뒤 컴퓨터를 켜고 미연시를 할 까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봄에 입을 옷이 모두 구멍이 뚫리거나 작아져서 입을 게 없었다. 외출을 되도록이면 안 하는 나였지만 장을 봐오거나 학용품을 사거나 외출 할 때가 가끔씩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옷을 사야 했다.
우리 집은 부자였지만 나는 별로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미연시를 확실히 즐기고자 컴퓨터와 LCD모니터를 지른 정도?(어이....) 그 외에는 옷이라든가 신발 등 여러 필요한 것은 잘 구입하지 않았다. 낡고 허름해질 때까지 썼다.
그래서 겨울이 지나가면서 4계절마다 옷을 준비해야한다는 대한민국의 생활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지구온난화때문에 그런 구분은 자꾸만 사라져가지만..)
나가기는 귀찮았다. 그러나 일단 한 번 사고나면 2~3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투자다..라고 생각하고 간단하게 옷을 입은 후 현관문을 나섰다.
내가 찾아간 곳은 동대문시장. 옷의 천국이기도 한 그곳. 그리고 입을 만한 것들을 싸게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 뭐 대형쇼핑몰같은 큰 가게에서는 비싼 옷을 취급하지만 시장거리를 활보하다보면 아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단 필요한 것이 뭐였더라..신발이랑 봄 옷(난방이나 긴팔,티셔츠같은 거)이랑 바지도 필요할 것 같고..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일부러 싸게 구입하기 위해서 지하철이라는 것까지 타고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거의 2년만에 오는 것 같아. 중 3때 옷 사러 이곳에 온 것을 빼고는 두번째였다.
주말이라 사람들은 붐볐다. 원래부터 사람이 많은 곳인데 주말이라는 이점이 사람들을 더 모이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완전히 고속도로에 있는 차들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아야했다. 나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지만(정확히는 어두운 곳) 중3 때 왔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지 않았었는데..역시 나의 판단미스였나..
사람들의 틈을 겨우겨우 삐져나가며 옷들을 찾기 시작했다. 가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옷들. 나는 그런 옷들을 위주로 쓸만한 것이 있나 하고 두리번두리번 찾아보았다. 이런 데에서는 소매치기가 극성이었기 때문에 지갑관리는 필수였다.
내가 신발과 옷 몇벌 그리고 바지를 사는 데 정확히 10만원 가지고 왔다. 10만원이라는 범위 내에 신발과 옷 몇벌 그리고 바지를 사야되었다. 원래는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이 싸게 구입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은 전자상거래를 하다보면 뭐 사이즈가 안 맞는다든지 판매자가 사기를 친다든지..(온라인 쇼핑몰을 제외한 인터넷사이트의 카페같은 곳)이런 저런 이유로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사는 것을 선호했다.
무엇보다. 이런 전자상거래는 들어는 봤지만 어떻게 하는 지는 모르겠다.
미연시에서만 줄창 빠져 살다보니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적응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자기합리화가 끝. 나는 동대문시장을 어쨋든 시간은 많이 있었기에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보면 괜찮겠다는 상품에 군데군데 눈에 띄어서 지르게 되었다. 그래서 쓰고보면 어느 덧 돈을 다 쓰게 되는 것이 순리.신발과 옷 그리고 바지 모두 샀지만 2000원 밖에 안 남았다. 젠장..더 아낄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다. 그냥 만족하자. 결국엔 비닐봉투 몇 개를 들고오며 귀가하는 나 였다.
파캉!
저녁 8시가 되어 스쿼시장에 왔다. 오늘은 혼자 였다.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 좀 사람들이 빠진 것 같았다. 어제는 한 12명이었는데, 오늘은 한 6명 왔나? 게다가 코트도 5개 였으니 대부분 같이 치는 사람들이었기에 나는 맨 구석에서 혼자 치고 있었다.
왼손잡이라서 왼쪽에서 포핸드로 열심히 공을 앞벽 구석으로 보냈다. 그래야 실력이 향상이 되니까. 앞벽을 치고 옆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오는 공을 자꾸 보내기 위해서였다.
어제의 게임을 하면서, 나는 자만하고 있었다라는 느낌이 들어 아직 멀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연습. 어느 한 분야에서든지 오랜시간을 갈고 닦아야 조금씩 조금씩 익히게 된다는 기본적인 것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공을 달구고 있었다.
끼릭하고 코트의 문이 열렸다. 누구지..?
"안녕"
공을 치고 있다가 날아오는 공을 잡고 뒤를 돌아보니 어른들로 득실득실한 저녁시간 부의 유일한 내 또래인 소녀, 연세희가 코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엔 왜…"
"기억 안나? 언제 시간 되면 같이 치자고 했잖아?"
"그랬었나…"
"어제 말했는데…ㅠㅠ…"
"아…미안…깜빡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 같은 놈이랑 치려는건지 잘 모르겠지만은 혼자 치는 것 보다는 낫겠지.
"어쨋든! 잘 부탁해!"
"에…?"
"너 어제 정말 잘하던 걸? 솔직히 동석이아저씨가 이길 것이라고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가 그 예상을 깨고 이겼으니…그래서 배우는 입장으로 너한테 배워보게."
"그런 거 선생님한테 배우면 되잖아?"
"저녁시간 부에서는 선생님이 없어."
"응…?"
"보통 선생님이 있는 것은 오후에 청소년들이 배우러 오는 시간대에 있지 잘 치는 어른들이 배워봤자 더 뭘 배우겠어? 그러니까 저녁시간부에는 없어. 그나마 가끔 있을 때에는 같이 게임이나 하고 있지 수업은 하지 않아"
"어른들한테 배우면…"
"어른들도 그냥 게임이나 하고 있지 가르치려는 그런 번잡한 짓은 하지 않아."
어째 말투가 달라진 것 같다?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조금은 차가워진 말투.
"그러니까 계속 혼자치고 있었어. 맨 구석에서."
그러고보니까 어제 말을 걸었던 아줌마도 맨 구석에서 혼자 치고 있었다고 얘기했지..
"나는 배운 지 별로 안되서 아직 게임을 할 만큼 실력이 부족해. 그런데 선생님은 없고 같이 치는 어른들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 그 때 너가 온 거지. 실력은 나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좋고 나랑 같은 나이 대라서 부담감도 없고..그냥 좀 음침하게 생겼다는 것을 빼고는..."
무엇보다 세희의 말투가 점점 차가워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어제 봤을 때는 착하고 상냥하고 뭐 그런 아이? 그러니까 미연시에서 말하자면 '천연'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그리고 나한테 '음침하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자면 이런 말들이 착한 사람들이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띄고있는 어조는 낮고 차가웠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말하고 있지만 말투에 따라 똑같은 말이나 달라지게 받아들여질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는 니를 아무도 못 알아봐줘서 좋지만…너무 알아봐주지도 않아…그냥 나이 18살의 '연세희'라고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야…자신들과는 세대차이가 나는…물론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냐. 그냥 이곳에 오는 것도 자신들이 즐기고자 함이고 그리고 나에 대해 잘 대해줘. 하지만…알 수없는 '소외감'이라고나 할까…그런 것을 느껴…"
"…"
연세희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이 즐겁고도 유쾌한 곳이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외로운 곳이었다..? 그런데 같은 나이인 내가 들어왔으니까 조금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가장 이 사람들한테 인기를 많이 받으면서도 다른 방면에서 본다면 가장 '소외'를 많이 받고 있었다. 모순된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면 '진실'이라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가 나를 가르쳐달라고."
"…니가 원한다면…"
"…부탁해."
"알았어."
이렇게해서 나는 그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