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49화 (49/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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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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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무사히 성황리에 마쳤다.

입소문을 탄 탓이었을까. 사람들이 어제보다 더 많이 찾아와주었고 나의 악역연기에 사람들의 욕은 갈 수록 늘어갔지만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 나오는 기립박수의 소리는 어제의 두배 세배 더 많은 것 같았다.

"오늘도 수고했어!"

"내가 봐도 우리 정말 잘한거 같아!"

"그런데 내일도 이렇게 연극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제도 자축연. 오늘도 자축연. 우리 반 애들은 여태까지 연극을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자축연 하나에 모두 풀어버렸다. 어디서 공수해왔는지 출처가 의심스러운 샴페인은 물론이요 케이크는 기본이었다. 샴페인을 터뜨리고 서로 샴페인을 뿌리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우리가 우승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우승할 지도!"

"예!!!!!!"

벌써 문화제 우승을 한다는 생각에 김칫국부터 마시는 우리 반 놈들. 어이 아직 다 안끝났거든요? 내일 하나 더 남았거든요?

"수고했다! 연극 오늘도 최고였어!"

담임선생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듯 박수를 짝짝치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도 선생이 있었나? 나는 그 때 없어서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정우"

"네?"

느닷없이 나를 부르는 담임선생.  지금 나를 부른 거야? 나? 어째서?

"너가 제일 잘했다. 악역연기이고 부담스러웠을 텐데 가장 잘해주었어. 수고했다."

"그러니까요. 저희도 놀랐다니까요. 뭐랄까..뭔가 진짜 백작같았다고나 할까..어쨋든 대단했어요. 어제도 오늘도 욕이란 욕은 관중석에서 얻어먹고 있었지만 여자애들도 나름 매력이 있는 캐릭터라면서 어제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었는데 그 때 이 녀석이 없어서.."

"사실 저희도 이 캐릭터를 얘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었는데…"

"어쨋든 이번 연극이 성공한 것에 대한 주 공신은 이 녀석이라니까요."

나도 그들에게 칭찬이란 칭찬이라는 것은 모두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 즐거운 자축연을 보내었다. 사람과 어울리는 거..꽤나 괜찮네..즐겁기도 하고..

"흐흐…그러고보니까 이 녀석 아주 지능범이야 지능범"

"크크크…나도 봤어 '그거'"

"너도 봤냐?"

"너도?"

"모두 다 본 것 같은데?"

"짜식~말도 없이 그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사귈 줄은…"

"그것도 상대가 '정시하'잖아?"

"팔짱을 끼고~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곰인형 선물~"

"자.기.야~♡"

"…"

이 놈들..다 봤구만...

"후…나랑 정시하랑은 아무 관계 아니야…그저…"

"에이~"

단체합창. 이로써 오해는 확신이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축연을 한 뒤에 지쳐버려서 모두 귀가. 나 역시 교실 정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정우"

지현누나의 목소리. 누나는 또 나를 기다린 건가..?

"…오늘도 기다리고 있었네"

"…응"

자동차가 쌩하고 지나가고 있는 길 옆에 있는 가로수가의 그림자가 뒤덮여진 인도. 어제는 밝은 분위기로 함께가고 있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조금 무거운 분위기였다. 누나도 나도 서로 말하지 않고 그저 짧아진 나와 누나사이의 간격을 두고 걷고있었다.

어색하였다. 왜 그러지..? 오늘따라 누나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우"

"…응?"

드디어 누나가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얘기해줬음 하는 게 있어."

"…?"

어째 불길하다. 설마..누나도...?

"오늘, 너가 '여자친구'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랑 팔짱끼고 걷는 거…봤어…"

"…"

"그리고 그 여자애가 너보러 '자기'라고 말하고 있었고…"

"…"

"사실대로 얘기해 줘. 그 여자아이. 너의 '여자친구'야?"

"…아니"

"그러면, 왜 팔짱을 끼고 그렇게 다정하게…"

누나의 분위기가 무거웠던 이유는 이것이었나..일단 사실대로 말해줘야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누나에게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너무 뭔가가 그렇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또다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해였지만..

"아 사실은..걔, 1학년 때부터 아는 애였는데…그나마 학교에서 얼마없던 알고 지내던 여자아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걔한테 스토커가 생겼다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위장 '남자친구'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 처음에 거절을 하려고 했었는데, 하도 절실히 보여서 오늘 남자친구인 척을 한 거야. 사실 그것때문에 애들한테 오해를 많이 받았어…"

"그런데 어째서 곰인형도 주고 막 그런거야?"

"진짜처럼 보여야했으니까. 그 스토커한테. 연기도 확실히해야 그 스토커도 속아넘어갈 것 같아서 협조 좀 제대로 해달라고 그 아이가 부탁했어…"

"…정말로 그런거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누나.

"응…그래서 그 여자애가 이런 힘든 일 시켜서 미안하다고 그랬어. 그리고 사실 나도 걔한테 미안해. 스토커 하나 때문에 오해가 생기게 만들어서…"

나도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사실을 숨겼다. 옥상에서의 시하와의 짤막한 키스도 역시..

"…그렇구나…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녀는 믿어주었다.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빛이 남아있었지만 이 정도면 통과한 것 같았다.

"…오해가 풀렸어?"

"응…"

그녀의 표정은 풀려있었다. 냉막한 분위기도 걷어졌다. 후...살았다...

"…!!!"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 다가오더니 팔짱을 꼈다.

"지현…누나?"

"…추워서 그래"

춥지 않았다. 찬 바람하나 쌩쌩 불지 않았다. 이건 필시 '거짓말'이었다.

"추우면…손 잡을까…?"

"싫어"

"…?"

"친구한테도…해줬다면서…남매인 나한테… 해주면 안돼?"

"…"

그녀가 어쩐 이유로 나의 팔짱을 갑자기 꼈는지 모르겠지만은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어 그냥 계속 팔짱을 꼈다.

"따뜻하다…이렇게 팔짱 끼니까…너랑…"

"…"

그녀와 팔짱을 끼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그저 그냥..걷고 있었다.

이 밤거리를. 단 둘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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