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색빛 세계와 검은 동물들-48화 (4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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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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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그녀를 구해줘야 했다. 데이트하고 자시고 간에 그녀의 목숨이 떨어질 판이었다.

탁.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을 제지했다.

"…놔. 얘기하지 못했잖아."

"일단 칼부터 내려놓고 얘기해."

"별로. 나는 너한테 거절 당했어. 그러니까 여기서 죽으려고."

"그런 것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  버리려고 하는 거냐? 겨우 나 하나 때문에?"

"그래. 겨우 그런 거 때문에 나는 목숨을 끊으려고 해."

"…"

"그런데 내 손목 붙잡았어. 칼 내려놓았어. 대답은 Yes라고 생각해도 돼?"

"…어"

"정말이지?"

"일단 나 때문에 사람 죽는 거 꼴보기도 싫고 무엇보다 자책감 때문에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너가 싫었어도..일단..'전'여자친구 였으니까..사람 목숨 구해준다고 생각하고…"

"다정한 사람이네. 정우군은…"

"그런 것 가지고 다정한 사람이 되는 거야?"

"응…너한테는 사소한 일로 느껴질 지 모르지만 그것이 남한테는 크나큰 감사가 될 수도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이 너한테는 큰 감사로 느껴진다는 거야. 데이트라는 것이?"

"기쁘니까. 너와 함께한다는 것에…비록 나의 억지였을지라도…"

"…뭐?"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면 갈까? 정우군~♡"

죽으려고 하는 진지한 표정에서 바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돌변. 그러면서 그녀는 갑자기 나의 팔짱을 끼었다.

"어이..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연인'이잖아? 적어도 우리 둘은 지금…데이트라는 것이 그런 거 아니야?"

"…그렇다고 팔짱을…"

"왜 싫어? 그럼 죽을까? 칼은 여러 개 있었는데…"

"아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헤헷~♡ 그럼 가자~"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자꾸만 '어디 갈까?'하면서 정말로 나의 '여자친구'라도 되는 듯이 팔짱을 끼고 남한테 애정행각으로 보이는 행동을 나한테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람 염장지르고 있다는 소리다.

"자기~♡ 나 솜사탕 먹고 싶어~"

그녀는 이제 정우군이라고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자기'라는 호칭을 확정지었다.

아놔..내 지갑에 고이고이 모셔둔 세종대왕님과 율곡선생님과 퇴계선생님 그리고 학 몇마리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들이 모두 날아가게 생겼네...

"얼마야?"

"500원~ 대빵 커~ 이 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손을 크게 벌리면서 유치원 어린 여자아이라도 되는 듯 솜사탕 사달라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어디 있는데?"

"저~~~~~어기"

"…알았어"

"히힛~♡"

솜사탕을 조금씩 깨물어 먹으며 맛있다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이럴 때는 '그 때'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맛있쪄~~~♡"

혀 짧은 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

"자기도 한 입~ 앙~♡"

"…나 단거 별로 안 좋아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 단 것도 잘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앙'하는 것을 받아먹을 수 있겠는가. 무슨 낯짝으로.

"힝…나는 자기랑 같이 먹고 싶었는데 ㅠㅠ…"

이러다가 자살한다고 협박할 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람있는 앞에서..

"알았어. 알았다고."

"괜히 튕기는 척하기는~ 앙~♡"

"…앙"

나도 조금 깨물어 먹었다. 솜사탕은 은근히 달고 맛있었다.

"맛있지~?"

"…어"

"꺄~♡ 맛있대~"

솜사탕이야 맛있는 거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꺄~라고 할 것 까지야…

"자기가 먹은 부분~ 내가 먹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그러면 우리 간.접.키.스 한 거얏~? 꺄~♡"

이제는 반 포기다. 귀여운 척을 하고 있는 그녀를 더 이상 막고 싶은 마음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지…

그녀는 주위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나와 함께 문화제를 즐겼다.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재밌는 것을 찾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만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하긴..그녀도 2학년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알려져 있었고..실제로 엄청 미인이기도 했으니까..팔짱을 놓지도 않고 이것저것 둘러보며 여러가지 행사들을 하였다. 뭐 스트레스 해소하려고 물풍선을 열심히 던진다든가 학교 뒤쪽 산에서 커플보물찾기를 한다던가 금붕어잡기 그리고 함께 점심도 먹고 남들이 보기에 '데이트'하고 있다고 확실히 보여질 만큼 우리는 정말로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고 있었다.

"자기 연극 너무 잘하던데?"

학교 별관 3층을 복도를 지나면서 그녀는 갑자기 어제있었던 연극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너 왔었냐?"

"그럼~ 누구 연극인데~♡"

"…"

"정말로…잘 하던데…마치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말이지…"

"…응?"

"그러니까 자기 정말 잘했다고. 자기 빼고 모두 다 발연기였는데 자기만 마치 진짜 배우같이 보였다니까?"

"그거 고맙네 너한테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어…"

"모두 다 자기만 잘했다고 하던걸?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데~♡"

"…그러냐"

"웅!"

"…이제 어디 갈거냐?"

"우웅…나 곰인형 얻고 싶어!"

이건 뭐 어린아이도 아니고..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에휴...

"어디서 곰인형 얻는데?"

"총 쏴서 맞춰서 떨구면 얻는 거 있잖아. 오락실 가면 볼 수 있는거."

"그건 또 어디서 봤냐?"

"학교 정문 쪽에서 봤어!"

이런 거 잘도 본다. 사람도 많았을 텐데...

