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53화 (5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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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Hypocri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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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제가 끝난 후의 주말 오후, 날씨가 다 풀렸다는 생각에 나는 오랜만에 스쿼시나 다시 해보기 위해서 라켓을 매고 인근에 있는 큰 스포츠센터의 문을 열었다.

축구라던가 농구같은 단체운동을 꺼려하고(정확하게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 옳다.) 혼자서 운동하는 것을 즐겨하는 나였기 때문에 스쿼시라는 운동은 나와 딱 알맞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시간이야 많고도 많았던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다. 나만의 라켓을 사고 스쿼시 선생님께 나름 열심히 배워왔었다. 그런데 겨울 때부터 날씨가 추워져서 집 안에 있는 횟수가 많아져 스포츠센터로 찾아가는 발길이 뜸했다.

"저기…운동 신청하려고 왔는데요…"

"무엇을 신청하시겠어요?"

"스쿼시요"

"평일과 주말 중에 언제 하시겠어요?"

"주말이요"

"…주말 시간은 오전 6시 오전 10시 오전 12시 오후 3시 오후 4시 오후 5시 그리고 오후 8시가 있습니다."

"오후 8시 가능할까요?"

"네 가능해요."

"그러면 그걸로 해주세요."

"네. 48000원 입니다. 오늘부터 하시겠어요?"

"네"

"여기 영수증 받으시고요. 스쿼시장은 지하 2층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켓 괜히 매고 왔나..오후 8시부터인데 지금은 오후 3시였다. 수강신청만 끊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딸칵열고 씻은 뒤에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켰다.

지현누나와 민정이가 둘이서 쇼핑을 가서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오후 8시까지 얼마든지 미연시를 공략할 수 있다 이거지..몇 십기가의 엄청난 양의 미연시들..이 정도면 한달은 버틸 수 있겠어..아니 3주인가..아니 2주다. 2주 안에 모두 공략할 수 있다.

그 동안은 심심하지 않겠어. 나는 알람종을 오후 7시 20분에 맞춰놓고 미친 듯이 게임에 몰두했다.

삐르르릉..삐르르릉...

히로인 공략이 늦어져 한 게임의 메인히로인조차 클리어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방을 나왔다. 이번 게임은 은근히..어렵네...선택지 조합을 다시 해야겠어..

나는 운동할 때 간편하게 입는 추리닝을 입고 라켓을 둘러 맨 뒤에 집을 나왔다.

오랜만에 오는 지하 2층에 있는 스쿼시장은 역시 넓었다. 큰 스포츠센터라서 스쿼시코트도 5개나 되었다. 선생님한테 듣기로는 코트 만드는 데도 관리하는 데도 많은 돈이 소비된다고 하던데..

라켓을 둘러매고 의자에 앉았다. 많은 아저씨들과 일부 아줌마들이 코트에서 열심히 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보통 스쿼시장에 갔을 때에는 아무도 없어서 코트 한 개를 골라 맘대로 혼자서 치곤 했는데..

"여기 처음왔니?"

옆에서 인심이 후덕하게 보이는 아줌마가 말을 걸어주었다. 음침하게 보여서 말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상대였을 텐데..그럼에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아니요…원래 계속 쳤었는데 처음으로 저녁시간에 와서 그래요."

"몇 년정도 쳤니?"

"8년이요."

"엄청 오래 쳤구나. 아무데나 들어가서 사람들한테 게임하자고 하지 그러니?"

"…"

사실 나는 8년동안 스쿼시를 쳐오면서 선생님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게임'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었다. 선생님과는 실력도 높일 겸 가끔씩 하긴 했었지만 여태까지 혼자서 치면서 실력을 닦았기 때문에..

"아니요. 기다리죠 뭐…"

처음보는 사람들과 친근하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나라면 더더욱..

"몇 살이니?"

"18살이요."

그 아줌마는 친근하게도 계속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당연할 수도..게다가 아저씨들 밖에 없는 스쿼시장에 어린 사람이 왔으니 관심이라면 관심을 주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러면 세희랑 같은 나이구나!"

"세희…?"

"아! 여기 이 시간에 오는 너랑 동갑인 여자애야. 얼마나 예쁘고 잘 치던지..자기 나이 생각도 않고 아저씨들도 멍하니 볼 때가 많다니까? 그리고 상냥하고 친절한 아이라서 우리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기도 하고.. 저기 맨 구석에 있는 코트에서 치고 있어. 같이 치자고 얘기해."

"별로…"

"사내아이가 이렇게 쑥맥이어서야. 예쁜 여자친구를 얻을 수도 있는 기회인데?"

"그런 것에 딱히 관심은…"

"에이~ 다 알고 있어 다~ 숨기려 하지 말고…"

"…"

"오~ 새로운 신입이 들어왔나 본데?"

"신입?"

"쟤 말하는 건가?"

"머리카락으로 얼굴 가리고 있는 애?"

"응"

"어서 와라~ 너와 같이 싱싱한 젊은 피는 얼마든지 환영한단다!"

"세희가 심심해하지 않겠네 그려.."

"그러게요..처음으로 같은 나이대인 아이가 들어왔으니.."

"이름이 뭐냐?"

"아..박정우라고 합니다.."

"박정우라... 정우라고 불러도 되나?"

"예. 얼마든지…"

"그럼 정우. 코트에 들어갈까?"

"네?"

"8년 쳤다면서?"

"8년씩이나 쳤다고?"

"잘하겠네.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했으니…"

"실력 좀 보여달라고."

"오~ 재미있겠는데?"

"내기 할까?"

"좋아 좋아 판 붙었고! 나는 꼬마가 이기는 쪽!"

"꼬마가 아니고 정우라니까 박정우."

"박정우든 알게 뭐야. 어리면 다 꼬마지 어쨋든 꼬마가 이기는 쪽!"

"그럼 나는 동석이가 이기는 쪽으로 할까?"

"지면..치킨 쏘는 거?"

"맥주까지 포함해서?"

"그것 좋지!"

어째..갑자기 내기 판이 만들어진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에요?"

맨 구석에 있던 코트에서 여자아이가 나왔다. 갈색머리를 뒤로 묶었고 하얀 색의 추리닝 바지를 입은 예쁜 소녀였다.

"세희 마침 잘 왔다~ 지금 신입으로 들어온 이 애랑 동석이랑 게임한댄다"

"동석이 아저씨랑요? 아저씨 게임 별로 안 하지 않았었나?"

"저 애가 8년을 쳤대."

"누구요?"

"여기 얼굴 가린 애"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박정우라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야"

"연세희야 잘 부탁해."

갑자기 스스럼 없이 악수를 청하는 그녀. 나는 한 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짜식~ 부끄러워 하기는!"

"젊을 때가 좋은 거여 젊을 때가"

"왜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이 말해? 우린 아직 60대라고"

"그런가?"

"할아버지도 참. 아직 청춘이라고요 청춘!"

"세희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 정말로 청춘인 것 같네 그려~"

"푸하하하!"

왁자지껄해졌다. 백발이 성성한 연장자인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저씨들 그리고 아줌마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

"그럼 게임 시작해야지?"

"신입~ 실력을 보여줘!"

"정우라니까."

코트에 들어가고 나서 동석이아저씨라 불리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잘 부탁한다. 정우야."

"아니요…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떨 것 없어. 그냥 즐긴다고 생각해."

"네…"

"그럼 서브권은 너에게 먼저 주마."

그러면서 검정색 조그만 시합용 고무공을 휙하고 나에게 던졌다.

"그러면! 치킨 배 스쿼시 시합이 있겠습니다!!"

"휘익~!!!! 동석 지면 알지? 꼬마한테 지면 굴욕이야 굴욕!!"

"신입! 쫄지 마라~"

주위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와 함께 시합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잘 해. 정우야."

그녀의 격려가 코트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어느 새 친근하게 정우라고 불렀다.

치킨과 맥주를 건 시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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