"…그럼 가자"

"히힛~"

우리는 교문 쪽에서 두리번거리다 보니 정말로 있었다. 그런데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줄이 꽉 차 있었다.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힝…빨리 곰인형 안고 싶은데…"

그렇다고 내가 얻는 것도 아니거든요?

"일단 기다려보자"

"자기가 그렇게 말해준다면…얼마든지 기다릴게!"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의 말을 잘 따랐냐? 여태까지 지 맘대로 했으면서..아놔..

한 2시간 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우리 차례가 올 수 있었다.

"15발에 1000원 씩입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총탄 넣어드리겠습니다."

아이고.. 퇴계선생님.. 아이고..

철컥! 하고 나는 사냥용 엽총과 비슷한 총을 들었다.

"자기 홧팅~♡"

제발 그런 거 하지마라..쪽팔린다..상당히..

"곰인형 어떤 거?"

"저거~ 하얗고 큰 거~"

저걸 어떻게 맞추고 어떻게 떨구냐고. 지금 장난하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초롱초롱하며 간절히 원하는 눈빛. 에휴...어쩔 수 없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총을 장전하고 하얗고 큰 곰돌이인형의 미간을 노렸다. 일단 흔들거리게 해놓아야지..

펑!

총탄을 쐇다. 명중. 하지만 아직 흔들거리기만 했었지 떨어지고는 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총탄 장전하고 미간을 쐈다. 이제 버틸 수 없는 큰 곰돌이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꺄~~~~~~~♡"

나를 얼싸안고 폴짝폴짝 뛰는 그녀.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대단하네요…저거 떨구기 힘들었을텐데 단 두발만에…"

"하하…글쎄요…이게 대단한 건가요?"

"여자친구에게 좋은 선물이 된 것 같군요. 아직 13발 남아있는데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그냥 갈게요…곰돌이 인형 하나면 충분할 것 같으니까.."

"여자친구랑 좋은 인연 계속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네…"

젠장..이제는 학교에서 완전히 소문이 날 것이다. 정시하와 나는 사귀고있는 사이라고.

하긴 계속 팔짱끼고 학교를 돌아다녔으니 소문이 안 날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더욱이 커플들끼리 온 이곳에서 그녀를 위해서 곰돌이를 쏴서 주었다면 더더욱이.

이벤트장소에서 곰돌이인형을 얻고 우리는 학교를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고 복실한 곰돌이인형이 너무 귀여운지 꼬옥 껴안고 있었다.

"좋냐?"

"응!"

"왜?"

"그야 자기가 나에게 첫번째로 선물한 거니까! 내 보물 1호!"

"보물 1호까지야.."

"정말로 기뻣는걸? 곰돌이인형.."

어린아이. 정말로 어린아이 같다. 그녀는. 그녀는 너무나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함박웃음은 너무나도 귀엽다기보다는 여신의 미소랄까..웃는 순간만큼은 지현누나보다 더 예쁘다고 느낄 정도로...

어느 덧 시간은 흘러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연극을 해야 될 시간.

"자기…"

"뭐냐 또"

"마지막으로 한군데만 가자. 자기 연극도 해야되고…"

그녀가 가고싶어하던 장소는 옥상이었다. 우리가 오랜만에 서로 인사를 나누었던 그 장소. 내가 가지고 있던 옥상열쇠로 옥상 문을 열고 우리 둘은 들어갔다.

둘이 있기엔 너무 넓은 장소에서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장난기 어린 표정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기~'라며 아양을 떨며 귀여운 표정이 아닌, 그녀의 원래 표정..

바람이 산들하게 불며 그녀의 기나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같이 서 있는 것도."

"아…"

"고마워"

"뭐가?"

"여태까지 내 어리광 받아줘서…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잖아? 하지만 나 때문에…사실 나 죽으려고 하지 않았어. 나도 죽는 것은 두려우니까. 그런데 겁이라도 줘서 함께 하고 싶었어."

"…그랬었냐"

"응. 미안 정우군. 이렇게까지 마음고생 시켜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라는 친근한 어투를 사용하지 않았다.

"알았으면 됐어"

"마지막까지도 그러기야? 왠만하면 로맨틱하게 끝내고 싶었는데…"

"우리 사이에 로맨틱이라는 단어가 있었나?"

"아니. 없지… 확실히…그런 단어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

"좋다 이렇게 있는 거"

"…"

"이대로 계속…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얼마나 좋겠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그녀는 씁쓸히 웃고 있었다.

"그럼…갈게"

"아니"

"…?"

"잠깐만 내 얘기 좀 듣고 가줘"

"뭘?"

"…그냥…즐거웠다고…있지…이렇게 즐거운 날은 처음이야. 정말로 즐겁고 한바탕 웃을 수 있었어. 그래서 다시 한번 고맙다고…내 소원이 이루어져서 너무나 좋았어…"

"…?"

"자기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거 미안해. 어차피 여자친구도 아니었는데..솔직히 역겨웠지?그런데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어. 오늘은 즐거우니까…적어도..오늘만은…"

"…"

"그러니까 고마웠어. 정우군 그리고 이건…"

그녀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자신의 발을 올려서 살짝 나의 입을 맞추었다.

"그 답례야"

"…!!!!"

"후훗. 그럼 연극 잘하고. 나는 이만 가볼게. 시간 내줘서 고마워.."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걸음을 아주 천천히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으며 옥상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첫키스'라는 너무나도 짧았던..

하지만 자꾸만 맴도는 여운만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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